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나는 국토순례(264호)

문자가 기록으로 옛일을 전한다면, 땅은 흔적으로 옛일을 전한다.
그 흔적으로 읽어야 할 땅이 있다.
문자가 있기 전부터 그 땅에는 이미 삶과 죽음이 있었고,
문자가 있고나서도 그 땅의 삶과 죽음은 여전히 흔적으로 남았다.
선사(先史)시대부터, 신화의 시대, 슬픈 도읍의 시대와
간절한 불심의 시대 그리고 거친 부침의 시대까지,
문자의 역사보다 흔적의 역사가 먼저인 땅, 강화도다.

내륙에서 섬으로…세계 4대 갯벌

강화도 갯벌. 세계 4대 갯벌 중 하나인 강화도 남단 갯벌이 석양에 물들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한 강화도는 김포반도의 끝이 오랜 세월 침강하면서 생긴 섬이다. 제주ㆍ거제ㆍ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내륙에서 1km 남짓 떨어져 있다.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강화도의 남쪽 갯벌(천연기념물 제419호)은 세계 4대 갯벌 중의 하나이다.

한강ㆍ예성강ㆍ임진강 등 3개 하천의 어귀에 위치하면서 서울의 관문이 되는 강화도는 그 태생이 지닌 위치와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굵직한 한국사의 많은 부분을 지나간다. 실 같은 바다길 하나로 땅의 이름이 바뀐 강화도. 그렇게 달라진 땅의 이름이 그 땅의 운명도 바꿔놓은 것은 아닐까? 내륙이었던 시절, 배를 타고 건너야 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튼튼한 다리가 내륙과 섬을 이어준다.

선사(先史)의 흔적, 고인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화 부근리 지석묘.

인류 역사의 95%는 문자가 없는 시간이었다. 강화도에는 문자가 없던 시절, 즉 선사(先史)시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그것이다. 의식을 치르던 제단이거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은 세계 각지에 분포돼 있는데, 그 중 40%가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 중 150여 기가 강화도 고천리ㆍ교산리ㆍ부근리ㆍ삼거리ㆍ오상리 등에서 발견됐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 제137호)와 오상리 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 등 70여 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뿐 아니라 고인돌 발견 당시 구석기시대의 구형석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조각 등 고인돌보다 앞선 시대의 유물도 함께 발견됐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인류의 흔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의 출발점은 500만 년 전, 혹은 그 이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오늘에서 그 아득한 숫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인돌의 그림자 끝에 서서 돌 위에 적힌 우리의 지난날을 바라본다. 강화도에선 문자를 거치지 않은 우리의 지난날을 볼 수 있다. 의문으로, 흔적으로 읽는 또 다른 역사다.

신화의 흔적, 마니산 참성단

선사시대를 지나 신화(神話)의 시대로 간다. 마니산이다. 해발 472m 정상엔 참성단(사적 제136호)이 있다. 바로 참성단이 신화의 흔적이고, 그 주인공은 단군이다. 역시 당대의 문자는 없고 훗날의 문자가 그 시대를 ‘신화’로 적고 있다. 단군신화다.

“옛날 환인의 아들 가운데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구했다. …중략…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는 당시로부터 2,000년 전의 일이라며 첫 장에 적고 있다. 참성단은 그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이 천제를 지내던 곳이다. 단군의 탄생신화는 이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나라, 고조선(근세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부름)의 건국신화로 이어진다.

“단군왕검은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 만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중략… 그는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의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황해도 구월산 기슭)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신화 속엔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단군이 산신이 된 후에 마니산에서 지냈다고 적고 있고, 〈고려사〉에서는 마니산에 단군을 모시는 제단이 있었다고도 적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가 옛 기록을 통해 적은 것이니 단군이라는 신화의 근거와 참성단이라는 흔적의 근거는 다른 문헌들 속에도 있을 것이다.

단군의 탄생신화와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잊히지 않고, 여러 문헌들이 그 백성의 후일을 이어서 적는 등 오늘에까지 전한 것을 보면 단군신화는 고조선만의 신화가 아닌 이 땅의 신화인 듯하다. 그리고 신화의 문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신화의 근거는 문헌만이 아닌 마니산 봉우리에 분명한 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단군은 지금도 마니산 기슭 어딘가에서, 혹은 참성단의 제단 위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마니산 정상, 참성단에 서니 하늘이 가깝다. 많은 사람들이 참성단을 찾아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신화의 근거가 사실이든 아니든 눈앞에 보이는 옛날의 흔적은 오늘을 돕고 있다.

선원사지. 팔만대장경 판각처로 추정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이견이 일고 있다.

간절한 불심 선원사지ㆍ천태의 향수 봉은사지

신화의 시대를 지나 불심의 시대로 간다. 선원면의 선원사지(禪源寺址, 사적 제259호)다. 그 불심의 시절은 고려의 슬픈 역사에서 시작된다. 슬픈 도읍의 시대와 함께 한다. 이 땅에서 불심이 시대와 함께 해온 것은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지만 그 시절 강화도 땅에서 시작된 불심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고려궁지. 고려 조정은 몽골의 2차 침입에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새 궁을 지었다.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2차 침입. 고려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다. 고려 조정은 강화면 관청리에 새로운 궁(고려궁지ㆍ사적 제133호)을 짓고 힘겨운 역사를 시작한다. 오늘날 고려궁지에 고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의 외규장각과 이방청 등이 들어서 있다. 이렇듯 1270년(원종 11) 고려 조정이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38년 동안 강화도는 고려의 도읍으로 살아간다. 간절한 불심의 시절은 그렇게 시작된다.

몽골의 힘은 강했고, 고려의 힘은 약했다. 고려 조정이 마지막으로 기댄 것은 불력(佛力)이었다. 이전 거란의 침입 때 불력의 힘을 경험한 바 있는 고려의 조정이었다. 그 때 조성한 〈초조대장경〉이 대구 부인사에 있었는데,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자 조정은 다시 한 번 불력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조성을 발원한다.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16년간의 대작불사였다. 경판 8만 1258개. 왕족과 고위 관료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많은 백성이 이 땅의 안녕을 부처님의 글자에 담았다. 〈팔만대장경〉. 그 간절한 불사는 먼 훗날 이 땅의 국보(제32호)가 되고,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그 위대한 불사의 현장으로 추정되는 도량이 선원사다. 하지만 최근 이견도 많다. 당시 선원사는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로 1245년 낙성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때는 〈대장경〉 불사가 90% 이상 완성된 시점이어서 선원사를 불사의 현장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1398년(태조 7)에 〈팔만대장경〉은 한양을 거쳐 합천 해인사로 옮겨지고, 이 과정을 〈조선왕조실록〉이 적고 있는데, 이 문헌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오류가 시작됐다는 의견이 많다. “임금이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기록 때문에 선원사를 판각처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선원사에서 옮겨온 것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선원사에서 조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현재 학계와 교계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돌계단과 기단만 남은 옛 절은 아무런 말이 없다. 하기야 절도 사라진 마당에 지나간 일을 어찌 물을 것인가. 잘못된 것은 바로 잡으면 될 일. 글 한 줄이면 될 일이다. 그 오랜 세월 절터에 남아 있는 계단돌 하나, 기단돌 하나보다 쉬운 일일지 모른다. 돌계단과 기단만 남은 옛 절이 불사의 현장이든 아니든 아픈 시절의 대중이 찾았던 도량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미련처럼 허공만 짊어진 기단 위로 다시 꽃살문을 달고 팔작지붕을 올려본다. 선원사는 고려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은사지. 강화 장정리 5층 석탑(봉은사지 5층석탑).

빈 절터를 뒤로 하고 또 다른 빈 절로 간다. 하점면(河岾面) 봉천산(奉天山) 기슭의 봉은사지(奉恩寺趾)다. 강화도 봉은사는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개성에 있는 봉은사를 대신하기 위해 세운 제2의 봉은사다. 개성 봉은사는 951년(광종 2)에 세운 태조 왕건의 원찰이자 국찰로, 태조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역대 왕들이 찾았으며, 국사나 왕사를 임명하는 등 중요 의식의 대부분도 이곳에서 치렀다.

또한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선종은 인예왕후와 함께 개성 봉은사로 마중을 나왔고, 의천 스님은 송나라에서 가져온 1000여 권의 불서를 왕에게 올렸다. 그리고 천태종의 승려 선발시험인 승선(僧選)을 통과한 스님들을 머물게 했다. 이렇듯 개성의 봉은사는 고려 불교의 중심 도량이었으며, 천태의 마당이었다. 개성의 봉은사가 그립고 필요했던 고려 조정은 천도 2년 후인 1234년(고종 21), 제2의 도읍인 강화도에 제2의 봉은사를 연다. 이후 강화도의 봉은사는 개성의 봉은사와 똑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언덕 위로 절터의 기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 발 한 발 절터로 다가가자 기단 끝에 석탑 하나가 기적처럼 서있다. 강화 장정리(長井里) 5층석탑(보물 제10호)이다. 1960년 발견 당시 무너져 있었던 석탑을 보수하여 세웠는데, 3층 위로는 돌이 부족하다. 그 어설픈 모습이 정감 있어 보이면서도 모자란 석탑만큼의 시간이 궁금해진다. 오늘에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그 시간 속에 사라진 절이 있다는 것이 궁금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면 조용한 숲 한편에 석불이 서있다.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615호)이다. 어떤 연유로 그곳에 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봉은사지와 한 시절의 것으로 보인다.

격전의 흔적들, 성곽ㆍ돈대

고단했던 부침의 흔적들 곁으로 간다. 강화도는 역사 속에서 힘겨웠던 땅이다. 고려시대 몽골과의 전쟁, 그로 인한 삼별초항쟁으로 많은 피를 묻혀야 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왕실의 피난지로서 힘겨운 역사를 써야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겪으면서 항쟁과 개항으로 힘겨웠다. 때문에 강화도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힘겨웠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우선 강화도는 강화산성, 삼랑성, 강화외성 등 적들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성(城)이 유난히 많다.

고려 때 몽골군이 침입하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우는 강화도 천도 후 성을 쌓기 시작했다. 강화산성(사적 제132호)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 산성이다. 당시의 성은 흙으로 쌓았는데, 내성ㆍ중성ㆍ외성으로 나누어 쌓았다. 내성은 둘레가 약 1.2km로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 강화조약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었다. 조선 전기에 축소하여 다시 지었으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한다. 1677년(숙종 3)에 모두 돌로 고쳐 쌓고 넓혀 오늘에 이른다.

강화외성(사적 제452호) 역시 고려가 강화도읍 시절, 섬의 동쪽 해안 23km에 걸쳐 쌓은 토성이다. 조선시대에도 해안방어를 위해 1691년(숙종 17) 강화외성을 축조했고, 1718년까지 확장과 증축을 거듭했다. 현재 외성의 흔적은 많지 않다. 오두돈대 주변의 전성(塼城)은 몇 안 되는 외성의 흔적이다.

전등사.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삼랑성(정족산성ㆍ사적 제130호)은 마니산 북동쪽 줄기 끝인 정족산에 쌓은 성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城)이며, 둘레는 약 2.3km이다. 삼랑성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381년ㆍ소수림왕 11)가 있고, 전등사 뒤편에는 조선왕실의 중요한 서적들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가 있다. 사고의 건물은 1999년 복원됐다.

삼랑성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다. 당시 프랑스군은 강화읍성과 외규장각에 불을 지른 후 전등사로 향했다. 하지만 양헌수의 군사들에게 패한다. 이 전투가 끝난 뒤 프랑스 함대는 전의를 상실해 조선에서 물러갔다. 이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서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 191종 등 도서 359점을 약탈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승리로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가 무사할 수 있었고, 사고의 실록 등 수많은 왕실 문서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성벽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니 성의 안과 밖이 함께 따라온다. 그 옛날의 안과 밖이 궁금해진다.

삼랑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이다.

강화도에는 조선 때 군사방위시설인 12개의 진·보와 53개의 돈대가 세워졌다. 그 중 돈대는 해안이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관측, 방어시설이다. 강화읍의 갑곶돈대(사적 제306호)는 강화도의 관문이었다. 강화와 김포를 배로 연결해주는 갑곶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이곳을 건넜고, 병자호란 때에는 봉림대군이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황선신ㆍ구원일ㆍ강흥업 등이 청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상륙해 강화읍을 장악했다. 1970년 다리가 놓여 나루터는 없어졌다.

불은면의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는 1658년(효종 9)에 설치한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로,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함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이다. 이 때 어재연 장군과 350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초지진 초지돈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른 격전지다.

길상면의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 때 미국 함대, 1875년 운양호 사건 때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격전지로 그야말로 아픈 땅이다. 운양호 사건 때 조선군은 일본군을 격퇴했다. 현재는 초지돈대만 남아있다.

초지돈대 안에는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대포 앞에 서면 그 날의 포성과 스러져간 선조들의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아프고 다사다난했던 우리의 여러 지난날을 어찌 문자만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 저 오래된 땅, 산꼭대기부터 빈 절터와 전장까지 곳곳에 적힌 흔적의 글씨를 먼저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강화도뿐일까. 그렇게 발로 찾아줘야 할 이 땅의 지난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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