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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도 적당히 ― 짜증이 나면 쉬어라가족과 함께 읽는 부처님 말씀 (263호)
  • 글·김정빈 소설가/삽화·전병준
  • 승인 2017.03.2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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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 싯다르타 태자는 하루에 삼씨 한 톨만 먹으며 온몸을 혹사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육 년간의 고행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자는 열두 살 때의 일을 떠올립니다. 그때 태자는 부왕을 따라 농경제에 갔다가 혼자 떨어져 한 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태자는 벌레를 잡아먹는 뱀과 그 뱀을 잡아먹는 독수리를 보게 됩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비범한 자질을 가졌던 소년은 그 충격을 조용히 음미합니다. 얼마 후 태자는 초선(初禪)에 들게 되는데, 초선은 마음이 ①대상을 향함(vicara) ②대상을 고찰함(vitakka) ③희열(piti) ④행복(sukha) ⑤하나로 통일됨(ekaggata) 등 선정의 다섯 요소를 갖춘 상태입니다.

저는 그때 태자의 마음에서 연민삼매(憐憫三昧)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약육강식이라는 살벌한 상황이 약자에 대한 연민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마음에 몰입함으로써 초선이 일어났다고 본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렇게 보는 근거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무량심(四無量心) 수행을 권하곤 하셨다는 점, 비심(悲心)으로 번역되는 연민심(karuna)이 사무량심 중 두 번째 무량심이라는 점입니다.

그때 태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초선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행을 할 때는 초선은 커녕 수행이 진보했다는 어떤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검토한 끝에 태자는 고행이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음식을 적당하게 섭취하여 건강을 회복한 태자는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깨달음을 성취하여 부처님이 되십니다.

두 극단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그 둘은 무엇인가.
욕망에 집착하는 것과 고행을 일삼는 것이다.
나는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증지(證智)·등각(等覺)·열반(涅槃)을 돕는다.

- 〈잡아함경〉 중에서

불교에서 중도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입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 용수 보살은 팔불중도를 설했고, 부처님은 십육중도를 설하셨습니다만 그 많은 중도 가운데 기본이 되는 중도는 고락중도(苦樂中道)입니다.

‘고락’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의미하므로 고락중도는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양끝 길이 아닌 가운뎃길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삶의 길이 ①즐거운 길 ②괴로운 길 ③가운뎃길로 분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은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길이며, 그 과보는 괴로움입니다. 게으름에 빠져 놀기만 하면 일단을 즐겁습니다. 내 입장만 생각하고 남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으면 우선은 편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의 결과는 나쁜데, ①은 그런 길입니다.

그렇다면 ②가 정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①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노력하지 않고 게으른 것이 잘못이라는 것, 내 이익만을 앞세워 남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이 앎은 사람들의 생각을 그 반대편으로 치닫도록 몰아갑니다. ①이라는 왼쪽 끝이 잘못이니까 ②라는 오른쪽 끝으로 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잘못된 길로서의 고행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시작됩니다. 게으름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은 맞습니다. 문제는 ‘너무’입니다. 노력을 너무 하는 것이 고행입니다. 고행은 시간 면과 공간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너무 노력하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너무 남을 위하는 것이 고행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시간 면에서 지나친 노력은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그 힘듦이 쌓이면 지치게 되고, 그러면 안 좋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싫증이 나고, 그런데도 노력을 밀어붙이면 짜증이 납니다. 그래도 또 노력을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마음에서 분심이 일어납니다. 화가 나는 것이지요.

공간 면, 즉 나와 남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위주로만 사는 게 옳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 위주로 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남의 입장을 배려해주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쳐서 주체성을 잃는다거나 거절해야만 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여 남의 책임까지 떠맡아 지게 되면 삶이 힘들어질 것은 자명합니다. 이 경우에도 마음에서 싫증·짜증·분심이 차례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이 ③이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③은 어떻게 하는 길일까요. 예, ③은 ②에서 ‘너무’를 제한 길입니다. 즉, ③은 기본적으로 노력을 하되 지나쳐서 자신을 힘들게 할 정도로는 노력하지 않는 길입니다. ‘적당’하게 노력하라는 것이지요.

우리말에서 ‘적당’이라는 말은 ‘딱 알맞다’라는 뜻보다는 ‘대충대충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적당은 그것이 아니라 본래의 뜻인 ‘적절하게 알맞은 정도’를 뜻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적당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싫증’이 나기 직전까지가 적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해서 노력을 하다가 싫증이 나는 것은 ‘적당’을 넘어 ‘너무’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력을 하다가 첫 번째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마음은 싫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력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쉽게 노력을 포기해서는 진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싫증이 날 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그때 우리는 싫증을 참고 견디며 더 가열차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참고 견디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부정했던 ②입니다. 그것은 고행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도로서의 ③은 고행이 아니잖습니까. 바로 여기가 요점입니다. 참고 견딤이 있으나 고행은 아닌, ③은 그런 길입니다. 정리하면 “싫증이 나더라도 참고 견디며 노력하라. 그러나 짜증이 날 정도가 되면 쉬어라.”가 중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벨을 들어 올리는 연습을 한다고 합시다. 그는 바벨 100kg를 드는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100kg이 안 되는 바벨로 연습을 한다면 그는 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치대로만 보면 ②는 100kg을 넘어서는 바벨을 들 때부터이고, ③은 딱 100kg 바벨을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딱 100kg만을 들어서는 실력이 향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105kg 정도 되는 바벨로 연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에게 ‘약간’ 힘든 정도가 적당한 정도라는 말입니다. 저는 ‘약간’을 5%로 잡았습니다만, 이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요점은 마음에서 짜증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입니다. 마음에서 짜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내 노력이 중도를 넘어 고행으로 접어드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때는 이제 쉴 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에 싫증이 생겼을 때는 참고 견디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짜증이 일어나면 노력을 그쳐야 합니다. 그때도 노력을 밀어붙이면 분심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심은 마음속에 잠겨 있다가 언젠가는 제 말을 합니다. 마음에 쌓인 분심이 그냥 나가는 법은 없습니다. 자신에게나 남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이 분심의 본성입니다.

분심을 품고 있으면 몸은 경직되고 마음은 어두워집니다. 그런 끝에 실력이 110쯤 향상되는 듯이 보이다가 어느 날 90으로, 나쁜 경우엔 80 이하로 뚝 떨어집니다. 마음에 쌓인 분심은 자신의 노력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폭발합니다. 오래 수행을 했다면서 화를 잘 내는 분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고행을 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낑낑대며 수십 년을 노력했는데 마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수행 정진의 보상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기까지 하니 화가 안 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에 비해 105의 노력을 기울인 수행자는 다릅니다. 중도의 노력을 기울일 때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느낍니다. 괴로움은 내 능력에 넘치는 노력에서 생기고, 즐거움은 나 자신을 극복하고 향상시키는 데서 생깁니다. 이렇게 하여 중도적인 노력은 고행이면서도 고행이 아니게 됩니다. 훌륭한 수행자는 그런 노력을 통해 과정을 즐깁니다. 그는 날마다 진보하며, 날마다 행복합니다. 그는 날마다 보상을 받기 때문에 남이 인정을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를 두고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이기는 것이
백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낫다.
- 〈법구경〉 중에서

부처님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나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노력하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훌륭한 불제자의 노력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수준의 노력입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도 다투지 않고 남과도 다투지 않는 화쟁(和諍)한 경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글·김정빈 소설가/삽화·전병준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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