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에 즈음하여 지혜를 상징하는 연등이 세상 밖을 환히 밝히고 있다. 대체로 불자들 사이에서만 오가던 불교 이야기에 세상이 귀를 기울인다. 불교에 관심 없던 사람들에게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참 좋은 기회다. 그런데 불교를 이야기할 자리에 초대받아가서 무엇이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시라고 제안하면, 사람들은 망설이다가 이렇게 묻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 그거 부처님이 하신 말이라면서요? 그런데 그거 너무 교만한 거 아니에요? 자기가 잘났다는 거잖아요. 아니 어떻게 부처님이란 분이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말을 할 수가 있나요?”
대뜸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명쾌하게 대답하기가 난감하다. 그래서 슬쩍 이렇게 반문도 해본다.
“내가 잘났다고 말하면 안 되나요? 그게 그렇게 몹쓸 짓인가요?”
하지만 이런 반문은 오히려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종교가 그러면 안 되지요. 겸손해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도 존중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요.”
하지만 어쩌랴.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사실 내 자신이 가장 잘 났다는 선언인 걸.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은 35세에 성불한 뒤에 굉장히 ‘교만’했다. 나이로나 혈통으로나 지명도로나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가섭 삼형제를 찾아가서 ‘맞짱’을 떴고, 그들과 그들의 제자 천여 명을 교화한 뒤에 대도시를 행진했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아니,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우루벨라 가섭님과 그 동생분들하고 나란히 걸어가는 저 젊은이는 대체 누구야?”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저 ‘새파란 젊은이’가 사람들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 대신 120세 먹은 우루벨라 가섭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5세의 젊은 붓다 앞에 가사를 벗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한쪽 무릎을 꿇은 뒤에 이렇게 선언했다.
“당신은 제 스승이고,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온 세상이 떠받들던 늙은 수행자가 무릎을 꿇었다.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을 테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온전히 제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이는 없다는 것과, 깨달은 사람은 누구 앞에서나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 입장임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는 얼마나 겸손을 강요받고 있는가. 나보다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거나 나이가 많거나 권력을 쥐었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던가. 하지만 정작 머리를 숙여야 할 익은 벼들은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세상을 향해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 얼마나 겸손을 교육받았는지 요즘은 “고객님,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고요, 거스름돈 2000원이십니다.”라고까지 말하지 않는가. 견디다 못한 ‘을(乙)’들의 비극이 잇따르고 있다. 중생이 중생에게 교만하고 중생이 중생에게 비굴해진 결과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제안이다. 우리는 누구든 권력과 부와 스펙 앞에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사자후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외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당신도 외칠 수 있는 말이요, 당신도 그렇게 외쳐야만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메시지다. 당신도 그러니까 당당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해야 한다면 그건 오직 진리 앞에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이제는 진짜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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