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의 선지식을 찾아서(264호)

우리의 소리와 함께해 온 6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 안숙선

안숙선 명창은 아끼는 염주를 손에 쥐고 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안숙선 명창은 1949년 국악의 성지인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소리를 9세에 시작해 19세에 만정 김소희 명창 문하에서 소리를, 향사 박귀희 명창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과 가야금 산조를 사사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1979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뒤로 이 땅 창극 무대의 주인공을 도맡았으며, 1997년부터 국립창극단의 단장을 연임했다. 1986년부터 판소리 ‘다섯바탕’ 완창 공연을 시작했다. 2000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 2013년 퇴임 때까지 역량 있는 전통예인들을 양성했다. 2004년부터 다섯 해 동안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을 맡아 우리음악의 발전을 위해 애썼다. 그사이 에든버러 축제를 비롯해 세계적인 무대에서 판소리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오피시에(Officier, 1998년)’, ‘옥관문화훈장(1999년)’을 비롯, ‘만해대상 문화예술부문 대상(2013)’, 제20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 2013)’, ‘삼성행복대상 여성창조상(2015)’ 등 무수한 상을 수상했다. 돌아보면 국악의 대중화, 현대화를 위해 숨 돌릴 새 없이 분주히 달려온 60년 소릿길이었다.

 

공력 깃든 소리를 위해
‘나를 비우는 시간’을 만든다

최근에 안숙선 명창이 산청에 머문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자들을 이끌고 ‘산공부’를 떠난 것이 아니라 ‘쉬러’ 갔다고 했다. 한시도 자신을 위해 쉬어 본 적이 없고 가족과 여행 한번 제대로 떠나 본 적이 없던 선생이 아니었던가. 산청에서 올라온 안숙선 명창을 세곡동 자택에서 만나 뵈었다.

“이제는 경치 좋은 곳도 다녀 보고 지역의 맛있는 음식도 맛보면서 새로운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산청에선 펜션을 얻어 놓고, 대원사도 가고, 문수사도 가고, 인근 고성 일대도 돌면서 쉬다 왔어요. 스님들이 전통음악에 관심이 높다는 것도 확인하며 반가웠지요.”

개인적으론 10여 년 전까지 비교적 가까이에서 안숙선 명창을 지켜볼 일이 많았다. 안 명창이 진행하던 TV 프로그램을 집필하기도 했고, 돈벌이와 무관한 음악회를 기획할 때면 선생을 모시곤 했다. 안 명창의 스케줄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행사가 줄을 이었고,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빼곡한 스케줄을 무리 없이 처리하곤 했다.

선생은 녹화 중간에도 복도 양끝을 오가며 소리연습을 지속했고, 그 틈틈이 찾아오는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셨다. 창극단 단장실엔 항상 최고의 명창을 모시려는 이웃들이 넘쳐났는데, 선생은 결코 최고연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산사에서 음악회를 여는데 돕고 싶다고 말씀 드리면, 어떻게든 시간을 비워 주셨다. 대한민국의 최고 명창이 흔쾌히 시간을 허락한 건, 시간을 쪼개서라도 우리 소리를 찾는 이웃들 곁으로 언제든 달려간다는 오로지 ‘한 생각’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리꾼이라면 관객의 환호가 넘쳐났거나 자신의 득음을 전율처럼 느끼는 환희의 공연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안숙선 명창은 잊지 못할 공연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2009년의 송년음악회를 꼽았다. 해외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날의 공연이었지만 이틀 내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돌발 상황은 상상조차 못했다. 자기관리가 엄격했던 선생님으로선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후 더 낮추는 자세로 생활했다. 그런데 또 한 번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해외 공연을 다녀올 무렵, 공연 제의가 몰려왔다. 정중하게 거부했는데 소리꾼 후배의 거듭된 간청을 차마 거절 못한 것이다. 해외공연 중 몸에 무리가 왔고, 결국 귀국하자마자 수천 명의 관객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제는 그 ‘한 생각’조차 다 내려놓았다.

“진정성 있는 소리를 들려드리는 게 소리꾼의 몫인데,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깊은 소리를 관객에게 대접하는 좋은 무대를 가져야죠. 이젠 더 이상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소리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면서 공력이 깃든 소리로 청중이 행복해하는 무대를 만들겠습니다.”

소리공양을 통해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더한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합동 공연을 하고 있는 안숙선 명창.

안숙선 명창의 외당숙은 동편제의 거목 강도근 명창이다. 이모는 가야금의 강순영 명인이다.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강백천 명인도 어머니의 사촌이니 외가 쪽이 타고난 국악의 명가다. 선생은 아홉 살에 주광덕 명창의 문하에서 소리를 시작했다.

지금도 고향 분들은 산동면 만행산 기슭에서 남원 시내까지 걸어 다니며 소리공부에 매진하던 ‘남원의 애기 명창 안숙선’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선생이 소리를 하면 뒷산 바위가 무대가 되고, 시냇가의 버들이 무대가 됐다. 10대에는 전국의 명창대회를 휩쓸었다. 열아홉에 상경, 국창 김소희(金素姬) 선생에게서 소리를, 박귀희(朴貴姬) 명인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안숙선 명창은 국창 김소희 선상을 사사(師事)했다.

“만정과 향사, 두 선생님은 소리를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셨어요. 정확한 발성과 성음으로 우리 소리를 하라 이르셨지요. 소리의 법통을 온전히 잇는 소릴 하라는 것이었어요.”

소리와 가야금만 익힌 것이 아니다. 향기로운 인품도 배웠다. 예의 부지런함으로 박봉술, 정광수, 성우향 등 손꼽히는 명창을 찾아가 진수를 익히는 데 몰입했다. 젊은 날의 안숙선은 스승들이 서로 탐내던 총명한 제자였다.

판소리로 외길 인생을 산다는 확신이 없던 시절, 안숙선 명창이 ‘서양음악 중심의 문화를 우리음악으로 바꾸는 데에 일조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 건, 1979년 국립극단 산하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부터다.

그곳은 새로운 세계였다. 기라성 같은 국악인들이 그곳에 있었고, 창극단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단체들이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인식하면서 연습에 정진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손가락의 지문이 닳도록 가야금을 연주하고, 목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소리공부에 매진했다. 처음 맡은 역할은 ‘향단이’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주연을 독차지하기에 이른다. 나이 40대에도 16세 춘향 역으로 창극무대에 섰으니, 안숙선 명창은 견줄 자 없던 국악계의 인기스타였다.

안 명창 소리의 절정은 역시 예닐곱 시간 동안 이어지는 판소리 완창 공연이다. 심청가와 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 이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했다. 특히 호탕한 소릴 지닌 남성 명창도 소화가 어렵다는 적벽가 완창 무대도 기립박수로 마무리 지었다. 그렇다면 안숙선 명창은 과연 판소리 다섯 바탕 중에서 어떤 소리를 으뜸으로 여길까?

“춘향가죠. 춘향가에는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춘향이가 있어요. 인간다운 권리를 주장했던 춘향이었죠. 춘향가에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소리의 변화가 가장 화려하고 다양해요.”

안숙선 명창은 무수한 해외 공연을 통해 전통문화의 한류 붐을 일으켜왔다. 88올림픽을 치르고 유럽 7개국 12개 도시를 돌자, 그제야 ‘코리아’를 기억해줬다. 교민들 앞에서 남도민요 강강술래를 부르면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민요 한 자락에도 가슴 찢길 듯한 슬픔에 젖는 DNA를 지니지 않았던가.

2004년 프랑스 파리 가을축제, 2005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미국 링컨센터 등 세계적인 무대에 초청돼 완창무대를 가졌다. 우리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것은 이러한 노력들이 축적됐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판소리에 관한 해외 반응은 국내보다 더 뜨겁다. 우주를 품은 소리라며 낯선 문화에도 격렬하게 호응하는 파란 눈의 관객들. 서너 시간의 완창공연을 꼬박 지켜보며 환호하는 그네들을 보면서, 안숙선 명창은 우리소리의 저력을 새삼 확인하곤 한다.

소리로써 삼라만상을 비추리라

안숙선 명창은 젊은 시절 사물놀이를 하며 국악을 몸에 익혔다.

결혼과 함께 불자가 되었다. 시댁은 신심 깊은 집안이었다. 시할머니께선 절에 머무시는 시간이 많았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신심도 흔들림 없었다. 오늘날 정정하게 백수를 누리시는 시어머니께선 20여 년 전만해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며느리의 스케줄을 정리하고, 그날 일정에 맞는 한복을 다림질하며, 이름 없는 매니저로 국창 며느리를 후원해주신 분이다. 큰 사랑을 받았으나, 평생 음악을 하며 살다보니 가족에게 헌신하진 못했다. 부처님 가르침도 별도로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오래전 부석사에서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 눈뜨는 대목으로 공연을 했어요. 공연 직후에 큰스님의 설법이 이어졌는데 그때 스님께서 ‘판소리도 설법의 일환’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판소리도 부처님 말씀이고, 안 명창 소리도 설법이라구요. 만 중생들에게 들려주는 좋은 가르침이라는 거죠. 정말 힘이 나는 고마운 말씀이셨어요.”

스님이 전해주신 카세트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차안에서 돌려 틀었다. 들으면서 좋은 말씀은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준다는 걸 실감하곤 했다. 양재동에서 세곡동으로 이사하면서 능인선원에서 법수선원으로 참배 가는 곳도 옮겼다.

“간절한 마음이 생기면 절에 다녀오곤 해요. 절을 올리고 그저 앉아 있다 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내가 잘 수행해서 깨달아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발원을 합니다.”

‘보현행원품’ 소리공양을 올리면서 불광사와 인연이 됐다. 광덕 큰스님께서 ‘혜안(慧岸)’이라는 법명을 주셨다. 늘 가슴에 새기는 이름이다.

“1994년에 부처님 일대기를 판소리로 짜서 ‘불타 석가모니’란 제목의 공연을 부처님오신날이면 했죠. 요즘 다시 정리해보려고 들여다보니 아, 그동안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소리를 했구나 하는 후회가 몰려오더군요. 앞으로는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작업하고 싶어요.”

그렇다. 좀 더디 걸리면 어떠랴. 부처님의 찬란한 일생이 안숙선 명창의 장엄한 소리를 통해 세상으로 뿜어질 터인데.

1998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기념관 건립을 위한 음악회가 열렸다. 고은 시인이 주신 장시 ‘접동새’로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했다. 판소리가 울려 퍼질 때 객석 맨 앞줄에 앉아계셨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어르신들은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8·15 예술한마당은 통곡의 마당이었다. 안 명창의 소리는 그토록 고통 받는 이웃들의 아픔을 다독이고, 설움을 풀어주는 해원의 소리였던 것이다.

최근에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염불도 하고, 불교서적도 펼쳐 읽는다. 유독 백담사 조실 오현 스님이 번역하고 해석하신 〈무문관〉이란 책을 즐겨 읽는 중이다. 선사들의 공안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 있어 다소 어렵기도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이 꽤 된다.

“백담사에서 공연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었어요. 한 노스님의 옷깃이 허해 보이더군요. 저야 차에 올라 상경하면 그만이라 제 흰 머플러를 풀어서 둘러드렸어요. 그분이 오현 스님이셨다고 해요. 제가 그렇게 머플러를 감싸드린 걸 고맙게 여기셨다죠. 훗날 법명을 주셨어요. ‘오세(五歲)’라구요. 오세암 설화를 들려주시더군요.”

처음 뵙는 스님께 바람이 차다며 머플러를 벗어 둘러 드리고 온 여인, 맵고 쓰고 달고 시고 짠 인생만사의 소리를 한과 신명으로 빚어내는 여인. 중생의 맺힌 가슴을 소리공양으로 풀어주는 여인. 자그마한 체구에도 쩌렁쩌렁한 소리로 대형 무대를 압도하는 여인. 제자들을 끌어안고 온전한 소리꾼으로 길러내는 어머니 같은 여인. 그이가 안숙선 명창이다. 하염없이 베풀고 나누는 안숙선 명창이야말로, 어쩌면 다섯 살 아이를 품어 안은 관세음보살과 진배없지 않는가.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우는 시간

서울 강남구 세곡동 자택 지하에 있는 연습실에서 북을 치며 소리를 하는 안숙선 명창.

2017 평창 겨울음악제에서 안숙선 명창은 첼리스트 정명화 씨와 ‘세기의 사랑가’란 주제로 판소리 춘향가 공연을 가졌다. 대가 둘이 만났음에도 서로 ‘우리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할 만큼 연습을 반복했다. 서양 악기와 한국의 소리가 어우러지기 위해선 상대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기다림이 필수라는 것도 새삼 익히는 시간이었다.

안 명창은 소리꾼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정직을 수행해왔다. 다른 장르와의 실험을 주저하지 않았고, 작은 무대, 작은 기획에도 소통의 의미를 부여해 소극장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쉽게 배우는 우리 소리가 필요합니다. 이를 테면 30분 분량으로 철수와 영이의 여행기처럼 들어서 알 수 있는 사설로 우리시대의 판소리를 짜야합니다. 일상에서 널리 불려질 생일 노래, 봄노래를 만들어가는 일도 중요하지요. 우리 소리와 친근해질 수 있는 다양한 기획이 이루어져야 하죠. 구청마다, 동 주민센터마다 창극을 배우고, 우리 소리와 우리 악기를 배우는 곳이 늘어나야만 합니다. 우리 가락을 제대로 배우고 익힐 수 있어야 합니다.”

안숙선 명창의 서원은 대중들 곁에서 호흡할 수 있는 우리 음악이다. 우리 음악의 원형을 지키면서 국악을 대중화하고 현대화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 일환으로 안 명창은 2013년부터 국립극장에서 창극 아카데미를 열어왔다. 국내 유일의 청소년 대상 창극전문 교육 프로그램이다. 어느덧 대기자들이 줄서는 프로그램이 됐다.

안숙선 명창이 빼곡한 스케줄을 소화할 때 생전의 스승은 말씀하셨다.

‘많은 일을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제주도에 가서 1년만 쉬어 봐라, 확실히 소리가 깊고 넓고 융성해진다, 냉각기를 가져보면 힘을 쓰고 빼는 법을 절로 얻는단다…….’

예전에 스승님들이 강조하셨던 말씀을 건성으로 스친 것도 아닌데 이제야 그 말씀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그 의중이 가슴을 파고든다. 60년을 우리 음악과 살아보니 말이다.

대한민국 최고 명창 안숙선은 요즘 마치 〈잡아함경〉의 한 구절처럼 산다. 지나간 일에 관해 근심하지 않고 미래에 관해 반겨 집착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에 얻어야 할 것만을 따라 바른 지혜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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