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국불교의 산맥(264호)

최순열


시인.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동국대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 동국대 연구처장·부총장을 역임했다. ‘언어관과 문학교육’ 등 문학교육론과 ‘한국문학의 정통성과 불교’ 등 불교문학 관련 글을 썼다. 시집 〈슬픈 어릿광대〉, 〈토란잎〉 등을 출간했다.

 

 

근대 이후의 한국 불교문인의 면면을 언급하기 이전에, 여전히 불교문학과 불교문인이라는 표제어가 그 개념의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주변부적인 입지에 머물고 있음에 대한 반성을 전제한다. 사실 근·현대의 몇몇 문인을 두고 섣불리 불교문인이라 명명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또한 불교문인이라는 범주를 불교문학인과 불자문학인의 통괄 개념으로 볼 것인지, 교집합의 개념으로 볼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질 수 있다.

물론 견강부회를 자제할 일이기도 하고, 불교의 교조적 내용 및 구현 방식과 문학의 독자적 규범성이 상호 충돌의 여지를 내포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불교나 문학은 그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의 귀결점이 인간의 존재성과 존재 방식인 삶의 양태와 그 주체가 되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명하고자 함에서 만난다.

따라서 불교 이념의 구현에 그 목적성이 있기보다는 문학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한 모색의 차원에서 불교정신을 구현한 문인들을 찾아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일단 작가정신이 분명히 불교정신에 바탕하고 있음이 명징하거나, 작품의 내용과 정서가 불교적 범주로 확연히 해석되는 경우에 국한하고자 했다.

사실 한국 근대사의 전개는 서구정신 지향의 시대사적 환경에 의해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인식에의 경도나, 면면해 온 유교적 전통의 과도한 부담을 극복하려는 경향에 의해, 그 동안 유구하게 지탱되어 오던 불교적 문화전통마저 폄훼되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근대시기의 일부 문인들은 객관적·실증적 과학철학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각성에 이르러 초월과 구제의 문학정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동양적 세계관과 불교사상의 맥락에 접속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지점에서 근·현대 불교문학을 구현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문인들을 호명해 본다.

한용운(韓龍雲)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으로 두루 불리어지면서도 어느 한 부분에서도 서로 어긋나거나 기우는 점을 찾기 어려운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시집 〈님의 침묵〉(1926)은 감히 한국현대시사에서 최고봉임을 확신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을 저술해내면서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침체된 불교의 개혁과 불교의 현실 참여의 강화와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주장하였다.

3·1운동 당시 백용성(白龍城) 스님과 함께 불교계의 대표로 선도하였다가 3년여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이후, 백담사 선방에서 단숨에 88편의 시 〈님의 침묵〉을 탈고하고선 이듬해 출간하였다. 이외의 문학적 소산으로, 장편소설 〈흑풍〉과 〈박명〉이 있으며, 특히 그의 〈십현담주해〉는 〈님의 침묵〉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거론된다.

그의 ‘님’에 대한 연구와 주장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불교적인 구도와 수행의 본질적인 원형을 대상화한 것으로 여겨지며,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고자 했을 터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님의 침묵)에서 회자정리의 연기론으로 부재하는 님을 향해 부단한 구도와 구애의 마음을 보내며,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복종)로 지극한 보살행의 서원을 보여준다. 마침내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나룻배와 행인)에서 님과 나는 일체화된다. 님을 기다리지만 또한 스스로 님이 되는 자타불이의 실상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행복)에서 그가 만년에 성북동에 일제를 외면하고자 북향의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깨달음의 수행단계 중 하나인 ‘심우’를 당호로 차용한 까닭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님의 침묵〉은 그의 독립운동정신과 불심과 시심이 하나의 언어로 응집된 결사체의 하나다.

그는 문단 권외에 있었으면서 당대 만연하던 외래 문예사조에 편향되지 않았으며,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정신의 실천의지로서 조국광복을 향한 불심과 시심의 일체화로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경지의 문학적 깊이와 폭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남선(崔南善)

개화기의 천재적인 소년은 신문화의 충격 속에서 조국 근대화와 신문화의 수용을 고민하다 일본 등 해외로 내닫기보다는 조선 안에서 그 뜻을 세우기로 한다. 그렇게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가 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고,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권두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인다.

그의 문학활동은 ‘조선심(朝鮮心)’으로 표상되는 조선주의를 주창하여 민족문학운동의 하나로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하며 시조집 〈백팔번뇌〉(1926)와 국토예찬의 수필집 〈심춘순례(尋春巡禮)〉(1926)를 간행하였다. 그가 추구한 조선주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전통적 사상의 맥락에서 불교와의 친연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제명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총 3부로 구성된 108수의 시조집 〈백팔번뇌〉에서 불타의 자비와 함께 만남­이별이란 제재를 통해 번뇌와 인간고에 시달리는 인간의 초극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제1부 ‘님 때문에 끊긴 애를 읊은’의 시편은 님에 대한 간곡하고 애절한 사모의 마음을 곡진히 드러내고 있다. 제2부 ‘조선 국토 순례의 주문으로 쓴’에서는 국토 순례 여행의 결과 자라난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자리이다. 제3부 ‘안두삼척(案頭三尺)에 제가 저를 잊어버리던’은 그의 서재인 일람각(一覽閣)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생활 주변의 감상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꽃의 이슬 속에 님의 낯을 뵈오리다”(안겨서)에서 이슬 속의 님을 통해 님의 부재를 통해 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리니, “심(心)은 내(內)에도 부재하고 외(外)에도 부재며 중간에도 부재”한다는 〈유마경〉의 불타 법신을 빗댄 것으로 평해지기도 한다. 이 시조집에 실린 시편들은 제각각 인과응보, 불심에로의 귀의, 만남과 이별의 고와 번뇌를 설파하고 있음으로 고구(考究)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결같이 마음으로 궁구하는 님이든, 국토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든, 자신의 진면목을 찾는 기도이든, 세속의 고뇌를 넘어서는 절대가치로서의 님을 지향하는 시적 태도는 진여를 기구하는 몸짓의 언어였다.

이러한 그는 당시 범태평양불교청년대회에 참석하는 한국 대표단을 위하여 5일 만에 저술한, 한국불교를 처음으로 국제회의에 소개하기 위하여 쓴 팜플릿용 책자로 조선불교청년회에서 발행한 〈조선불교〉(1930)를 통해 자신의 한국불교에 대한 통람의 지식을 유감없이 보여주게 된다. “처음으로 한국불교문화의 독창성과 한국불교 사상가들의 위대성을 평가”하였으며, 원효의 불교정신과 실천불교, 중생구제에 대한 정신의 새로운 발견, 종교의 목적으로서 중생구제 등 한국불교의 독창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가치 부여의 의의는 당시로서는 신기원적인 안목이 아닐 수 없다.

이광수(李光洙)

남양주 봉선사 초입에 역대 주지스님 부도비와 공덕비들이 있다. 그 가운데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 기념비’가 있다.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참으로 굴곡진 삶과 문학적 유산이 큰 산으로 남아 있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의 자취가 봉선사와 어떤 인연으로 거기 끼쳐져 있는 것일까. 그와 운허(耘虛) 스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다.

둘은 속가의 인연으로는 동갑의 8촌 형제지간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각자 나름대로 매진해오던 터, 1923년 이광수는 금강산 여행 중 유점사 반야암에서 운허 스님을 만나게 되어 깊은 감회에 젖게 되며, 그로부터 〈법화경〉을 소개받고 심취하여, 이후 스스로 법화행자라 칭하기도 했다 한다.

1930년대 중반 이후로, 이광수의 저작들은 불교적 경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초기의 기독교적인 박애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면서 그의 윤리중심주의적 경향은 불교사상과 접맥하게 된다. 그 단초는 이미 유점사에서 운허 스님과의 조우 이후 상호 교섭된 결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인 ‘이차돈의 사’, ‘무명’은 불교적 교리에 의한 사상적·정신적 요소로서 불교적 가르침을 중심적 주제로 하였다. 그의 종교적인 이념이 불교적인 세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조대왕’은 세조의 고뇌와 참회를 불교적 해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일인칭 고백체로 씌어진 ‘육장기(庄記)’로, 불교에 귀의한 자신의 심정을 매우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글에서 ‘나’가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삶의 원리를 석가의 사성제를 들어 비유한다.

우여곡절의 삶을 살던 이광수에게 해방 후 병약함과 친일훼절의 비난을 달래기 위한 거처로, 봉선사 경내에 다경향실(茶經香室)이라는 집을 내준 이도 운허였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지울 수 없는 이광수의 역사적 자취지만, 이광수의 문학적 활동의 후반부를 살피면, 그는 불교에 전적으로 귀의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봉선사에 1975년에 세워진 그의 기념비는 단순히 혈연적 인연의 연민과 우호만은 아니라고 본다.

오상순(吳相淳)

생전에는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않았지만 사후에 동료와 제자들에 의해 출간된 〈공초 오상순시집〉(1963)이 있을 뿐이다. 기인의 생활로 더 알려진 오상순(吳相淳, 1894~1963)은 원래 기독교 신자였으나, 불교로 개종하여 전국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참선과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실제의 삶에 있어서나 시적 행보에 있어서, 실체와 차별상을 부정하고자 하는 허무와 고집멸도를 통해 열반 위락의 경지에 듦으로써 고통, 번뇌, 대립, 갈등이 해소된 세계인 적멸의 사이를 오가는 모습으로 시종(始終)하였다.

초기 시편들은 주로 운명을 수용하려는 순응주의, 동양적 허무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금강산 신계사 등 유명무명의 전국 사찰을 전전하는 방랑생활을 하던 당시의 그의 삶이 고독 속의 허무였던 것처럼 시 ‘방랑의 마음’은 동양적 허무혼의 구도적 자세로 점철되어 있다.

시 ‘의문’에서는 ‘백발의 팔순 늙은 할머니’와 ‘초치의 어린 아이’의 상호 관계성을 제시하면서 불교의 연기를 환기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불교적 영원성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 ‘허무혼의 선언’에서는 ‘세계의 창조자–신’도, ‘우주 자체 일체 그것–불’도, '우상이요 독단이요 전제’라면서 “인간의 온갖 유위 무위의 차별상을 혼돈과 허무적멸의 세계에 넣고 일체상을 무로 환원시키는 절대허무의 세계의 선언”으로 읽히게 된다. 그는 현실의 욕망 너머에서 산 무소유의 사람으로, “무교리의 종교가요 초이론의 사상가요 시작을 넘어선 시인”이었다.

그는 가족관계를 거부하고 여러 사찰의 객사 등을 떠돌며 주거도 직업도 없이 방랑생활을 하였다. 환도 후부터 주로 조계사에서 노년의 몸을 기탁, 낮에는 명동 청동다방에서 매일 방명첩을 펼쳐 두고 여러 문인, 청춘군상들이 즉흥시를 엮어간 〈청동문집(靑銅文集)〉을 195권이나 남겼다. 이 역시 시업을 통한 보살행의 하나였는지 모른다.

독신과 방랑과 참선과 애연은 그 생활의 네 가지 특징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세속적인 일체의 영욕과 명리를 초월한 일관된 그의 생활이 굳이 불교적 삶을 긍정적으로 실천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바 있으나, 세속의 가치와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초극의지로 불교적인 세계관의 허무와 공의 세계를 추구하는 그 나름대로의 불심의 표출이라고 여겨진다.

김달진(金達鎭)

한시 번역과 경전 번역의 대가로 더 명망이 높던 김달진(金達鎭, 1907~1989)은 요즘에 와서야 시집 〈청시(靑枾)〉(1940)의 시인으로 복원되고 있다. 스스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자 서원”이며 “나름대로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부처님의 본뜻을 얼마나 정확히 전했는지 두려움이 앞선다.”는 그는 시 또한 수행의 방편으로 여긴 듯하다.

그가 일평생을 통해 혼신의 시심으로 풀어낸 역서로는 〈한산시〉, 〈장자〉, 〈법구경〉, 〈백운화상어록〉, 〈태고집〉, 〈대각국사〉, 〈보조국사법어〉 등이 있다. 또한 말년에 간행한 〈한국선시〉와 〈한국한시〉는 그의 오랜 역경 작업과 시업의 동행으로 집약된 결과물이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운악(雲岳)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수행생활을 하다, 중앙불전(中央佛專)에 입학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여기서 서정주 등의 시우들과 교유하게 되며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그는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동양 고전의 번역에 몰두하는데 운허 스님의 권유에 따라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으로 〈고려대장경〉 역경사업에 임종 직전까지 힘을 쏟았다. 그는 〈대장경〉 번역을 계속하면서 〈보조국사전서〉, 〈붓다차리타〉 등을 출간하는 한편, 멈추었던 시작을 재개하여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1983)를 출간한다. 그 외 장편 서사시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선시집(禪詩集)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 수상집 〈산거일기〉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시세계를 들여다보자면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보다/물속에 구름이 있고 흰 구름이/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조그만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나는 조그만 샘물을 들여다보며/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샘물)는 “천지만물이 나와 하나이며 우주와 나도 하나라는 연기론을 보여준 것이며, 또 어떤 인공의 힘도 가하지 않고 무위자연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노장의 자연사상인 동시에 선불교의 자연직관으로 통하는 첩경”이었다.

“하이얗게 쌓은 눈 우에/빨간 피 한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속속드리 스미어드는 마음이 보고 싶다(눈)”에서 보듯이 “교육과 문학사이, 종교와 문학 사이를 오고가며 시를 쓴 것도 오직 마음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을 얻었다.

그는 말년의 회고담에서 “보시는 보시를 잊어서 무루의 보시가 되고, 자비는 자비를 잊어서 큰 자비가 된다. 종교는 종교를 잊어서 진정한 종교가 되고 시는 시를 잊어서 영감의 시가 되고, 나는 나를 잊어서 비로소 온전한 나가 된다.”고 말했듯이, 수행이든 시든 경전 번역이든 오로지 자타일여의 불심으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서정주(徐廷柱)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국화 옆에서)로 생명 탄생의 인연설을 절창(絶唱)한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시세계는 그 정신과 기법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어, 어느 한 범주로만 규정하기는 버거운 무게를 지닌 거장임이 분명하다.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하여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의 정서를 부활시킨 시편들로 불교적 세계관을 절묘하게 엮어 보여준 시집 〈신라초(新羅抄)〉와 불교의 상징세계에 바탕을 둔 만물조응(萬物照應)의 상상을 보여준 시집 〈동천(冬天)〉을 들어 말하자면, 그만큼 능란한 세련미를 구사한 불교시인은 가히 없다고 할 만하다.

이런 시세계를 구축하기까지 그의 방랑생활과 정신적 편력의 근원에는 불교와 닿아 있다. 당대의 걸출한 선사였던 박한영(朴漢永) 대종사와의 인연을 필두로, 서울 개운사 대원암의 강원에 입학, 그 뒤 중앙불전에서 수학하는 과정을 통해 불교적 사상과 교양을 한껏 고양시킨 결과라 하겠다.

그가 초기시 ‘화사(花蛇)’에서 보여주었던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과 운명적 업고에 대한 인식은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의 불교에 대한 인식과 시적 상상력은 연기론에 의지한 인연설화의 전생을 토속적 분위기의 시적 형상화로 승화시켜내었다. 그는 ‘풀리는 한강 가에서’와 ‘상리과원(上里果園)’ 등의 작품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한(恨)과 자연과의 화해를, ‘학’과 ‘기도’ 등의 작품에서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면서 불교적 세계로 몰입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의 말씀’은 불교적 영생주의에 닿아 있는 신라인의 정신세계와 불교의 내세관이 어우러진 시편이며, ‘동천’은 5행의 행간에 불교적 관념과 상상적 사물을 결부하여 인연무진의 시편으로 빛이 난다.

그의 주옥같은 시들 중 어느 편을 짚더라도 불교적 현묘한 정서가 감응된다. “님은/주무시고/나는/그의 베갯모에/하이옇게 수놓여 나는/한 마리의 학이다 …… 님이 자며 벗어 놓은 순금의 반지/그 가느다란 반지는/이미 내 하늘을 둘러 끼우고”(님은 주무시고) 있다거나, “이별이게/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이별이게”(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읊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정신을 넘나드는 시세계는 불교의 사상이 얼마나 천의무봉의 표현으로 절절하게 승화된 경지를 말해주고 있는가.

그는 불교문학인으로서의 남다른 자긍심도 컸으니, 1970년에 “불교문학의 향상이 한국문학의 향상을, 나아가 한국문학이 세계 문학으로 발전하는 기틀임을 자각”하고 “불교의 문학성을 개척하는 사명”을 천명하면서 60여 명으로 〈불교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기도 했다.

조지훈(趙芝薰)

가히 동양의 정적 미감과 불교세계의 정서를 조화롭게 표현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승무)의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은 초기의 민족 정서, 전통 향수, 불교 선미(禪味)를 주조로 하던 시풍이 빼어났다. 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한 지성, 활달한 성품으로 투철한 역사의식 속에서 지사적 발언과 활동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달관의 정조로 대표되는 불교적 시심이 역사현실에 대한 통렬한 성찰의 기미로 작용하여 대승적 불교의 정신을 구체화한 불교시인으로서 현실 대응의 또 다른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적 원천은 역시 혜화전문에서 수학하고, 이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내며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면서 체득한 불교사상과 정서였다.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고사(古寺)’와 ‘낙화(落花)’ 등은 유교적 도덕주의의 격조 높은 자연인식 및 삶의 주제를 불교적 의식과 정서로 융합된 표현의 묘미를 십분 발휘하고 있다.

“목어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고오운 상좌 아이도/잠이 들었다/부처님은 말이 없이/웃으시는데/서역만리 길/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진다.”(고사)는 압축된 언어 형식이나 행간의 응축된 정서가 선정(禪定)의 고조됨으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부처님의 웃음’과 ‘지는 모란’의 대비 속에 ‘서역만리 길’을 가는 화자를 통해 승과 속의 일체를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는 ‘범종’에 이르면 불타의 자비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우주를 이룬다. “종소리 위에 꽃방석을/깔고 앉아 웃음 짓는 사람아/죽는 자가 깨어서 말하는 시간/산 자는 죽음의 신비에 젖은/이 텡하니 비인 새벽의/공간을/조용히 흔드는/종소리/너 향기로운/과실이여!”라니, 종소리는 향기가 되고 삼십삼천을 날아 극락왕생을 약속하는 부처님의 상호를 통해 중생의 무상과 진여의 영원성을 깨닫게 한다.

그가 추구해 온 불교세계의 진정한 체득을 시로 보여주는 절명시라고도 할 수 있는 ‘병에게’를 보면 그가 온몸으로 불심을 정진하여 달관의 정신에 이르렀는지 보게 된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 생애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지옥의 형벌이야/있다손 치더라도/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 잘 가게 이 친구/생각나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생과 사의 동일 지점을 매개하는 ‘병’을 ‘친구’로 칭하며 애써 인간적 회한을 극복하는 자세는 그가 쌓아온 불교적 인생관이 맺은 마지막 꽃이다.

그리하여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승무)이 그가 ‘병’과 얘기하고자 하는 인생의 결구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한국적인 정한과 불교적인 선 감각은 이후에 누구도 쉽사리 넘을 수 없는 불교적 시취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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