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263호)

인류문명의 발달은 ‘탈 것’의 발달과 궤를 같이한다. 직립보행이 인간에게 사냥과 농사에 획기적인 기반을 제공했다면, ‘탈 것’의 개발과 활용은 공간이동을 통한 무한한 산업발달의 동력을 제공했다. 그래서 산업혁명의 핵심 조건으로 증기기관차의 발명이 꼽히는 것이다.

소위 천리마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면 그 거리는 400km다. 오늘날의 KTX는 천 리를 달리는데 3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길었던 우마차의 시대를 거쳐 지난 몇 세기 사이에 철도와 대형선박의 시대가 열렸고, 지금 우리는 초음속의 항공과 우주선 시대에 살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공간이동의 속도는 돈에 결부되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탈 것’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인류문명의 발달 속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초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고 속도에 지배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날 도시인들은 물론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이라 해도 ‘탈 것’이 없으면 아주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탈 것’에 대해 길들여지는 과정이기도 한 셈이다.

‘탈 것’의 속도에 길들여진 삶, 그래서 많은 것이 시간으로 환산되고 많은 가치가 속도에 비례되고 있다. 이를 누가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있겠는가? 좋은 차가 부와 생활력의 표상이 되고, 빠른 차가 운송업계의 승패를 결정 짓는 것은 첨단산업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다.

그런데 빠름만 추구하는 삶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회의가 있어 왔고,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성향이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고속에 지친 현대인들이 저속을 통해 인간본연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탈 것’의 고속화가 불러온 속도전에 대한 완급조절이 없이는 모두가 지치고 허둥댈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 것이다.

힐링의 시대, 우리는 생활 속의 속도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빠른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느린 것이 무조건 좋거나 나쁜 것도 아니다. 빠름에 지치면 몸과 마음은 병들고, 느림에만 의탁하면 심신이 헐거워진다. 빠르고 느림의 조화가 우리의 생활을 건강하게 한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지혜가 건강과 행복의 열쇠다. 차를 타거나 걸음걸이를 조절하는 것만이 삶의 속도조절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속도조절이다. 마음을 너무 급하게 쓰면 매사가 부실하게 된다. 과속이 교통사고의 치명적인 원인이듯이. 마음을 너무 느리게 써도 안 된다. 지나친 느림은 일이나 대인관계에서 독이 되기 십상이다.

‘끽다거(喫茶去)’라는 화두로 유명한 조주(趙州) 선사에게 제자가 질문했다.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요?” 선사는 “그대들은 시간에 끌려가지만 나는 시간을 끌고 간다. 어떤 시간을 묻는 건가?”하고 반문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울림이 큰 반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시간에 끌려가는가 아니면 시간을 끌고 가는가? 좀 더 빨리 가기위해 몸부림치는 당신. 좀 더 빠르게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 당신. 좀 더 빠른 대답을 듣기 위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당신. 당신의 일상은 끌려가는 것인지, 끌고 가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끌려가든 끌고 가든, 지금의 그 속도는 적절한지도 깊이 성찰해 보라.

불교에서는 죽어서도 타야할 ‘탈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반야용선’이다. 이승에서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만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의 옹호와 인로왕보살의 안내를 받으며 극락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을 탈 수 있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지혜가 없으면 현생의 선업을 쌓을 수도 없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믿음으로 생의 가치를 드높이는 사람은 반드시 인로왕보살의 안내를 받아 극락왕생한다. 내생에 극락왕생을 바란다면 삶의 속도를 잘 조절하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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