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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고달플 땐 산으로 가 보라해탈문(263호)

기래끽식곤래면 飢來喫食困來眠
일종평회만경한 一種平懷萬境閑
막파시비래판아 莫把是非來辦我
부생인사불상간 浮生人事不相干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마음 넉넉해 만사가 한가하네.
시비를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인간사 더 이상 관심이 없으니.

한 달에 한 번 이상 등산을 즐기는 등산인구가 16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 국민의 3할 가량이니 대단한 수치다. 주말이면 크고 작은 산마다 산객이 줄을 잇고, 고속도로에서는 산악회 명패를 달고 달리는 관광버스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산 이름을 치면 다양한 정보가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지자체마다 등산로를 만들고 산책길을 조성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들인다. 국토의 7할이 산지이니 등산가들에게는 복된 여건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산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동양에서 철학과 종교 인문학적 기반에 산은 절대적인 존재다. 산의 신성성과 생명성이 우리의 삶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지지고 볶는 인간 세상의 고달픈 일들을 벗어 던지고 산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산비탈 마다 아담한 집들이 들어서고 귀농·귀촌을 동경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예로부터 산은 수도(修道)의 공간으로 각광받아 왔다. 산은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부터 벗어 나 있다. 산으로 든다는 것은 자연 속으로 드는 것이며, 자아의 본질을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속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초월의 지혜를 기르고자 구도자들은 산으로 들었다. 사찰이 산 중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의 일환이고, 세파에 찌든 이들이 산을 찾아 은거하는 것도 수도처로서의 산이 갖는 적합성 때문이다.

하루의 등산으로 도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하루의 산행이 심신의 피로를 씻고 새로운 활기를 주는 보약은 될 것이다. 하물며 산에 들어 살며 선현의 도를 배우고 초탈의 지혜를 연마하는 수행자들이라면 얼마나 맑은 정신과 곧은 육신을 지닐 수 있겠는가?

그러한 수행자들의 마음이 표출된 시들이 산거시(山居詩)다. 산에 사는 마음의 풍경이 언어로 드러난 시. 많은 이들이 이태백(李太白, 701~762)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그 대표작으로 꼽을 것이다. 왜 굳이 산에 들어와 사느냐는 질문에 빙긋 웃을 뿐 말로는 답하지 않는 그 초탈한 경지와 복사꽃잎 아득히 떠 흐르는 인간 세상 아닌 세상에의 무궁한 동경이 이태백이 제시한 산거의 이상향이었다.

스님들이 남긴 산거시도 적지 않다. 스님들의 산거시는 인간세상을 벗어나 이상향을 꿈꾸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선(禪)의 정곡으로 통한다. 산거의 심경으로 불성의 현현(顯現)을 역설하는 것이다. 앞에 보인 시는 고려 말의 선지식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스님의 시다. <백운화상어록>에 전하는 연작 산거시 중의 11번째 작품이다.

첫 구절을 보고 산중에는 먹고 자는 여건이 풍족하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는 서술이 단순해 보이지만, 도의 경지에서 잘 먹고 잘 자는 것은 세속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잘 먹는다는 게 산해진미를 먹는다는 것이 아니고, 잘 잔다는 것이 편한 잠자리에서 잔다는 뜻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해답은 2구에 나오는 마음이 넉넉하고 만사가 한가로운 데서 찾으면 된다. 집착이 없어 소욕지족의 즐거움이 있음이다. 소욕지족이야말로 산거의 절대적인 필요여건이다. 인간사의 번잡함에 물들지 않아 시시비비를 초월하며 살 수 있을 때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산에 사는 즐거움’은 우리 일상과 다소 멀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에 가는 즐거움’이라도 찾아 지녀야 할 것이다. 조금만 마음을 넉넉하게 쓴다면, 한 나절 산행으로도 산을 호흡하고 산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임연태 편집주간  mian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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