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265호)

신록의 계절 5월,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름다운 5월은 부처님이 오신 달이기도 하다. 백화가 만발하고 녹음이 무성해지는 싱싱한 계절에 부처님은 “하늘과 땅 위에 내가 오직 존귀하다!” 라는 사자후로 오셨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는 물론 우주의 모든 생명이 그 모습 그대로 최상의 존엄임을 깨우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어 5월은 더욱 찬란하고 감동적이다.

부처님이 오신 5월, 우리는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차분하게 부처님이 오신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언제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면서, 그 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과 기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잡아함의 경전 가운데 〈피안경(彼岸經)〉에 나오는 게송을 보자.

모든 사람으로서
저 언덕으로 건넌 이 드물게 있고
세상 사람으로서
대개는 이 언덕에 어정거리고 있네.
우리의 이 바른 법을
능히 잘 따라 행하는 사람
그는 저 나고 죽음의
건너기 어려운 강 건너느니라.

피안은 ‘저 언덕’이라는 말이다. 반대 개념의 말은 차안(此岸), 이 언덕이다. 어떤 곳이 이 언덕이고 어떤 곳이 저 언덕일까? 간단히 말하면 이 언덕은 욕심과 갈등과 대립이 우글거리는 중생의 세상이고 저 언덕은 부처의 세상이다. 불교에서 중생의 세상을 표현하는 말은 다양한데 그 가운데 고해(苦海)가 있다. 고통의 바다라는 말이다. 그 고통의 바다를 건너 저쪽 언덕에 이르는 것이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욕망을 따라 일렁이는 파도와 같다. 이 언덕에 어정거리며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물결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불교는 지혜의 강 혹은 지혜의 바다를 건너 극락에 이르는 방법을 일러주는 종교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차안을 떠나 피안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신 분이다. 그 안내서가 소위 ‘팔만대장경’이라 통칭하는 불교의 각종 경전들이다.

〈피안경〉의 내용은 아주 짧고 간결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팔만대장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품고 있다. 바로 피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진리, 즉 팔정도(八正道)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어떤 것이 차안이고 어떤 것이 피안인가에 대해 여쭈었다.

부처님은 그에게 “삿된 소견은 ‘저 언덕’이 아니요, 바른 소견이 저 언덕이다. 삿된 뜻, 삿된 말, 삿된 행위, 삿된 생활, 삿된 방편, 삿된 생각, 삿된 선정은 곧 저 언덕이 아니요, 바른 소견,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방편, 바른 생각, 바른 선정이 곧 저 언덕이니라.”라고 답하시고 앞의 게송을 읊어 가르침을 더욱 강조하셨다. 게송의 중간에 나오는 ‘이 바른 법’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팔정도의 내용이다.

사실, 팔정도란 불교를 공부하는 초보 단계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그만큼 불교 교리를 이루는 핵심이고 기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육성’이라는 아함부 경전의 골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개의 불자들은 이 기초교리 중에서도 기초에 해당하는 팔정도를 지키며 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이론은 알지만 실천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부닥치는 상황에서 팔정도를 떠 올리기보다는 현실적인[중생적인] 소견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 기본을 무시하면 그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다. 1층과 2층이 없는데 3층과 4층을 쌓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혼란도 결국은 기본이 무시되고 기초가 외면된 결과다. 성불을 말하는 불자들도 마찬가지다. 기본을 외면하고는 단 한 순간도 부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기본을 지키고 기초를 잃지 않는 삶이 참다운 불자의 드넓은 지혜임을 봉축의 연등 아래서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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