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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법향을 머금은 여주, 문장을 부르는 풍경 여강신심 나는 국토순례(263호)

붉은 아침 해가 푸른 강물 위에 내려앉는다.
물새들이 해를 따라 모여들고, 강은 또 다시 흐른다.
그 옛날의 황포돛배와 고깃배는 볼 수 없지만 물안개 뒤로 흐르는 풍경은
그 옛날 묵객들의 현란한 문장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문학적 풍경들 너머엔 사라진 것들의 흔적들이 추억처럼 이어져 있다.
물길의 이름은 여강(驪江)이요, 강을 품은 땅의 이름은 여주(驪州)다.

‘여(驪)’자 돌림의 강과 땅…여주팔경

여강, 남한강 물길 중 여주를 지나가는 약 40km의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다. 지금과 같이 한강이라는 통칭이 없었던 옛날에는 강이 지나는 지방마다 그 이름을 각자 붙여 불렀다. 태백시 금대산 검룡소에서 출발하여 실개천으로 시작하는 남한강은 정선에 이르러 조양강이 되고 동강이 되었다가 영월에서 금장강과 합류한다. 단양에서 황강으로 흐르다가 충주에서 달천과 합쳐진 물은 부론에서 섬강을 만난 뒤 여주에서 여강으로 흐른다. ‘여(驪)’자 돌림의 강과 땅이다. 검은 말이라는 뜻의 ‘여’자는 이곳 전설 속의 검은 말에서 비롯됐다.

여강의 풍경은 예로부터 시선(詩仙)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야말로 문장을 부르는 풍광으로 유명했다. 그저 눈요기에서 그치는 풍경이 아니라, 문장으로 옮겨야 도리일 것 같은, 시제 같은 풍경인 것이다. 여강에 시를 붙인 묵객은 여주 출신 백운거사(이규보)를 비롯해 목은 이색 등 그 이름이 넘친다.

무한한 천지에 인생은 끝이 있나니 天地無涯生有涯
호연한 뜻 어디로 돌아가려 하는가. 浩然歸去欲何之
여강의 굽이굽이 그림 같은 산 驪江一曲山如畵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와 같은 것을. 半似丹靑半似詩

저물어가는 고려 왕조를 실감하면서 낙향을 결심한 목은 이색이 쓴 시다. 힘겨운 시절을 맞은 한 시대의 지성은 흐르는 강가에 다가와 그 말없는 풍경에 기대었다. 풍경도 그쯤 되면 사람을 위로했다고 하겠다. 그렇게 여강을 품은 여주의 풍경들은 풍경 이상의 풍경들이 많다. ‘여주팔경’이 그것이다. 어느 지역이나 그 지역의 대표적인 절경들이 있지만 여주팔경은 다른 지역의 대표 풍경과 조금 다른 형식이다.

⊙ 신륵모종(神勒暮鍾) - 신륵사의 저녁 종소리.
⊙ 마암어등(馬巖漁燈) - 마암 고깃배의 등불 밝히는 모습.
⊙ 학동모연(鶴洞暮煙) - 학동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
⊙ 연탄귀범(燕灘歸帆) - 강 여울에 돛단배 돌아오는 모습.
⊙ 양도낙안(洋島落雁) - 양섬에 기러기 내려앉는 모습.
⊙ 팔수장림(八藪長林) -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친 전경.
⊙ 이릉두견(二陵杜鵑) -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 파사과우(婆娑過雨) - 파사성에 여름 소나기 지나는 풍경.

이상이 여주팔경인데, 단순히 장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빚어내는 ‘상황’을 풍경으로 내세우고 있다. 저녁 종소리, 뱃전의 등불, 밥 연기, 돌아오는 모습, 내려앉는 기러기 떼, 강에 비친 숲, 두견새 우는 소리, 내리는 소나기 등 상황이 보태질 때 비로소 절경이 되는 것이다. 여주팔경은 여강 주변을 따라 걷는 ‘여강길’을 걸으면 대부분 만날 수 있는데, 팔경 말고도 여강이 품은 빛나는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여강이 품은 풍경…여강길을 걷다

신륵사 앞의 여강 전경. 여강을 따라 걸으면 여강이 품은 풍경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주종합터미널에서 시작되는 여강길(총 57km)은 4개의 코스로 되어 있다. 도리마을회관까지 이어지는 1코스(15.3km)에는 조선시대 여주 관아의 정문이었던 영월루와 명성황후생가가 있다. 영월루에 서면 여강은 물론 여주시가 한눈에 보인다. 옛 시절대로라면 팔경의 하나인 팔수장림이 강물에 잠겨 강과 숲이 하나인 절경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시절의 팔수장림은 볼 수가 없다. 어느 시절이 가져갔든 가져간 값을 해야 할 것이다. 영월루를 내려오면 전설의 검은 말이 나왔다는 마암(馬巖)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여주 관아의 첫 관문인 영월루.
전설 속의 검은 말이 나왔다는 마암.
명성황후가 8세까지 살았던 생가.

흔암리 전에 마을 쪽으로 잠시 들어가면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다. 황후는 여덟 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황후의 영정 앞에 놓인 흰 국화가 황후의 먼 시선을 따라나선다. 평온하게 놓인 영정과 담담하게 놓인 국화 사이엔 여전히 엄두가 나지 않는 시간과 누구도 닦아낼 수 없는 슬픔이 고여 있다.

도리마을에서 시작하는 2코스(19.7km)는 강천마을까지인데, 강천마을은 강천섬과 이어지고 강천섬 끝에 서면 바위늪구비가 보인다. 약 50만 평 규모의 자연섬인 강천섬은 쑥부쟁이 서식처와 은행나무거리, 오솔길, 트레킹코스, 자전거 코스 등이 조성되어있다. 무엇보다 여강을 바라보며 섬의 가장자리를 걷는 맛이 일품이다. 햇살이 서쪽 산을 넘을 땐 강물의 빛깔이 시시각각 다르고, 물새들은 강물 위에 긴 발자국을 그려낸다.

바위늪구비는 여강의 물이 늘면서 자연적으로 생긴 늪이다. 강물이 늘면 강바닥이 되었다가 강물이 줄어들면 늪이 된다. 갈대숲 사이로 고라니가 보이고 처음 듣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강천마을에서 신륵사까지 이어지는 3코스(14km)에는 박찬수 선생이 설립한 목아박물관과 팔경의 하나인 신륵사(신륵모종)가 있다. 목아박물관에는 6,000여 점의 불교 유물과 용품이 전시되어 있다.

강월헌과 신륵사삼층석탑. 나옹선사의 다비처인 신륵사 삼층석탑과 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정자 강월헌.

신륵사는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열반한 곳으로, 신륵사 마당 끝에는 나옹선사의 다비처에 세워진 삼층석탑과 스님을 추모하는 강월헌이라는 정자가 여강을 바라보고 서있다.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당호다. 강 건너에서 저녁을 맞으면 신륵사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발밑을 적셔온다. 그 무엇으로도 젖지 않는 강물도 저녁 종소리에 하염없이 젖어간다. 한 겹 한 겹 시방을 넘어가는 범종의 법음에 두 손을 모으면 종소리에 적힌 설법이 가슴을 두드린다.

신륵사에서 세종대왕릉에 이르는 4코스(8km)에는 팔경의 하나인 양섬(양도낙안)과 세계문화유산인 세종대왕릉(영릉)과 효종대왕릉(녕릉)이 있다. 양도낙안으로 불리던 양섬도 그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새벽안개 사이로 날아가는 기러기들은 여전히 양섬 위를 날고 있다.

조선 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세종대왕릉.

세종대왕릉은 설명이 필요 없는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왕릉이다. 세종대왕릉에서 약 700m 거리에 있는 효종대왕릉은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조선 17대 왕 효종과 인선왕후의 묘가 있는 왕릉이다. 두견의 울음소리가 다 같은 것일 텐데, 이곳의 두견은 어찌 울었기에 민심의 기억에 남은 것일까. 두견이 슬피 운 것일까. 백성의 귀가 슬펐던 것일까. 아쉽게도 두견새 우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효종대왕릉. 조선 17대 왕 효종의 릉.

이렇듯 여강길을 걸으면 여강이 품은 풍경들을 만난다. 하지만 시대적인 어쩔 수 없음으로 해서 지금은 볼 수 없는 팔경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축소된 팔경도 있다. 마암어등, 학동모연, 연탄귀범, 팔수장림 등이 그러하다. 관광객을 위한 황포돛배가 여강을 오가지만 그 옛날 삶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의 모습은 아니며, 옛사람들이 말하던 장림도 많이 사라졌다. 마암은 그대로 있으나 불을 밝히는 고깃배가 없으며, 마을 어디선가 저녁을 짓겠지만 구수한 밥연기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옛날의 여강이 그랬듯이 여강은 여전히 강가에 발을 딛는 이들의 가슴 속을 흘러간다.

천태 법향 깃든 고달사지와 보살의 땅 주어사지

여주 고달사지1-사적 382호.고달사는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천태종의 법맥을 시작했다.

강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오늘에 닿았다면, 강을 품은 땅은 하루하루 강을 떠나보내며 오늘에 닿아있다. 강물과 함께 흘러간 시간들을 들판과 산기슭에 품어 오늘에 닿아있는 것이다. 북내면의 한 자리 혜목산 자락은 사라진 불법(佛法)의 한 시대를 품고 있다. 그것도 천태의 법향이 깃들었던, 그야말로 여법하고 여법했던 시절의 흔적을 품고 있다. 허허한 절터, 사방으로 30리가 되었다는 가람의 어귀에 일주문을 열고, 옛날을 기억하는 석재 위에 금당을 짓고, 행자의 발자국 위에 석탑을 세우고, 선사가 걸었던 길 위에 종루를 올려본다. 절은 없지만 여전히 가람인 고달사지(사적 382호)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에 개산했다고 전하는데, 사명(寺名)에는 전설이 있다. 고달이라는 석공이 있었다. 고달사의 석조물은 모두 그가 조성했다. 지극한 불사였다. 고달의 식구들은 함흥에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아내와 딸은 고달이 그리워 여주를 찾았다. 하지만 고달을 만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고달의 아내와 딸은 귀향길에 객사한다. 불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고달은 아내와 딸의 객사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한다. 고달사의 이름은 석공 고달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고달사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봉림산문의 개조인 원감대사 현욱(787~868) 스님이 당나라 유학 후 주석하던 9세기 무렵 사세가 일었다. 원감대사의 제자 진경대사 심희(854~923) 스님과 진경대사의 제자인 원종대사 찬유(869~958) 스님이 주석했고, 원종대사가 유학하는 동안 사세가 위축되었으나 원종대사가 유학 후 다시 주석하면서 사세를 찾았다. 국사로 봉해진 원종대사가 입적한 후 지종대사가 법을 잇고, 법안종계 선원으로 법맥을 잇다가 대각국사 의천(1055~1101) 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천태종의 새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의천 스님의 천태종 개창에는 고달사를 비롯해 거돈사, 신령사, 영암사, 지곡사 등 선종 5대 산문의 선승 1,000여 명과 덕린ㆍ익종ㆍ경란 스님 등 문도 300여 명이 기반을 이루었다. 고려 말까지 천태종의 법을 이은 고승으로는 연선자ㆍ의징ㆍ약언ㆍ달의ㆍ달목 스님 등이 있는데, 이 중 의징 스님의 이름이 고달사를 지나간다. 당시 유불선에 능했던 학자 운곡(1330~?)이 의징 스님에게 ‘고달사의 이의징 대선사에게 부침’이란 시 한 수를 보낸다.

머리를 돌려 혜목산을 바라보니
흰 구름 사이에 한 덩이 푸른빛이 보이네.
그 가운데 천태의 늙은이가 있으니
백세의 한가로움을 굳건히 차지했네.

고달사는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이지만 추정일 뿐 정확한 폐사 시기와 연유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와 석조대좌(보물 제8호),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그리고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등이 남아 있다.

고달사가 사방 30리의 넉넉한 불사였다면 산북면의 양자산 깊은 곳엔 작은 불사의 흔적이 있다. 산비탈의 작은 땅에 남겨진 주어사지(여주 향토유적 제19호)다. 주어사지는 마을 어귀에서 약 40~50분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절터 입구에서 마지막 산비탈을 오르면 아늑한 숲속에 분홍빛 연등으로 담을 두른 주어사지를 만난다. 옛날의 흔적이라고는 군데군데 쌓인 돌들과 그날의 웅성거림이 전부다. 주어사는 조선 후기 천주교도들의 강학회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천주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이었다. 발붙일 곳이 없었던 천주교인들이 찾아간 곳이 주어사였다. 주어사는 다른 가르침을 들고 찾아온 그들을 부처님의 이름으로 품었다. 그리고 그 일로 스님은 참수되고 1801년 신유사옥 때 절은 폐사된다. 주어사는 언제 문을 열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 사라졌는지, 왜 사라져야 했는지는 선명하게 전해온다. 모든 폐사가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주어사의 폐사는 또 다른 슬픔이며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역사가 지나가야 했던 길목에 인연을 지은 것이 슬픔이라면 슬픔일 것이다.

파사성여주팔경의 하나인 파사성(파사과우)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전한다. 정상에 오르면 여강과 여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어사지를 뒤로 하고 팔경의 하나인 파사성(파사과우)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세찬 소나기가 수많은 벽돌 위에 떨어지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들려올 빗소리가 먼저 귓전을 때린다. 산성이 소나기를 만나야 절경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옛날 힘겨웠던 생사의 고성들을 아직도 성벽의 벽돌들이 듣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찬 빗소리가 그 힘겨운 아우성을 재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대신면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축조된 파사성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수축과 개축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성 정상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 서니 멀리 여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물은 여전히 땅을 지나가고, 땅은 또 강을 떠나보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강은 땅의 곁에 있고, 땅은 강을 품고 있다. 지나가는 것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떠나보내는 것이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곁에 있는 것이었다.

원종대사탑 보물7호.
원종대사탑비 보물6호.
고달사지 승탑 국보4호.

박재완 여행작가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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