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등불이 되어 준 초발심(263호)

이인자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명예교수.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 초대 원장, (사)대한산업미술가 협회 이사장과 (사)한국여성시각디자인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2006년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수훈, 제68회 교정의 날 국무총리상 수상, 제20회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을 수상한 바 있다. 승만서원실천회 회장과 한국교수불자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의 초발심에 대한 내용의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체로 초발심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는 ‘사람이 사람에게 권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신행을 옆에서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든가 등의 경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듭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불교와의 인연은 당연히 ‘나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 사실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도록 초발심을 일깨워 준 또 다른 인연이 있었습니다. 내가 경기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1988년 어느 날, 법대교수인 고준환 교수가 나의 연구실에 와서 한국교수불자연합회를 창립하려하니 회원으로 가입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나는 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불자도 아니며, 불자라고 한다면 엉터리불자이기 때문에 회원이 될 자격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고 교수는 “그러면 회원으로 가입을 하고, 지금부터 불교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회원 가입을 권하였습니다. 나는 “순서가 그래도 되느냐?”고 반문 하면서 이제 발족하려는 ‘한국교수불자연합회’가 어떤 단체의 성격인지도 모른 채 회원가입을 허락한 셈이었습니다.

그 후, 남산에 위치한 대원정사에서 ‘한국교수불자연합회(이하 교불련)’의 창립법회가 있었고, 나에게 회원으로 가입을 권한 고준환 교수는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나는 창립법회에 참석하였으나 안면이 있는 교수는 별로 없었습니다.

교불련 활동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때, 무슨 소임을 맡았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임원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고 교불련과 인연이 굳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회장이 나와 같은 학교의 교수라는 인연 때문에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불련은 우리나라 전국의 대학에 재직 중인 불자교수들이 회원이므로, 서울과 지방의 불교신행과 학문의 교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준 교수는 매달 법회를 준비하는 등 수고가 많았으며, 해마다 해인사를 비롯하여 전국의 교구본사 등 대찰에서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외 불교국가의 불교성지 순례도 시작하였죠. 올해는 교불련 창립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나도 30년 회원이 되는 셈입니다. 회원 교수들이 연구에도 시간이 바쁠 텐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제4차 하계수련회(1991.7.1~4 통도사).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교불련에서 불교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아는 것이 부족하고 수행도 부족하여 교불련을 위하여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회원의 기본도 안 되어 있으면서 회원이 되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그 당시에는 불교 공부를 하려 해도 교육기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서점에 갔더니 불교서적은 가득한데, 책들이 모두 두껍고 딱딱하고, 컸으며, 내용은 한문이었죠. 불교용어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점을 나오려다가 구석에 <연꽃마을>이라는 한글제목의 작은 책이 이채로워서 꺼내보았더니 동화책같이 그림이 그려져 있고, 내용은 한글로 된 권선의 내용이었습니다. 후일에 알고 보니 <법구경>을 그렇게 만든 것이었고, 그 책 <연꽃마을>이 내가 제일 처음 접한 불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불교공부는 능인선원에서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도 공부를 해 보았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내가 교불련 회원이 되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불교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끝도 없고, 공부를 할수록 어렵고,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야 할 텐데, 마음이 무겁기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교불련에 회원으로 가입한 일이 나의 초발심이라고 생각됩니다. 내 삶의 등불이 되어준 셈이지요. 세세생생 몇 겁의 시간이 지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대로 행하고 깨달아서 중생구제도 해야 부처님께 은혜를 갚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교불련이 나의 초발심에 불을 당겨놓았으며, 협회 활동을 시작으로 불자라는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불련 초창기에는 사무실이 없어서, 나의 작업실을 캐비넷으로 경계를 만들어서 내어 주고, 나는 캐비넷 뒤쪽에서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전공이 시각디자인이므로 교불련의 심볼을 디자인 했고, 학술지 표지디자인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컴퓨터가 많이 발달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고 중요성도 잘 알고 있으며, 능력자들이 많아서 책을 만드는 일에도 디자인전공자가 꼭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발전되어 있습니다.

그 후, 1998년 어느 날, 조계종 포교원에서 여성불자들을 위한 단체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가 있었다고 하면서 교불련에서 여자교수들이 참여해 주면 좋겠다는 전갈을 받고, 그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여성불자들이 모여서 여성불자들을 위한 일을 해 보겠다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회의에 참석해 주는 것만이라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회의 때마다 참석을 하였습니다.

2년 여에 걸쳐 앞으로 만들어 질 단체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여성불자들에게 설문을 받아서 방향설정을 하였으며, 구체적인 토론을 위한 워크숍을 개최하였습니다. 그 때 <승만경>에 대한 발표도 있었고, 단체의 명칭과 사업 등에 대한 토론도 있었으며, 그래서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을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준비위원의 한사람이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너무나 부족한 나는 불교여성개발원 초대 원장의 소임을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여성개발원 창립 후, 운문사 승가대학장이신 명성 큰스님을 지도법사 스님으로 모셨는데, 스님께서는 <승만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재가자가 주인공인 경전 중에 남자가 주인공인 <유마경>과 함께 재가 여성이 주인공인 <승만경>은 쌍벽을 이루는 경전이므로 불교여성개발원에서는 꼭 <승만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권유를 하셨습니다. 나는 워크숍 때 <승만경>이라는 경전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고 ‘그런 경전이 있구나.’라고 생각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명성 스님의 말씀을 곧 바로 시행하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불교여성개발원에 ‘승만경연구회’를 만들고 내가 회장 소임을 맡겠다고 나섰었습니다. 그래서 <승만경> 강좌를 열고, ‘승만 10대 서원’을 수지 독송하고 실천하도록 애쓰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여성개발원의 사정상 그 일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뜻을 같이 하는 도반들과 함께 2016년 4월에 ‘승만서원실천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불교여성개발원 밖에서 우리나라 전 불자여성들과 함께 하고자 해서였습니다. 나는 <승만경>을 잘 알지도 못했었는데 <승만경>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부처님은 세상에는 짝할 이 없고, 비할 바 없다고 찬탄하면서 부처님께 귀의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부처님 앞에서 10대 서원을 세우고, 또 3대 서원을 세우니, 부처님께서는 ‘그대는 여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였으니 이 공덕으로 한량없는 아승지겁 동안 마땅히 천상과 인간에게 자재로운 왕이 될 것이다. 마땅히 다시 한량없는 아승지 부처님을 공양하라. 2만 아승지겁을 지나 마땅히 보광여래(普光如來). 정변지(正遍知)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니라’라고 승만 부인에게 수기를 주셨다.”

<승만경> 중에서

2,600년 전 그 시절 인도 땅에서 재가여성인 승만 부인이 부처님 앞에서 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그 여장부의 당당함이 얼마나 멋진지, 나는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승만보살 10대 서원’은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중생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내용이며, 이 ‘10대원’을 실천하면 부처님이 되기 이전에 벌써 집안이 화목하고 평화로워지는 그야말로 일상의 실천 덕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승한 <승만경>을 생각하며 나는 무엄하게도 여자인 나를 대비시켜보곤 합니다.

나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지아비에게 버림받은 한 많은 여인의 외동딸이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딸만 낳은 죄인(?)으로, 남편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설상가상으로 두 딸들도 잃고 하나 남은 나만을 바라보면서 사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지극 정성으로 부처님께 기도 하시는 모습뿐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저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애비에 그 딸이야.’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버지를 닮은 딸이 되지 않으려고, 반듯하게 살려고 결심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남편이어야 하고, 아들이어야 하고, 딸이어야 하고 엄마의 모든 것 이어야 한다고 결심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의 길을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그어 놓고, 그 선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기뻐하실 일들은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되어서는 학생들에게 애정으로, 반듯한 교사로서의 본분을 지키려 애썼으며 맡은 일에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면서, 길에서 각혈을 하며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는데, 급성 폐결핵 3기로 판정되었습니다. 임신인 것을 모르고 대학원공부까지 겹치니 과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원은 휴학을 하고, 학교는 휴직하는 등 모든 것을 놓고 집에서 조리하면서 첫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폐결핵균은 임신동안에는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병원의 처방대로 따랐습니다.

아기는 탄생하자마자 엄마와 격리되었고, 나는 적십자병원 결핵요양원(인천)에 8개월간 입원했습니다. 아기는 당연히 어머니가 키워 주셨습니다. 퇴원 후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그 후에 교사를 퇴직하고 강사 생활을 하면서 다시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습니다. 디자인계는 박사과정이 다른 학문보다 늦게 문교부에서 인가되었으므로 박사과정 1기 지망생으로 시작하여 10여 년의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나라 디자인계의 박사는 처음 배출되는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디자인계에서는 나에게 박사과정을 왜 하느냐면서 왕따를 시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도, 또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도 남자들이 아직 시작 안하는 박사과정도 시작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어야 했습니다. 내가 살아온 시대의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는 남녀 차별의 불이익은 다반사였습니다. 말하자면 여자는 대학교 교수 채용에 서류를 제출하면, 면전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안 되겠다고 거절당하던 시대였습니다.

내가 경기대학에서 교수 발령을 받았을 때, 어머님은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도반님들께서는 ‘엄마가 얼마나 자랑하시는지 알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딸이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을 텐데도, 한 번도 ‘이제 그만 쉬어라.’라는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팔순 기념으로 나는 개인전을 열어서 어머님께 받쳤고 어머니의 친구 분들을 위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 때, 손자며느리는 만삭이었고 어머님은 흐뭇해 하셨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두 손자를 키우시면서, 세상에서 손자를 둔 사람은 당신뿐인 듯 신명나게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외동딸인 나를 위하여 당신의 인생 전부를 받치셨고, 일념으로 딸을 위한 기도의 삶이 전부였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나에게 승만부인은 같은 여성인 내 삶의 지표이며, 희망이며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더구나 10대 서원은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승만보살님의 그 당당함에 내가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승만보살의 뒤를 따르려 하는 것을 보면, 한국교수불자연합회의 회원이 된 일이 바로 나의 초발심에 불을 당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니 기도의 가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면서 행복해 하는 나.
부처님 사랑합니다. 교불련도 사랑합니다. 승만도반님들도 사랑합니다.
내 삶의 등불이 되어준 승만보살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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