천태도량에 핀 연꽃(265호)

싸리나무·신문지로 만든 연등
불 뿜는 용, 날갯짓하는 봉황으로
현대 봉축행사 큰 축 이뤄

천태종에서 제작한 웅장하고, 화려한 각종 장엄등과 장엄물은 서울 연등회를 비롯해 전국 천태종 사찰에서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구인사 대조사전 앞마당에 늘어선 장엄등 중 일부.

매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종단과 사찰 간에 경쟁이라도 하듯 연등행렬에 선보이는 대형 장엄등은 연등회(燃燈會,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의 큰 볼거리 중 하나다. 특히 관문사를 비롯해 서울 지역 천태종 사찰에서 제작해 선보이는 황룡·청룡등, 흰코끼리등, 백제금동대향로등, 봉황등, 윤장대등(輪藏臺燈) 등은 서울 연등행렬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펼쳐지는 제등행진에서도 천태종 사찰들은 저마다 화려하고 웅장한 대형 장엄물과 장엄등을 준비해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주도하고 있다. 더욱이 이 모든 장엄물과 장엄등을 총본산 구인사와 개별 사찰에서 자체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 놀라지 않는 이가 없다. 이런 힘의 원천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천태종 부처님오신날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보며 그 비결을 엿보고자 한다.

1970년 전후 소백산 산나물 뜯어
사부대중들에 비빔밥 공양해

구인사 설법보전 착공이 1978년임을 감안할 때 197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구인사 사진이다. 초암 앞에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서 있다. 이 사진은 현 종의회의장 도원 스님이 소장하다 최근 기증했다.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원각대조사께서 소백산 구봉팔문 아래 구인사를 개산한 때는 1945년 단오다. 이후 구인사에서는 천태종만의 이색적인 부처님오신날 풍경이 펼쳐졌다.

한국전쟁 후 1950~60년대까지 전국의 수많은 국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처님오신날(당시 석가탄신일) 행사는 소박할 수밖에 없었다. 구인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1950년대는 스님과 신도들이 만든 연등을 초암(草庵)과 인근 나뭇가지에 내걸어 아기부처님 오심을 축하했다. 1964년 인광당과 보타전이 지어지며 형편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검박(儉朴)한 부처님오신날을 보냈다.

스님들에 따르면 1970년을 전후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상월대조사를 비롯한 모든 대중들은 소백산에 올랐다. 봉우리가 밋밋해 민봉으로 불리는 곳까지 40여 리(10km)를 걸으며 산나물을 뜯었고, 민봉 인근에서 나물을 말려 가져왔다. 이 나물로 부처님오신날 비빔밥 대중공양을 준비했다. 보리쌀조차 풍족하지 않던 시절, 멀리서 찾아온 신도들에게 맛난 공양을 넉넉하게 대접하려한 대중들의 따뜻한 정성이었다.

구인사는 현재 50여 동의 전각이 자연과 어우러져 장엄한 도량을 이루고 있지만, 1970년 이전에는 신도들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설선당과 판도암 등 몇 채 되지 않았다. 광명당이 1975년 세워졌지만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구인사를 찾은 신도들이 워낙 많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음력 4월초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량을 장엄한 연등 아래에 웅크린 채, 이불과 우비·비닐 따위를 덮어쓰고 밤새 기도를 했다.

당시 연등과 장엄등은 광도실 앞마당(현 삼보당 앞)에서 만들었다. 1972년경 출가한 비구니 성수 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해 초파일을 맞아 스님들과 신도들이 멍석을 깔고 등을 만들었어요. 살림이 어려울 때여서 철사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싸리나무를 등 재료로 삼았어요. 나무를 솥에 쪄서 껍질을 벗긴 후 등의 뼈대를 만들었죠. 양초도 손가락 굵기에 길이가 10센티 남짓해 금방 타버렸어요. 대중 스님들이 밤을 새워가며 다 탄 양초를 새 양초로 갈아 끼웠지요. 경내에 등을 달 곳이 마땅치 않아 나뭇가지에다 매달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신이 나서 고생스러운 줄도 모르고 초를 갈아 끼웠던 것 같아요.”

1960~80년대로 추정되는 천태종 사찰의 제동행렬 모습이다. 현수막을 통해 서울 동부지부, 울릉지부, 대전지부, 부산 광명사의 행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흰 고깔을 쓰고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행렬은 천태종 사찰에서만 펼친 이색적인 퍼포먼스였다.
1960~80년대로 추정되는 천태종 사찰의 제동행렬 모습이다. 현수막을 통해 서울 동부지부, 울릉지부, 대전지부, 부산 광명사의 행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흰 고깔을 쓰고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행렬은 천태종 사찰에서만 펼친 이색적인 퍼포먼스였다.
1960~80년대로 추정되는 천태종 사찰의 제동행렬 모습이다. 현수막을 통해 서울 동부지부, 울릉지부, 대전지부, 부산 광명사의 행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흰 고깔을 쓰고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행렬은 천태종 사찰에서만 펼친 이색적인 퍼포먼스였다.
1960~80년대로 추정되는 천태종 사찰의 제동행렬 모습이다. 현수막을 통해 서울 동부지부, 울릉지부, 대전지부, 부산 광명사의 행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흰 고깔을 쓰고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행렬은 천태종 사찰에서만 펼친 이색적인 퍼포먼스였다.

33인등 대조사님 제작 인가
밤새우며 연등에 양초 갈아

천태도량을 장엄하는 연등 중에는 천태종에서만 제작하는 등이 두 종류 있다. 바로 33인등과 봉황등이다. 특히 33인등은 상월대조사께서 생전에 대중들에게 제작을 인가하신 등이다. 이 등이 처음 만들어진 1973에는 재료가 부족해 종이박스와 신문지도 사용했다. 이후 형편이 나아지면서 한지로 만들었다. 33인등은 33명이 원력을 모아 함께 밝히는 등이다. 33개의 하늘[三十三天]을 의미하는 이 등은 전국의 불자들이 등을 통해 어우러지는 인연화합등이기도 하다.

봉황등은 현재 머리가 두 개지만, 당시에는 머리가 네 개였다. 스님들이 직접 리본을 만드는 끈을 오려 깃털을 달아 등을 만들었다. 봉황등 제작은 지금은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정성이 듬뿍 깃든 작업이었다. 팔각은 봉황의 둥지, 4개의 머리는 각각 암탉과 수탉 두 마리씩으로 음양의 조화를 나타냈다. 자식이 없거나, 부부간 다툼이 많거나, 결혼을 하고자하는 이들의 소원을 잘 이루어 준다고 신도들 사이에는 알려져 있다. 대중들은 등이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장엄물이란 생각에 지나다닐 때 등 만드는 재료를 넘어가는 것조차 삼갈 정도로 등 제작에 정성을 다했다.

1960년대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운동이 한창이었다. 당시 서울 제등행렬은 조계사에서 출발해 종로3가와 종각을 돌아오는 짧은 코스였다가 1970년대 들어 동국대와 장충체육관에서 출발해 조계사에 이르는 코스로 바뀌었다. 서울 제등행렬은 1975년 부처님오신날의 공휴일 제정을 기점으로 크게 성장한다. 제등행진 출발지도 여의도광장으로 바뀌어 범종단적 행사로 치러지게 됐다.

1990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봉축대법회. 천태종 종기와 태극기 장엄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의도 봉축대법회는 1976년 5월 6일 첫 법회 이후 1995년까지 20년 간 지속됐다. 여의도 봉축대법회 초기에는 불교계 처음으로 용등이 선을 보인다. 바로 천태종에서 자체 제작한 대형 장엄물이었다.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커다란 용등은 여의도에서 종로까지 약 8km 구간을 날면서, 구경 나온 수많은 인파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 용 장엄물은 불교계 장엄등과 장엄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천태종은 이후에도 대형 장엄등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그 기반이 바로 구인사 등방이다.

여의도 제등행진 용 장엄물 처음 선봬
구인사 등방서 전국 장엄등 제작

구인사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 관성당 옥상에서 대형 장엄물을 제작했다. 하지만 당시는 기반시설이 열악했고, 기술도 부족했다. 이후 불교계 전반적으로 장엄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천태종은 백자리에 공장형 등방을 별도로 건립해 완벽한 자체 제작시스템을 갖추었다. 이 등방은 부처님오신날 전후만 운영하는 게 아니라 일 년 내내 새로운 등을 구상하고, 지역 사찰의 장엄물을 제작·수리했다.

구인사 백자리에 위치한 공장형 등방은 2008년 10억 원 이상을 들여 이전, 신축했다. 600평 대지에 3층높이의 등방에는 2.8톤과 2톤 크레인이 각각 1대씩, 전기용접기, 알곤용접기, 산소절단기 등 장엄물 제작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다.

현재 구인사 백자리에 위치한 등방은 2008년 10억 원 이상을 들여 기존 등방 바로 옆에 새로 건축한 최신형 등방이다. 600평 대지에 3층 높이의 이 등방에는 2.8톤 크레인과 2톤 크레인이 1대씩 설치돼 있다. 또 전기용접기, 알곤용접기, 산소절단기 등 대형 장엄물 제작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다. 이로 인해 철골을 만드는 작업부터 페인트-전기(배선)작업-배접-방수(채색)처리까지 한자리에서 모든 공정을 진행할 수 있다.

지난 7일 찾아간 등방은 올해 서울 연등회에서 선보일 대봉황(2개)과 문수보살을 등에 올린 사자등, 황금알을 품은 닭등 제작의 마무리 단계를 진행하고 있었다. 기존에 선보였던 청룡, 황룡등이나 연꽃등, 흰코끼리등은 서울 관문사 등 여러 사찰에서 보수를 마치고 연등행렬에 동참하게 된다.

지난 4월 7일 등방에서 만난 거해 스님이 새로 제작되는 용등을 설명하고 있다. 입에서 불을 뿜기 때문에 입안은 석면으로 작업한다.
구인사 등방은 일년 내내 숨 가쁘게 돌아간다. 잔손이 많이 가는 33인등과 작은 봉황등 제작은 여름과 겨울에 실시하는 재가불자 한달 안거 동참자들의 울력을 통해 이뤄진다. 채색작업을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1970년대 초 처음 제작된 봉황등에는 봉황의 머리를 암수 각각 두 쌍씩 붙였다. 현재는 암수 머리 한 쌍이다.

등방에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조사전과 설법보전 앞마당을 장엄할 20여 종류의 장엄등 제작과 보수가 마무리돼 있었고, 구인사 구석구석을 밝힐 33인등과 봉황등도 3,000개 씩 준비돼 있었다. 두 등의 제작은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어서, 여름과 겨울 재가불자 한 달 안거 때만 신도 30여 명을 모아 울력을 통해 제작한다.

“전국 150여 개 천태종 사찰에 수많은 장엄등이 있는데, 모두 이곳 등방에서 만들었습니다. 큰 용등을 하나 제작하려면 꼬박 3개월이 소요됩니다. 그러다 보니 일 년에 세 작품 이상 만들기가 버거워요.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마친 후에도 등 보수와 보관 작업을 진행하는데, 전국 사찰을 순회하며 보수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래도 불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길 장엄등 제작을 중국에 주문하거나 외부업체에 맡길 순 없잖아요.”

등방 책임 소임을 맡은 지 11년째가 된다는 제등국 거해 스님의 말이다. 스님은 불교계 어디에도 구인사처럼 최신 시설을 갖춘 등방은 없다고 말한다. 청계천 유등축제 서울시 관계자가 찾아와 입을 딱 벌렸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굳이 스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천태종 부처님오신날의 변천은 한 편의 드라마였고, 한국불교 현대사의 부처님오신날 변천을 함축하고 있다.

삼광사 연등물결 CNN도 찬사
천태종 사찰, 지역 제등행진 주도

각 사찰에서는 지역 제등행진 때 선보일 장엄물과 장엄등을 보수한다. 2006년 관문사 신도들이 종무소 앞에서 각종 장엄들을 채색하고 있다.
대구 대성사는 지역 봉축행사를 주도하는 대표적 천태 사찰 중 한 곳이다. 2012년 당시 주지 유정 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용등의 보수, 채색작업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철사를 구하지 못해 싸리나무와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한지가 없어 신문지를, 전구가 없어 키 작은 양초로 불을 밝혔던 구인사의 부처님오신날. 하지만 지금은 판타지영화에나 나올 법한 화려한 대형 장엄물 수십 종이 구인사 경내 곳곳에 도열해 있다. 또한 33인등과 봉황등을 비롯해 수천 수만의 등이 구인사의 50여 전각을 수놓고 있으니,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만하다.

지난해 부처님오신날 구인사 봉축법요식에서 천태종 총무원장 춘광 스님이 관불의식을 하고 있다.

천태종 사찰의 역할은 전국 각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대표적인 사찰은 부산 삼광사다. 4만여 봉축등이 경내를 장엄하는 삼광사의 부처님오신날 풍경은 미국의 대표적 언론 CNN이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선’으로 선정했을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또한 부산 제등행진 때 20~30개의 대형 장엄등을 이끌고 나가 부산 불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4만여 봉축등이 경내를 장엄하는 삼광사의 부처님오신날 풍경은 미국의 대표적 언론 CNN이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선'으로 선정했을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부산 뿐 아니라 대구·대전·인천·울산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위치한 천태종 사찰도 마찬가지다. 천태종 말사들은 1970년을 기해 지부 창립이 활성화되기 시작해 1980년 이후 말사 건립불사가 잇따랐다. 이후 천태종 고유의 33인등과 종기등·태극기등으로 도량 안팎을 장엄했고, 구인사 등방에서 제작해 전국 사찰로 전달된 대형 장엄물로 지역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끌어올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장엄등을 보관, 관리할 수 있는 자체 등방을 갖춘 지역 천태 사찰만 50여 곳에 달한다. 서울 연등회와 비교할 때 지방에서 열리는 제등행진은 규모가 단출해 그 활약은 더욱 돋보인다.

신라 때부터 팔관회를 통해 전승돼 온 연등회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1,700년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숨쉬어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침체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제 거국적이며 세계적인 행사로 거듭났다. 오늘의 연등회가 있기까지 천태종과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겨레의 전통을 계승 · 발전시켜 온 굳건한 불심들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올해도 천태종의 멋진 장엄물과 장엄등이 방방곡곡에 물결치며 뭇 중생의 무명(無明)을 일깨워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5년 서울 연등회에서 천태종 장엄물과 장엄등이 동대문을 지나고 있다. 관문사의 마야부인 행렬 뒤로 성룡사, 명락사, 삼룡사의 용등, 태극기등 행렬, 흰코끼리와 양띠등, 부처님등이 줄지어 지나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