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과 윤회가 대세다

요즘 영화와 드라마에서 시간여행과 윤회가 대세다. 출생의 비밀과 불륜, 삼각관계가 아니면 이야기를 구성하지 못할 듯하던 막장드라마의 장에서도 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한 사람은 네 번의 생을 산다.”는 전제에 따라 극중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 저승사자와 그의 연인의 환생을 그린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는 20.5%로 종편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고, 주인공 공유는 영화배우 브랜드 평판에서 전지현, 김수현, 조인성, 정우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OST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는 두 달 연속 멜론 월간 종합차트 1위를 달리고 있고, 촬영장소 중 하나였던 주문진 방사제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3월에만 해도, 주인공이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는 시간여행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타임슬립(time slip) 드라마가 ‘사임당, 빛의 일기’, ‘내일 그대와’, ‘터널’ 등 세 편으로 뜨겁게 시청자를 만나는 중이다.

최근만이 아니다.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작가 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한 남자가 수십 년 전 과거로 돌아가 젊은 자신을 만나고, 과거에 가장 후회됐던 순간을 바꾸기 위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펼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드라마 ‘나인’에서는 CBM의 기자이자 간판 앵커인 박선우가 형의 유품에서 나온 아홉 알의 향을 피울 때마다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 한다.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조선시대의 관료가 현재에 환생하여 자기가 놓아준 인어였던 여인과 만나 사랑을 나눈다. ‘W’에서는 살인자에 의해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살인누명까지 쓴 만화 속 주인공이 만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여주인공과 사랑을 하고 진범을 찾아다닌다.

지금 40대 이후인 사람에게는 90년대에 상영한 영화 ‘진용(秦俑)’과 ‘은행나무침대’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자객으로부터 진시황을 구해준 주인공이 궁중에 들어가서 궁녀와 사랑에 빠져 화형과 석고형의 벌을 받는데 죽기 전에 불로장생약을 먹은 두 사람은 3,000년 뒤인 1930년대에 환생하여 만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지만 40년 후 다시 만나 사랑한다. 영화 ‘은행나무침대’에서는 미단공주가 은행나무로 환생한 혼귀(魂鬼)가 되어 전생의 연인인 화가 수현을 살리고 도우며 사랑을 한다. 그럼, 이렇게 시간여행과 윤회가 대세를 이루며 대중들의 환호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 철학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해석하는 가운데 불교적 해석도 겸한다.

시간은 둥글게 흐른다

오랫동안 인류는 시간의 지배를 받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논밭으로 가고, 해가 지면 돌아왔다. 달과 해·별을 보며 하루[日]·달[月]·해[年]를 나누고, 그에 맞추어 농사를 짓고 마을에서 나라에 이르는 행사를 치렀다. 근대는 시간을 더욱 잘게 나누고 거기에 에너지와 정보와 자본과 인간을 투여했다. 시간이 곧 돈이고 권력이기에 이를 표준화하여 세슘 원자가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할 때 걸리는 시간을 1초로 정하고 수십, 수백분의 1초까지도 측정하였다. 시간은 강물처럼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렀다.

시간의 지배를 받던 인간은 오랫동안 시간을 지배하기를 꿈꾸었다. 무엇보다도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를 바꾸어 달라진 현재를 맞기를 소망하였지만, 이는 말 그대로 망상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의 원리를 펴면서 타임머신이 대중도 아는 소재가 되었고, 시간의 역류는 ‘가능한 과학’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이후 과거나 미래의 어떤 시점으로 미끄러지는 타임슬립(time slip)이나 시간의 왜곡이 일어나 과거나 미래로 가는 타임워프(time warp) 드라마나 영화·애니메이션·만화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이는 시간을 지배하고픈 인간의 오랜 소망과 욕망이 과학을 만나 발현한 것이다. 왜 인간은 시간을 지배하려 했는가?

하나는, 현재의 삶에 대한 후회와 개선하기 위한 희망 때문이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실수와 잘못을 한다. 대개 실수와 잘못은 용서되거나 회복이 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때 인간은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되돌리는 꿈을 꾼다. 누구나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이라고 가정한다. 시간여행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연인에 대한 실수나 잘못을 되돌려 현재의 사랑을 복원하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 하나는, 복고에 대한 기억의 오류 때문이다. 흔히 추억은 아름답다고 한다. 당시에는 참으로 심하게 다투고 처절하고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라도, 사람들은 추억할 때면 좋은 감정에 젖는다. 왜 그럴까? 특정인과의 약속을 잘 잊어버릴 경우, 곰곰 생각하면 만날 사람이나 만나서 할 일을 몹시 싫어하는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예에서 잘 나타나듯, 괴롭고 위협적이고 기분이 나빴던 것을 스스로 억압하여 잊어버리는 ‘동기적 망각(motivated forgetting)’이 작용하여 우리는 불쾌한 감정의 기억들은 쉽게 잊는다. 무드셀라 증후군(mood cela syndrome)이라 해서 우리는 아름답고 유쾌한 기억과 좋은 사람들만 기억하고 싶어 한다. 모두 우리가 현재의 고통이나 시련을 과거의 좋은 감정과 에너지로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추억하면 기억의 주름 가운데 아름답고 좋은 조각들만 꺼내 맞추며 유쾌한 감정의 현(絃)을 울리게 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과거의 현장으로 통째로 옮겨가서 이 감정의 현을 울렸다면, 시간여행 드라마나 영화는 작품 안에서 과거로 되돌아 갈 때 이를 건드린다.

서양의 근대는 시간을 직선으로 인식했지만, 시간은 둥글게 흐른다. 21세기 오늘 우리의 몸이 타임머신을 탈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과거·현재·미래를 오간다. 촛불정국에서 “성찰 없는 과거는 미래가 된다.”고 하거나 “대한민국을 새롭게 상상하고 지금 여기에서 실천을 하면 미래가 된다.”라고 말한다. 화엄에서 보면 과거의 과거·과거의 현재·과거의 미래·현재의 과거·현재의 현재·현재의 미래·미래의 과거·미래의 현재·미래의 미래인 구세(九世)가 한 순간에 겹쳐진 것이며, 찰나와 무한이 서로 상즉(相卽)한다.

죽음의 두려움과 신분 상승의 좌절에
윤회를 꿈꾸다

인간은 왜 윤회를 꿈꿀까? 우선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누구나 언제인가 죽기 마련이며 이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 아름다운 자연, 맛있는 음식, 즐겨하던 운동과 좋아하던 취미 등 모든 것과 완전한 단절을 뜻한다. 죽음은 자신이 쌓은 모든 성취물과 의미들을 한꺼번에 상실하고 오직 홀로 맞이해야 하는 실존적 사건이다. 죽음은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니며 뜻하였던 모든 일을 해내던 몸이 흙과 물과 먼지와 기운으로 흩어지고 해체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영생과 윤회를 꿈꾼다.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의 지은탁(김고은 역)이 그런 것처럼, 인간이 네 번 살 수 있다면, 설혹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세 번째 죽음까지는 별로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전생의 상상은 고단한 현재에 대한 보상심리다. 오늘 나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재의 위상에 대다수가 갈증을 느낀다. “좀 더 높은 자리였으면, 좀 더 많은 연봉을 받았으면, 좀 더 명예나 인기가 높았더라면”하고 꿈꾼다. 하지만, 욕망은 신기루다. 부장이 목표였던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자마자 이사를 꿈꾸듯, 그를 향해 달려갈 때는 그것이 목적이었지만, 그에 이르자마자 욕망은 다른 것을 욕망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와서 불평등이 심화하고 계급의 유동성이 사라지자 ‘금수저/흙수저론’이 부상하였다. 현실에서 자신의 삶이 더 이상 개선될 여지가 없음을 절감한 대중들은 “내가 지금은 백수로 취업을 구걸하고 있지만, 전생에서는 수많은 시종을 거느린 왕자님이었을지도 몰라.”라며 전생의 삶에서 위안을 받는다. 전생의 상상은 신분 상승이 좌절된 대중의 집단적 환상인 것이다.

윤회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는 죽음에 대한 성찰과 현재의 삶에 대한 실존을 방해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의 조건이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사람이 처음에는 부정하고 분노하지만 체념하고 수용한 후에는 누구나 성인이 된다. 사랑하는 이에게 좀 더 베풀고 의미를 남기기 위하여 1분 1초에 모든 것을 던진다. 그처럼 인간은 죽음을 통하여 유한성을 인식하고 실존적 성찰을 한다. 죽음이 없다면 지상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며 우리는 성찰하는 삶, 의미를 추구하는 삶, 실존적 삶을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불교에서 볼 때, 윤회를 반복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 윤회를 되풀이할 경우 이는 업과 무관하지 않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마음으로[意業]·말로[口業]·몸으로[身業] 짓는 것에 따라 인(因)으로서 세력을 가지고 오온(五蘊)에 작용하여 어떤 결과를 낳는 과정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 바로 삶이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衆生]는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다.”〈Majihima Nikàya(中部)〉

지금 여기에서 선업을 쌓아 악업을 없앨 때, 개인의 업만이 아니라 집단이 지은 공업(共業)까지도 끌어안을 때, 그리하여 공업을 만드는 법·제도 그리고 시스템마저 개혁하려 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열반할 수 있다.

판타지는 즐거운 일탈이다

21세기는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의 시대다. 예전에는 사랑하는 남녀라는 현실이 있고, 이를 재현한 드라마와 영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거꾸로 되었다. 요즈음 두 남녀가 드라마와 영화의 사랑을 모방해서 현실의 사랑을 구성한다.

필자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혼전 성경험은 비난의 대상이었고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원나잇 스탠드 장면을 보면 역겨워했다. 하지만, 이제 상당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낯익은 사랑이 되었다. 미국인 또한 자신의 자유의지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 묘사된 ‘미국’, ‘미국적 생활방식’, 미국 배우들의 행위를 모방하여 사고하고 소비하고 생활한다. 평생 흑인이 없는 백인마을에서만 살아온 미국 백인 청년이 대도시에 와서 흑인을 처음 보자마자 몸을 숨기는 것은 미국 드라마에서 흑인을 범죄자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만든 가상의 현실은 더욱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한 소년이 자기 동생을 칼로 수십 번 찔러 죽였다. 이성이 돌아온 후에도 그 아이는 죄책감이 없었다. 롤플레잉 게임 중독에 걸렸던 아이는 동생이 아니라 게임 속의 악마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가상과 실제 현실을 혼동하거나 오고가면서 사고하고 실천하는 ‘매트릭스적 실존’을 하고 있다.

재현의 위기 시대로 오면서 판타지(fantasy)가 (현실을 재현한) 미메시스(mimesis)를 대체하고 있다. 예전에 시간여행을 하거나 윤회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다루면 리얼리티가 없다는 비판을 받고 별로 인기도 없었다. 하지만, 재현의 위기 시대에 와서 판타지는 즐거운 일탈, 가능한 상상, 더 나아가 삶의 부분이 되었다.

귀갓길에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나타난다면 당연히 그 길을 피해가겠지만, 영화 ‘괴물’을 보는 것은 즐겁다. 아름답고 섹시한 미인이 유혹한다면 이끌리면서도 도덕적 의무와 책임 때문에 망설이겠지만, 디지털에서 그걸 한다면 성적 욕망을 한껏 발산할 것이다. 독사와 흡혈 동물이 우글거리는 정글을 지나 야만적인 적의 수중에 있는 보석을 찾아오라 하면 손사래를 치겠지만, ‘반지의 제왕’을 보며 우리는 모험의 흥분에 들뜬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에 수억 명에 이르는 대중들이 열광하였다.

이처럼 판타지는 ‘즐거운 일탈’이다. 어떤 상처도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도덕적 의무와 책임 없이, 직접 경험하는 수고도 없이, 거의 공짜로 주어지는 즐거운 상상의 세계이다. 흔히 생각하듯 판타지는 황당무계함이 아니다.

“판타지는 사실에 대한 인식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개구리와 인간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개구리왕에 관한 동화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J.R.R. Tolkien)

개구리가 인간으로 변하는 상상 속에는 이미 개구리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인간의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을 알기에, 왕자를 개구리로 바꾸고 개구리를 다시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현실을 초월하고 사실을 벗어난 즐거운 상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판타지는 현실, 더 정확히 말하여 현실의 고통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빈궁기에 유토피아 사상이 꽃피고, 굶주리는 아이가 산해진미를 꿈꾸듯, 고통이 지극한 시대에 판타지는 고통이 없는 몽상이다. 판타지는 추악하고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탈출구이며,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위안이자 보상이다.

가난과 시련 속에 있는 어린이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콩쥐와 팥쥐〉나 〈미운 오리 새끼〉 동화를 읽고 고통을 잊고 희망에 부풀었을까? 이 지극히 불량한 현실을 맞아, 장기불황과 극심한 불평등으로 주어진 고통스런 현실을 떠나 누구인들 판타지 속에서 잠시나마 행복하기를 꿈꾸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판타지는 현실에 대한 전복(顚覆)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평범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잠을 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그러자 가족들은 그를 징그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누이마저. 그는 끝없는 소외와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마침내 그가 죽자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풍을 떠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는 현실성이 없는 환상적 장치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판타지를 통하여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 모두가 벌레임을, 소외당하는 고독한 개인임을 말해준다. 어떤 현실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한 어떤 리얼리즘 소설보다도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신랄하게 부정한다.

반면에 판타지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포장하거나 은폐한다. 시간여행과 윤회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 한 곳이라도 현실 정권의 비리나 모순, 국정농단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 있었는가? 1,100만 명의 노동자가 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고 언제든 해고당할 위기에 있고, 절반의 젊은이가 거리를 떠돌고 있는데 그런 실상들이 그려져 있었는가? 판타지를 볼 때 실상(實相)을 여여하게 직시하는 시청자의 태도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판타지와 미메시스의 종합을 향하여

시간여행이든 윤회든, 판타지는 미메시스와 종합을 이루어야 한다. 경주 서악의 선도산(仙桃山)에 오르면 유독 아미타불만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정토를 지향하면서도 굳게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아미타불처럼 신라인은 꿈과 현실, 예술과 삶을 하나로 아우르고 결국 부처마저 인간과 하나가 되게 하였다.

미메시스는 판타지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떠나려는 것을 현실의 맥락으로 끌어들이면서, 삶과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을 핍진(逼眞)하게 묘사하는 ‘구체성’과 타락한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성’의 미학을 추구한다. 판타지는 현실의 울타리와 억압을 넘어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하고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펼치면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이며 다양하게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미학을 연다.

앞으로 과거의 성찰을 통해 현재를 보고 올바른 미래를 전망하게 하는 시간여행, 유한성에 대한 실존적 성찰을 하고 지금 여기의 현재의 실상을 직시하면서도 다른 삶을 돌아보게 하는 윤회를 담은 드라마와 영화를 기대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한국기호학회 회장,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상임의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21세기 중앙 논문상, 원효학술상, 유심학술상 수상한 바 있고,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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