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읽는 부처님 말씀(264호)

우리 선조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그 감각이 잘 활용되었습니다. 굳게 중심을 잡되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중화시키고, 인간의 기술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되 자연과의 어울림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손을 댄 듯도 하고 안 댄 듯도 한, 끝나는가 하면 그 끝이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는, 건물은 자연에게 친구하자며 말을 걸고 자연은 조금 떨어져서 건물에 응답하는 가운데, 하늘과 땅과 사람에 관한 철학이 깃든 한국의 건축물들이 탄생하였습니다.

경복궁은 그런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그 경복궁 북쪽 후원에 향원정(香遠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조선 고종 때 지어진 이 육각 정자는 향원지라는 연못 안의 작은 동산에 있습니다. 연못을 건너는 취향교(醉香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953년에 위치를 옮겨 다시 지어졌습니다. 연못의 물은 북서쪽에 있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에서 흘러나와 중간에 한 바퀴를 돌며 차가움을 식힌 다음 연못으로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취향은 향기에 취한다는 뜻입니다. 하지(荷池)라는 표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못에 연꽃을 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꽃이 만발할 때 연꽃 향기에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연꽃 향은 은은히 멀리 퍼집니다. 향원은 멀리 가는 향이라는 뜻입니다. 은은한 연꽃 향처럼 백성을 위하는 군왕의 심향(心香)이 멀리 퍼져나가라는 뜻으로 정자 이름을 향원정이라고 붙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뭇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못 가나니
꽃이며 산달(Sandal) 향이며 자스민 향 또한 그러하다.
다만 덕(德), 그 향기만이 사방으로 퍼진다.

산달 향과 따가라(Tagara) 향, 연꽃 향과 자스민 향.
이 모든 향들을 어찌 계향에 비할 것인가?
위아래 향 가운데 으뜸은 너뿐인가 하노라.

따가라 향과 산달 향은 차라리 미미한 것.
계행의 향기가 훨씬 더 강하기에
천상에 이르는 향은 이뿐인가 하노라.

- 〈법구경〉 게송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게송을 사구게(四句偈)라고도 합니다. 네 구절로 된 시(詩)이기 때문이지요. 빨리어로 된 사구게는 한 구(句)가 여덟 음절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구게는 32음절로 된 시입니다. 〈법구경〉은 그런 사구게 423편을 보아 놓은 경전입니다(한 편은 중복되어 실렸습니다).

위에 인용한 게송들은 〈법구경〉 ‘꽃의 장’에 실려 있는 것을 제가 시조 형식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시조는 우리나라 언어에 딱 알맞은 율격(律格)의 시 형식입니다. 부처님 또한 인도에서 널리 쓰이는 율격으로 사구게를 지으셨으니 만큼 우리 또한 부처님의 게송을 시조로 번역하여 읽고 외고 읊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법구경〉 ‘꽃의 장’에서 부처님은 여러 형식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불법과 연관 지으십니다. 쾌락을 즐기는 것을 꽃을 즐기는 것에 비유하시기도 하고, 원정(園丁)이 꽃을 잘 분별하는 것을 수행자가 법을 잘 분별하는 것에 비유하시기도 하고, 깨끗하게 사는 삶을 꽃목걸이에 비유하시기도 합니다.

그중에 가장 멋진 작품은 여러 향기를 계향에 비유하신 게송들입니다. 그 게송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먼저 산달·자스민·연꽃의 향을 칭찬하십니다. 그런 다음 그들이 내는 향이 계를 잘 지키는 수행자가 뿜어내는 덕의 향보다 못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퍼지지 못하지만 계향은 바람과는 상관없이 멀리까지 퍼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저녁 예불 때 낭창(朗唱)되는 이 구절은 불법의 다섯 가지 향기를 찬탄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게송을 낭창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예불을 오분향례(五分香禮)라고 한다는 것을 우리 불제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계향은 오분향의 첫 번째 향입니다. 이는 계향이 불법의 여러 향기 중 가장 작은 향기라는 것을 의미하는데도 부처님께서 그 향기를 그 어떤 꽃향기보다 향기롭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나머지 향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모든 향기는 자신 안에 생깁니다. 꽃의 향기는 꽃 안에 생기고 계향을 비롯한 불법의 향은 수행자 안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향기의 근원을 좇아가 봄으로써 우리는 꽃향기가 꿀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수행자의 덕을 좇아가 봄으로써 우리는 수행자의 계향이 행복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를 잘 지킨 수행자는 행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아 자신에게 아무 허물이 없음을 알고, 그 앎이 자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계는 상계(相戒)와 성계(性戒)로 분별됩니다. ‘상계’는 마음속으로는 지키기 싫지만 억지로 지키는 계를, ‘성계’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는 계를 의미합니다. 계를 잘 지키면서 행복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그가 ‘성계’를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의 꿀에서 향기가 나오고, 수행자의 행복에서 너그러움이 나옵니다. 향기는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고 벌과 나비는 꽃의 꿀을 따가며, 행복한 수행자는 남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남들은 수행자의 너그러움에서 나오는 덕행의 수혜자가 됩니다. 불제자의 자리(自利), 즉 행복과 이타(利他), 즉 보살행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남을 먼저 위해야 할까요, 나를 먼저 위해야 할까요. 보살행을 강조하는 설법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얼핏 생각하면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위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경전은 엄청난 보살행을 설함으로써 우리를 주눅 들게 합니다.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린 싯다르타 태자나 몸을 난도질당하면서도 분심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인욕선인의 사례는 우리로서는 꿈같은 경지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타’에 앞서 먼저 ‘자리’부터 이루라는 가르침은 소중합니다. 요점은 이때의 이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리’라고 할 때의 이익은 물질적인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맑고 지혜롭게 하는 이익이 ‘자리’입니다. 마음이 맑고 지혜로운 불제자는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을 차지할 만큼만 차지하고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이 계행이며, 이 계행은 불제자에게 만족과 행복을 줍니다.

부처님은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하기 때문에 퍼져나가는 데 한계가 있지만, 계향은 멀리 퍼져나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세 살짜리 아기를 구한 소방관의 이야기는 전국에 알려집니다. 꽃향기는 사람의 코를 통해 맡아지지만, 향기로운 사람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에 감동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계를 잘 지켰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남의 계행을 알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 ‘상계’를 지킨 사람의 마음은 불편해집니다. 힘들여 억지로 계를 지켰는데 남이 안 알아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계’를 지킨 사람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자리, 즉 행복한 꿀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계행의 좋은 과보는 다 받았습니다. 남이 알아주느냐 안 알아주느냐는 것은 그에게, 배부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밥 한 그릇 같은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비록 남이 안 알아준다고 해도 인과법은 알아준다는 점입니다. 인과법은 사람의 눈에는 못 미치는 것까지 일일이 헤아려 줍니다. 그런 끝에 계행을 잘 지킨 사람을 그가 죽은 다음 하늘나라로 데려갑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계행을 잘 지킨 사람을 멀리 떠난 가족을 맞듯이 맞아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큰길가 더러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해맑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듯이

눈멀고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드맑은 지혜로써 영광되어 빛나나니
그들은 정등각자의 위대한 제자들이다.

- 〈법구경〉 게송

연꽃 같은 불제자가 됩시다. 맑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시다. 마음에 꿀이 있는 사람, 불법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너그러운 덕을 남에게 베푸는 향기로운 사람이 됩시다. 덕행의 향기가 멀리 천상까지 퍼지는 영광스러운 불제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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