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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깎는 마음으로 불교학과에 입학, 포교사의 길을 걷다내 삶에 등불이 되어 준 초발심(263호)

 

烽山 선진규

김해 봉화산 정토원장.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동국대 대학원 겸임교수, 대한불교청년회장,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한국불교문인협회장, 한국청소년수련시설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나는 지금부터 84년 전 일제 때 경남 김해군 한림면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삼대 외동의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3명의 어린이가 태어나면 한 명 꼴로 홍역 또는 기타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명이 짧은 손자라며 신심이 돈독하신 할머니는 툭하면 등에 업었고, 좀 더 자라서는 손 잡고 멀리 있는 절에 데리고 가서 “부처님께 절하면 명이 길어진다.”고 강요당했던 것이 불교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아버님은 일본 북해도 탄광 임부로 차출돼 돈을 벌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직계식구인 어머니와 우리 자식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격렬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징용돼 들어올 무렵, 아버지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일본 본토의 고다나가라는 농촌으로 이주해 이곳에서 농부로 일하다 해방을 맞아 귀향동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발심의 계기

한국에 홀로 계시던 할머니는 자그마한 암자를 지어 수행하고 계셨는데 오갈 데 없는 우리는 이 암자에서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3학년 17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각 학교마다 의용군 모집이 있어 비교적 키가 큰 저도 상급생을 따라 트럭에 실려 부산 동래까지 갔는데 “너는 아직 어리니 집에 가라!”고 하여 쫓겨나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은 알리지 않고 갔다며 난리가 났습니다.

그것도 잠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오고 서쪽은 마산 진동까지 들어오게 되니 김해와 부산은 피난민과 후퇴한 군인으로 인산인해,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절 뒷산에 미군부대가 주둔해 천막을 쳤는데 마당까지 부대 주둔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할머님께서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 손자 하나만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미군을 따라 보내면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는 판단으로 통역아저씨에게 “제발 우리 3대 외동 장손만 살려주소!”하고 매달린 것이 효과가 있어 나는 미군 24사단 일선보급부대 군속으로 미군을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이틀 후 부대는 울산 어느 야산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그곳도 피란민과 군인들이 포화 상태였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취사장에서 청소하고 그릇 닦는 일, 감자 깎기, 부식다듬기 등이었는데 갈수록 일이 늘어나 혹독한 노무자가 되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참았습니다. 전세가 호전돼 전진에 전진을 거듭, 그해 12월말에는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박천(博川) 벌판에 주둔해 꽁꽁 언 땅에 쇠말뚝을 박고 천막을 겨우 치자, 중공군이 가까이 왔다며 긴급후퇴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군속들도 무기가 보급되었으며, 후퇴 도중 앞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후퇴 도중 많은 피난민의 울부짖음을 보면서 3일간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의정부였습니다. 전쟁 피난을 위해 미군을 따라 보냈는데 전쟁을 마중 간 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저의 경우는 평안남도 숙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같이 근무하는 군속이 장교들이 사용하는 45구경 권총을 분해해 닦은 후 탄창에 총알이 들어있는 줄 모르고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불이 번쩍하는 순간, 정신을 잃고 넘어졌는데 깨어보니 야전병원이었습니다. 왼쪽 볼을 지나 귀 뒤로 관통했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해를 넘기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학교로 복귀하라는 대통령의 담화가 있었는데 강원도 화천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8월에야 소식을 듣고 부대를 떠나 귀가했고, 학교를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전쟁을 겪으며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왜 싸워야 하나?’, ‘잘못도 없는 선량한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수없이 죽어야 하나?’ 전쟁으로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행렬, 수많은 시체더미를 지나며 보아온 죽음의 처참함과 공포, 강대국들의 싸움판이 되어 버린 한반도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주말마다 집을 오갔는데, 내 눈에 비친 거리는 휴전 중이었지만 전쟁의 연장선상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잃고 거지가 되어 몰려다니는 어린 군상들, 가족을 잃은 노인들, 부상당한 상이용사 등 모두 불쌍하고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하루는 부산진역에서 집으로 오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몰려다니는 한 무리를 보고 “애들아 너희들과 이야기 한 번 하자!” 두려움을 느끼며 피하는 아이들에게 “괜찮아 이리와 봐라!”고 해서 이들과 형·동생 하며 친해졌습니다. 집에서 동생들이 입던 옷가지를 비롯해 먹을 것을 전해주다가 자력으로 한 번 일어나 보라고 구두닦이 통과 작은 지게를 구해 주기도 했습니다. 토요일엔 이들과 함께 돈벌이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 마음의 큰 갈등을 해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니는 학교도 무의미해져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의 초발심

결국 이런 내면의 갈등 속에서 찾게 된 곳은 절이었습니다. 매일 하숙집에서 나와 학교는 가지 않고 시내 암자를 찾아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저 불쌍한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습니까?”하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다가와 “학생 왜 울고 있나? 연애에 실패했나? 부모님이 돌아가셨나?”라고 물었습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질문이라 “아닙니다.”하고는 다음부터 그 절에는 가지 않고 다른 절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담임선생님께서 아시고 이야기 좀 하자기에 함께 자리를 했더니 “선 군은 일선을 다녀왔기에 생각이 깊은 학생이라 상담은 필요가 없지만, 왜 학교를 나오지 아니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심적 갈등을 소상히 말씀드린 후 “스님이 되어야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 “그렇다면 좋은 정치인이 되어 보라!”고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정치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모두 마음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고치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허허 하시면서 꿈같은 소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학년 말 고민 끝에 집으로 와서 짐을 챙겼습니다. 그때 잘 알려져 있던,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계시던 권상로 스님을 찾아뵙기로 결심하고 서울 조계사(당시 태고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조계사는 입구 쪽 한쪽 지붕이 폭격으로 허물어져 있었고, 스님은 요사채의 작고 컴컴한 방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학생이 한 명 찾아와서 “중이 되고 싶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고 하니 스님 말씀이 “뜻은 훌륭하나 대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 학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지 말고 다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들어와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승려가 되면 더욱 좋을 것 같다.”고 출가의 길을 소상히 밝혀주셨습니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이곳까지 스님을 찾아왔는데 저 하나 받아 주실 수가 없습니까?”하고 눈물을 흘리니 “학생 울지 말고 내 말을 듣는 것이 학생의 미래를 위해 좋을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공부의 목표는 오직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일반 학생과 달리, 머리를 깎지만 않았을 뿐 출가한 불교학도란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교학과 입학

동떨어진 섬에 홀로 있는 사람이 된 나는 더욱 고독과 고뇌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승려가 되는 관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시험에 합격되어 남산자락 판잣집에 하숙을 정해 놓고, 외롭게 숲속으로 들어가 출가자의 고뇌와 세상을 떠나는 섭섭함을 계속 울음으로 달랬습니다. 1학기말 선배들의 주선으로 불교대학 기숙사인 기원학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단체생활을 하면서 혼자 외로움을 달래던 울음은 사라졌고,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내가 할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불교학과에 들어와 보니 교내에서 불교학과의 존재성이 너무나 없어서 전국웅변대회에 출전했습니다. 두 번을 나가 모두 우승을 해 학교에 전했더니 불교학과 학생이 전국웅변대회 특등을 했다며 총장실로 불러 우승컵을 총장님께서 전하며 불교학과를 돋보이게 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당수도(태권도) 유단자 선배가 있어 불교를 하려면 주먹도 있어야 한다며 강제로 운동을 시켰습니다. 6급이었을 때였습니다. 기숙사 아침 공양시간에 정치외교학과 학회장(학교 이사로 있는 스님 상좌)이 불교학과를 ‘목탁과’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공개석상에서 했다며 분해하기에 속으로 가만둘 수 없겠다 결심하고, 학회장이 어느 날 총장실로 들어가기에 급히 다가가서 “나오면 잠깐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참 기다리니 나오기에 “선배가 우리 불교학과를 ‘목탁과’라 하며 욕했다면서요?”하니까 노려보기에 느닷없이 주먹을 한 대 날려 넘어뜨리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기원학사로 돌아오니 저녁 공양시간에 그 학회장이 “이빨이 세 개나 나갔는데 검찰에 고발을 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검찰에 불려 다니며 이빨과 벌금을 물고 얼마나 경을 쳤는지 모릅니다. 그 대신 ‘목탁과’란 소리는 없어졌습니다.

재발심

불교대학 3학년 때 해인사 강원에서 경전을 배우겠다고 머리 깎고 행자생할을 시작하게 됐는데 갑작스럽게 총학생회장이 되었다며 학생처에서 데리러 왔습니다. 갈 수 없다고 하니 올라가서 인사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올라와 총장실에 들렸더니 백성욱 총장님이 “이곳을 해인사라 생각하고 나에게 <금강경> 강의를 들어라.”하셔서 꼼짝없이 잡혀 매일 오전 11시~12시까지 총장실에서 1년간 단독으로 <금강경> 강의를 받으며, 수행하는 총학생회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재가불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후 총학생회장 활동이 모범적인 학생운동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삭발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남산대사’란 별명을 얻었고, 한해 위 연상인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이 불교운동을 하는 도반이 되겠다고 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 도반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평생동안 불교 포교밖에 모르는 남편 대신 가정을 지키면서 밖으로는 복지부 가정복지국장으로 이 나라 복지의 틀을 마련하는데 실무 책임을 했습니다. 황무지 같은 우리 불교 복지기반 구축에 숨은 역할을 한 것이 지금 알려지고 있어 그나마 저 세상에서 미소 지을 것 같아서 다행스럽습니다.

대학졸업은 1959년입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 빈궁한 농토, 자유당의 독재, 대처비구 분쟁 때입니다. 농촌에서는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는 배고픔 속에 정치는 부패하였기에 정신을 차려 중생을 제도해야 할 불교계는 대처비구 싸움이 심화될 무렵이었습니다.

기원학사 불교학도들이 모여 ‘세상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호화찬란한 기와집 안에서 중생의 보시만 받을 것이 아니라, 이 어려운 때에 폐허가 된 중생계에 나타나야 한다고 하면서 중생을 선도할 상징적인 호미를 든 관음개발성상(심신개발,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을 세우자는데 합의했습니다. 대표를 맡아 그해 4월 5일 김해 봉화산 정상에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1959년 김해 봉화산에 세워진 호미 든 관음성상. 당시 불교계는 비구ㆍ 대처승 문제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필자와 31명의 불교학도가 새불교ㆍ농민운동의 이상과 의지구현을 외치며, 가장 친숙한 농기구인 호미를 든 관음보살상을 조성했다.

그 후 봉화산 정토원 개설, 봉화산 불교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계종 상임포교사로 활동하며 1년에 280회라는 법회기록을 세웠습니다. 또 동국대 불교대학 객원교수, 대한불교청년회장이 되어 16개 지회를 인수받아 152개 지회로 늘리면서 3ㆍ1절 만해백일장 개최, 불교청년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제1회 전국청소년수련 프로그램경진대회에서는 1,200여 출품작 중 ‘봉화산예절서당’ 프로그램이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후 한국청소년시설협회장(현재 공·사설 850여 개), 호법포교사단 창립, 88서울올림픽 10만 유등 문화행사 기획홍보총책, 한국불교문학회장, 통일문학축전총괄본부장, 대한불교전국신도회장의 직책을 맡아 중앙신도통합 등 재가포교사로서 초지일관(初志一貫)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신 수행길을 가지 아니한 초발심이 재발심으로 다시 출발해 초발심 때 갖고 있던 화두와 초발심 때 갖고 있던 문제해결을 찾으려고 그간 부단히 노력하였고, 오늘도 쉬지 않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내일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오늘까지 움직이고 있는 초심의 에너지가 뒷받침하고 있는 한 위대한 부처님의 출가동기를 되새기며, 사홍서원과 불교 중흥을 위해 결코 멈추지 아니 할 것임을 다짐합니다.

선진규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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