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5월 8일 불기2561년 정유년 하안거 결제(5월 10일)를 맞아 결제법어를 내렸다.

진제 스님은 결제법어를 통해 “결제에 임하는 사부대중들은 먼저 왜 이렇게 모였는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법을 배우고 이렇게 모여서 수행을 하는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기 위함”이라며 “전장에 나서는 장수가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듯이 선불장에 임하는 수행자들은 이번 결제에 반드시 대오견성하고 말겠다는 의지와 용맹심을 먼저 철저하게 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안거 결제 법어 전문>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卽此見聞非見聞<즉차견문비견문>이요
無餘聲色可呈君<무여성색가정군>하니
箇中若了全無事<개중약요전무사>하면
體用無妨分不分<체용무방분불분>하리라.

이 보고 듣는 것이 보고 듣는 것이 아니요,

남음이 없이 모든 소리와 형상 있는 것을 그대들에게 바치나니,

이 소리와 빛깔, 모양 그 가운데 온전히 일이 없는 줄을 알 것 같으면,

진리의 체와 진리의 용을 나누고 나누지 아니하는데 방해롭지 아니하리라.

선(禪)을 선이라 하여도 시상가첨(屎上加尖: 똥 위에 똥을 더함)이요,

선을 선이라 아니하여도 참수멱활(斬首覓活: 목을 베고 삶을 찾음)이로다.

如何卽是<여하즉시>아?

어떻게 해야 옳으냐?

양구(良久)하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기를,〕

一片白雲江上來<일편백운강상래>하고
幾條綠水岩前過<기조녹수암전과>로다.

한 조각 흰 구름은 강 위에 떠 있고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을 지나감이로다.

금일은 정유년(丁酉年) 하안거 결제일(結制日)이라.

결제에 임하는 사부대중들은 먼저 왜 이렇게 모였는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라. 부처님 법을 배우고 이렇게 모여서 수행을 하는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기 위함이라.

결제에 임하는 마음자세는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시비분별은 내려놓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오직 대오견성(大悟見性)만을 목표로 하여 앞만 보고 나아가겠다는 다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

전장(戰場)에 나서는 장수(將帥)가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듯이 선불장(選佛場)에 임하는 수행자들은 이번 결제에 반드시 대오견성하고 말겠다는 의지와 용맹심을 먼저 철저하게 하여야 할 것이라.

중생들은 낙동강의 모래알과 같은 많은 전생의 업식(業識)과 습기(習氣)가 태산과 같이 막아서 있기 때문에 범부중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그러기에 그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업식과 습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타의 수행법이 아니라 화두참선을 해야 함이라.

간화선의 생명은 의심이니, 그 의심은 화두에 대한 믿음이 철저할 때 의심이 생기게 됨이라.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고, 챙기고 의심하고 이렇게 애를 쓰고 노력하면 진의심이 걸리게 됨이라. 이때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오직 화두 의심만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지속되다가 보는 찰라 듣는 찰라에 몰록 깨치게 되는 것이라.

화두참선이 최상승의 수행법이라는 것은 이렇게 일초즉입여래지에 이르는 경절문(徑截門)이기 때문이라.

화두가 있는 이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하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일체처일체시(一切處一切時)에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는 것이 화두참선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마조(馬祖) 도인은 유사 이래 가장 많은 도인 제자를 두었는데 무려 84인의 도를 깨달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안목이 투철하고 날카로운 기틀을 갖춘 이가 귀종(歸宗) 선사, 남전 보원(南泉普願) 선사, 백장(百丈) 선사였다.

귀종 선사와 남전 선사는 한 도인 밑에서 법을 받아 사형·사제가 되어 30년 동안 행각(行脚)을 한 도반이었다.

하루는 두 분이 바랑을 잔뜩 짊어지고 행각을 하시다가 목이 말라 차를 한 잔 마시려고 바랑을 풀어 놓고는 차를 달이고 계시는 차제에, 사제인 남전 선사께서 사형인 귀종 선사께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종전에 인연사(因緣事)를 논한 것들은 오늘 다 놔두고, 어떠한 것이 진리의 가장 최고의 극치사(極致事)인가?”

하시니, 귀종 선사께서 손가락으로 앞의 땅을 가리키면서,

“저 자리에 암자(庵子)를 지으면 좋겠다.”

하셨다. 그러니 남전 선사께서 받아서 하시는 말씀이,

“암자 짓는 것은 놔두고, 어떤 것이 극칙(極則)의 진리인가?”

하시니, 귀종 선사께서 차물 달이던 화로를 발로 차버리셨다. 두 분이서 목이 말라 차를 마시려고 달이던 냄비를 차 버리니, 남전 선사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는 차를 마셨지만 나는 아직 차를 못 마셨네.”

이렇게 나오셨다. 이에 귀종 선사께서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는 한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렵도다.”

이렇게 남전 선사의 살림살이를 점검하셨다.

그러니 남전 도인께서 더 이상 문답을 하지 않고 그만두셨다.

이와 같이, 가장 고귀한 것은 도인 스님네들이 만나서 진리의 세계를 논하고 서로 주고받는 법의 문답이로다. 이것은 천추(千秋)의 역사에 남음이로다.

발심한 스님네들이 이러한 법문을 듣고 진리의 눈이 열리면 그 이상 값진 것이 없도다. 또 이 법문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여기에서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고준한 진리의 눈이 열리어 만인이 우러러보는 진리의 스승이 됨이로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 남전 선사와 귀종 선사의 이 문답의 살림살이를 알겠느냐?

양구(良久)하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이르시기를,〕

碁逢敵手難藏行 <기봉적수난장행>이요
龍虎相搏難兄難弟<용호상박난형난제>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두 적수가 만나서 바둑을 두는데 있어서, 상대가 한 수를 놓으면 다음 수를 어디에 놓기 위해서 이 한 수를 놓는지를 서로가 다 꿰고 있음이로다.

기봉(奇峰)의 적수를 만나면 감추어 행하기가 어려움이요,
용과 범이 서로 부딪힘에 형이 되기 어렵고 아우 되기가 어려움이로다.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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