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등불이 되어 준 초발심(263호)

윤범모
가천대 예술대학 명예교수. 동국대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뉴욕대 대학원 예술행정학과에서 수학했고, 사우스 플로리다대 연구교수에 재직했다. 현재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박수근미술상운영위원장 등을 맡고 있으며, 한겨레신문 <한 세기를 그리다-101살 현역 김병기화백의 증언>을 연재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아하, 절에 불상이 없네 –오대산 통신>, <한국미술론> 등이 있다.

 

봄이 왔다고들 하는데 나는 아직 봄이 아니다. 아니, 누구는 그랬다. ‘봄이 왔다. 큰일 이다.’ 다들 봄이라고 하는데 나만 봄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봄이란 계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겨울이면 어떻고 여름이면 어떠하랴. 도시에서 분주하게 살다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심하다. 사설이 길어지고 있다. 사실 변명하기 위해서다. 글의 주제가 ‘초발심’이라 했는데, 이와 같은 주제는 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초발심이라, 참으로 싱그러운 단어다. 이런 싱그러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평생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도 과연 초발심이 있었던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아니, 초발심 비슷한 것 흉내는 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입문단계의 뚜렷한 장면이 기억에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그냥 스며든 것 같다. 그 무엇인가가 그랬다. 두서도 없었고, 그러니까 무슨 체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도 속에 편입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청년시절 내내 뭔가 목마름 속에서 갈구했던 것이 있다. 남한을 일주하는 무전여행이 유행할 때였다. 나름대로 방랑벽이 있어 나그네 길에 자주 올라섰다. 발길을 자연 쪽으로 돌리면 자연스럽게 명찰 순례가 되었다. 여기서 순례라는 말은 사치스럽다. 차라리 방황이고 방랑이라 해야 걸맞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순례처럼 되었다.

명산에 명찰 있고, 그래서 사찰은 하나의 교과서처럼 가르침을 안겼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가람의 구석구석에 눈길이 스며들었다. 불교미술이라는 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오묘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그 속에 잠겨 있었다. 깨달음과 아름다움. 그렇다. 이런 화두(?)를 얻게 되었다. 깨달음과 아름다움!

1970년대만 해도 불교서적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한문 투의 구식 문장이어서 한글세대에게는 읽기 불편했다. 그래도 불경을 읽었고, 또 이러저러한 해설서를 읽었다. 그런 가운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책 <삼국유사>를 만났다.

오늘의 시대가 스토리텔링 시대라고 한다면, 고려의 일연 스님은 이미 그와 같은 시대를 앞질러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삼국유사>는 이야기 창고였고, 우리 민족의 보배 중의 보배였다. 뒤에 미술사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한 배경에 이 책의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삼국유사>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라의 원효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사상도 엄청났지만, 그의 생애는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사실 오늘날 원효 주제의 훌륭한 예술작품이 부재한 것, 나는 너무 불편하다. 아니, 어떤 때는 화가 치솟기도 한다. 원효 같이 훌륭한 창작의 원천을 두고 우리나라 예술가들은 어디 가서 뭘 하고 있을까.

<육조단경>을 만나 감동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탄허 스님에게 직접 배우게 되어 더 그랬다. 당시 기초가 너무 부실해 스님의 강독을 충실히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육조 혜능은 심야의 등대처럼 다가왔다. 금과옥조라는 말이 그대로 통했다.

새로운 감각의 불교서적이 출현했다. 고맙고 고마운 일. 이기영 교수의 <원효사상>은 꿀맛이었다. 이 책에 매료되어 인도철학과에 가서 이기영 교수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같은 과에서 서경수 교수의 가르침도, 더불어 미당 서정주 시인의 훈도도 받아 ‘신라정신’ 교육도 받았다. 시인과 맥주 대작하던 추억은 한결 새롭다. 뒤늦게 내가 시단의 말석이나마 차지하게 된 바탕에 미당 시인의 가르침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어간에 법정 스님의 <영혼의 모음>이 나왔고, 나는 여러 차례 스님과 대좌하는 기회도 얻었다. 스님은 자신의 저서를 서명하여 건네주기도 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옛날이야기만 나오고, 그것도 책 이야기만 나오는 것 같아 송구스럽게 되었다. 게으른 책벌레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딴 것 아니다. 신행이 부족했다는 것, 그것도 실천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는 것. 이것에의 반성일 것이다. 하기야 작심삼일 부류에 속해 있으니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 해도 그림 속의 떡이지 않겠는가.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좋은 말이다. 나는 이런 말을 자주하고 있다.

‘길에서 길을 찾는 그대여!’

여기서 ‘그대’는 사실 나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길 위에 서 있으면서도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한심한 세월. 뭐 멀리 갈 것 있는가. 그래도 길을 찾아 나섰다.

그동안 오지여행을 많이 다녔다. 남한 일주는 해외의 오지여행으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좋은 실크로드 답사 전문가가 되어 그 고행의 ‘비단길’에서 살았었다. 사막과 만년설의 오지, 참으로 많이 다녔다.

90년대 초는 구대륙의 끝에서 끝, 그러니까 경주 토함산에서 포르투갈까지 꼬박 2개월에 걸쳐 육로 탐험을 했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오지여행의 결과는 이따금 신문 잡지에 연재로 보고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단행본으로 엮지 못했다. 나의 안내로 여행 갔다 온 사람 중에 책을 낸 사람은 여러 명이건만.

요즘 불교신문에 <불도(佛道)기행>이란 연재를 하고 있다. 깨달음의 현장 보드가야에서 출발하여 토함산 석굴암까지 답사하는 불교미술 여행이다. 아니, 깨달음과 아름다움의 자취를 찾는 구도여행이기도 하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붓다 로드!

나의 초발심. 이런 표현은 어불성설이겠지만, 거창하게 말하면 ‘길을 찾는 나그네 길’이라 하겠다. 하지만 길 위에서 길을 찾는 방황의 길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내세우는 화두는 ‘깨달음과 아름다움의 탐구’이리라.

너무 거창해져 송구스럽게 되었지만. 책으로 출발한 길, 길에서 청춘을 소진하게 했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실 길을 길이라 하면 길이 아니라고 했거늘.
지금부터라도 초발심을 챙겨야 하리라.
하지만 그게 어떻게 생겼더라. 길에서 길을 찾는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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