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의 선지식을 찾아서(263호)

진경(眞景)시대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조선다운 사상과 예술이 발흥한 시대를 부르는 이름이다. 진경시대의 한 중심에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있었다. 우리 문화사에 ‘진경시대’의 개념을 정립하고, ‘진경시대’라 명명한 이가 가헌(嘉軒) 최완수 선생이다. 겸재와 추사 연구의 최고 전문가인 선생은 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부터 1년 동안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했다.

1966년 4월부터 지금껏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그동안 위암 장지연상(2010), 우현학술상(2010), 일민문화상(2012) 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2, 3>, <명찰순례 1, 2, 3>, <추사집>,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2>,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겸재의 한양진경>, <겸재정선> 등이 있다.

우리 문화사에 ‘진경시대’의 개념을 정립하고, ‘진경시대’라 명명한 이가 가헌(嘉軒) 최완수 선생이다.

옛 선비들은 매화 필 무렵이면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났다. 가장 먼저 피어나는 매화를 보기 위해 매화 향기를 찾아 떠나는 탐매행(探梅行)의 시간이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으로 향하는 마음은 늘 그런 설레임이다. 간송미술관은 1938년에 문을 연, 이 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의 현재 이름이다. 미술관은 내년이면 80주년을 맞는다. 이곳엔 지난해로 머문 지 50주년이 된 최완수 선생이 계시다. 선생은 변함없이 멋스런 한복 차림으로, 예의 형형한 눈빛으로 반겨주셨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리라 다짐하다

일제 강점기, 선생의 사랑채에선 종종 지역 유지들이 둘러앉았다. 주담의 자리에선 주로 조선의 현실에 관한 대화가 중심을 이뤘다. 호기심 많던 그는 술상머리에서 ‘왜놈들이 역사를 왜곡시켜 장차 후손들이 사실로 알고 배우면 큰 일’이라는 어른들의 걱정어린 말씀을 귀동냥했다. 그때마다 다짐했다. 역사를 연구해서 왜곡된 역사를 내가 바로 잡아야겠다고.

물밀듯이 몰려오던 서구사상에 또래들이 젖어들던 10대 때, 선생은 우리 역사 연구의 바탕이 될 한학과 고전을 파고들었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많은 역사서를 탐독했으며, <반야심경>을 품안에 넣고 다녔다.

“경복고 시절에 한학자 백아 김창현 선생과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지요. 막힘이 없고 모르는 게 없는 스승이셨습니다. 3학년 때엔 자신의 반으로 배정을 해주셨죠. 졸업할 때, 저마다 칠판에 한 줄씩 글을 남겼습니다. 한학을 익힌 저는 ‘선생님께서 이 단에 오르면 모름지기 이별의 노래를 부르셔야 합니다(師登此壇 須唱離別之歌)’ 하는 한 줄 글을 남겼습니다. 칠판을 둘러보시던 스승님께선 ‘나 노랜 못해요, 그러나 글은 잘 됐네요.’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고교시절에 당대 한학의 대가로부터 칭찬을 듣는 제자였다. 그 자부심으로 서울대 사학과 면접 땐 ‘식민사관을 바로 잡으려고 왔다.’고 당당히 말했다. 대학 진학 후에도 도반들과 백아 선생을 모시고 사서삼경을 다시 배웠다. 강의 뒤에 어김없이 펼쳐지는 술자리는 향기로운 학문 토론의 자리였다. 대학에서 뵌 동빈 김상기 선생, 국립박물관에서 뵌 혜곡 최순우 선생 모두 오늘의 미술사학자 ‘최완수’를 이끌어주신 평생의 스승이시다.

1970년대 초부터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국미술사를 강의 한 최완수 선생은 제자들에겐 하늘같은 스승이시다. 한 학기에 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몰려드는 인기를 누렸다. 그 시절 인연이 된 학생들이 스승 문하로 찾아왔다. 스승 곁에서 밥해 먹고 빨래해가며 배움을 닦았다. 전통적인 도제식 교육이었다. 서로 배우고 익히고, 인격적 교감을 나누면서 사제의 정이 도타워졌다. 그렇게 모인 50여 명의 제자들을 밖에선 ‘간송학파’라고 부르지만 이들에겐 ‘보화재(葆華齋)’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보화재 모임은 한 달에 한 차례씩 스승을 모시고 연구 성과를 나누고 있다. 한의사에서부터 화가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제자들이 선생의 고희 때엔 배운 바를 <진경문화>란 책으로 엮어 축수했다. 전시회도 열었다. 각기 흐르던 강물이 모여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는 자랑찬 모습이다.

어디 그뿐이랴. 선생의 담백한 저술들은 베스트셀러로 사랑을 받았다. 한국학을 선생의 책을 통해 배웠고, 한국적 미감을 선생의 글을 통해 익힌 중중무진의 독자들도 최완수 선생의 숨은 제자들이다. 〈명찰순례〉 책을 허리춤에 꿰고 순례에 나서는 답사객들은 또 얼마였던가.

닳고 닳은 100권의 대장경

선생은 대장경에 발목 잡혀 지금까지 왔다고 했다. 선생은 대장경을 미술사 논문에 새까맣게 인용한 최초의 인물이다. 50여 년 세월 선생의 손때가 묻어 너덜거리는 100권의 대장경은 그대로가 '문화유산'이다.

선친께서는 유교적 전통 속에서 생활한 엄격한 선비셨다. 내간에선 절에 열심히 다니셨다. 특히 할머님의 불심이 대단하셨다. 책읽기를 즐기고 이야기를 좋아하니, ‘애보기’를 들여도 입담 좋은 사람으로 골라줄 정도였다. 집안에 가득한 한문 경전을 즐겨 외며 자랐다.

10세 초파일에 난생 처음 부처님을 친견했다. 집안의 원찰, 가야산 보덕사 극락전에서였다.

“절을 하는데 황금빛의 잘생긴 미남이 앉아계셨어요. 그런데 머리엔 사발 하나를 엎어놓은 것 같고, 표면에는 작은 고둥 껍데기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이상했지요. 스님께 여쭸더니 ‘아마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6년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그 때 보리수 열매가 머리 위에 떨어져 쌓인 모습’일 거라고 답해주셨죠. 어렸지만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내가 다시 밝혀내야지, 하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던 소년은 이후 자고 깨면 화두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모르는 것이 있으면 궁금해 못 견디고, 모든 일이 이치에 맞아야 수긍하는 성품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그 어떤 어르신 앞에서도 절을 하지 않았건만, 스님들이 집에 들르시면 먼저 달려가 절을 했다고 한다.

1960년 서울대 사학과 입학 기념사진이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다. 이 시절 품속에 어김없이 <반야심경>을 넣고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산에서 마애삼존불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햇살 좋은 어느 겨울날, 점심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서산 마애불을 찾아 나섰다가 산중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암흑이 온 산을 덮자, 가슴에 품은 〈반야심경〉만 거듭 단속하며 오로지 감각에 의지해 산길을 뛰고 달렸어요. 모골이 송연해서 달아나기도 하고, 절벽에서 머뭇거릴 새 없이 몸을 날려 뛰어내리기도 하면서 마침내 한밤에 원찰 보덕사에 닿았지요. 스님들 모두가 날 밝은 여름날에도 올 수 없는 길을 왔다고 놀라워하셨습니다.”

기실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보덕사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나 추위 속에서 잠시 졸 때 신장님이 나타나 목덜미를 움켜줬던 것도 하나같이 삼보의 가피였을 것이다.

선생은 절 입구에 들어서면서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다고 했다. 처음 간 절인데 갑자기 고향에 온 듯 익숙하고, 예전에 살았던 것 같은 안온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삶도 수행자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새벽 3시에 일어나 온종일 학문으로 용맹정진하는 선생을 뵈면 선생의 전생은 보지 않아도 수행자였을 것임엔 틀림없다.

이미 대학시절에 불교미술사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대장경 독파 계획을 세웠다. 불상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경전의 이해, 사상적 배경부터 이해해야만 했다. <대정신수대장경>을 읽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공부는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대 도서관을 오가며 책을 빌려보는 번거로움은 컸다.

국립박물관 시절, 자원해 내려간 경주에선 ‘꼭 하고 싶었던 불상연구 기초조사를 다니겠노라.’ 선언했다. 이른 새벽부터 도시락을 챙겨들고 경주 일대를 누비며 불상을 실측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966년 봄에 최순우 선생이 간송미술관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연결해주셨다.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인지 살피러 연구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서가에 채 뜯지 않은 <대정신수대장경> 100권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두말 않고 일을 시작했다. 대장경만 읽으면서 공부에 매진해야겠다는 발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구소에는 피난 가려고 쌓아둔 고서적 보따리가 한짐이었다. 고서적의 쌓인 먼지를 털어낸 연후에 서가에 정리하는 일이 첫 일이었다. 일을 마치고 코를 풀면 시커먼 먼지가 나왔다. 일을 마치는 대로 대장경을 찾아 읽다보니 날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책 읽는 시간을 벌기 위해 10년쯤 뒤엔 아예 연구소 문간방에 자리를 잡았다. 100권의 대장경은 어느덧 선생의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졌다.

보덕사에서 의문이었던 불상의 나발(螺髮) 연구는 1971년부터 74년까지 ‘계주고(髻珠考)’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김원룡 선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라는 경하의 엽서를 보내오셨다. 그즈음 주간잡지에 불상연구를 대중적인 시각으로 연재했다. 이를 정리해 1984년에 펴낸 책이 〈불상연구〉다. 10세 때의 서원이 비로소 30세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후 불교미술을 아우른 대작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가 3권으로 완간됐다. 학계에서는 대장경을 우리 미술사에 적용한 발상에 놀라고, 대장경에서 ‘새까맣게’ 인용해 낸 논문 앞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경전을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다

1985년부터 여섯 해 동안 송광사의 모든 불보살상과 제반성상 조성을 총괄하였다. 전문학자가 직접 불사에 동참해 연구성과를 반영한 최초의 사례다. 이 불사에서 선생은 불상의 시원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양식사를 세계 문화사적인 안목으로 총정리한 결과를 반영했다.

간송미술관의 첫 기획전은 1971년 10월에 열렸다. 전시회를 앞두고 간송미술관의 소장품과 마주했을 때, 선생은 한 대 ‘퍽’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항상 ‘조선왕조 500년 정체설’을 주창하며 낮춰보던 일제 식민사관에 확실하게 반박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겸재의 그림을 보는 순간 ‘바로 이것으로 조선 문화의 힘을 증명할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곧바로 겸재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이후 간송미술관에서 8차례나 펼친 겸재 기획전과 그이의 관련 저술과 논고, 다른 학자들의 연구 성과까지 총망라 해 지난 2009년에 선생은 ‘겸재 정선’을 3권의 방대한 전집으로 펴냈다. 2년 넘게 손을 본 본문만 200자 원고지 3,673장에 도판 206장과 삽화 147장이 들어간 대작이다. 선생이 무려 18차례나 교정을 거듭했을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겸재 250주기를 맞아 펴낸 대작 〈겸재 정선〉 앞에서 선생은 “이 책 속에 겸재 그림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자부했다.

1972년 간송미술관의 두 번째 전시회는 추사전이었다. 추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에 31세의 선생은 ‘김추사의 금석학’이란 논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추사연구를 시작했다. 선생이 1976년에 펴낸 〈추사집〉은 추사 글에 관한 최초의 번역이었다. 선생은 이 추사집을 38년 만에 손질해 지난 2014년에 〈추사집〉 개정판을 냈다. 한문 소양이 없거나 서예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세대를 위한 배려도 했다. 성에 차지 않거나 오역이었던 부분도 긴 세월동안 무수히 다듬었다. 그 사이 추사의 글씨를 편년으로 정리했다. 대표작 연도를 확정하고 해설을 붙여 맥이 서게 한 것이다. 곧 〈추사명품〉이란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추사가 ‘경전을 날줄로 삼고 역사서를 씨줄로 삼아[經經緯史]’ 왔다는 공부법이야 말로 최완수 선생의 공부법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고향집 뒷동산에서 손에 잡힐 듯한 내포평야(內浦平野) 건너편에 추사 고택이 있는 것조차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스물다섯에 받은 충격을 연구로 매듭짓기 위해 선생은 겸재와 추사와 더불어 살았다. 온갖 자료를 찾아 읽지 않고는 못 견뎠다. 그리하여 원 없이 공부했다. 평생 ‘빈둥거릴 새’ 없이 살았다.

이제 선생에게 남은 일이 하나 있다. 왕릉의 석물을 통해 본 조선 500년 문화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이미 1977년부터 조선시대 왕릉을 찾아 실측조사를 마쳤다. 왕릉 석물조각의 변천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왕릉의 석물에는 조선시대의 문화가 오롯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각 시대가 조각의 양식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분석하는 과정에서 제자들과 신이 났습니다. 진경시대 문인석, 무인석들이 당대 서울사람의 모습이었으니까요. 동물의 모습도 우리 것으로 달라지지요. 조선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내 가설을 왕릉 조사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하다 힘이 부치면 후일 제자들이 이어서 해 가겠죠.”

뭐든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최완수’ 선생다운 작업이다 보니 시간이 더디 걸렸다. 그러나 분명 새로이 쓰는 조선 역사가 될 것이다.

일마다 좋아하는 꽃 가꾸듯
살아온 한평생

선생은 평생 꽃을 가꾸며 살고 있다. 간송미술관을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꽃나무와 화분들은 지난 50여 년의 세월동안 선생이 손수 가꿔온 생명들이다. 꽃 가꾸기를 천품으로 즐기는 일은 진경시대를 규명해낸 일이거나, 주요 사찰의 불상조성을 책임진 일이거나, 간송학파라는 큰 물줄기의 제자들을 길러낸 일이거나, 글맛 나는 저술 작업을 이어온 일들과 둘이 아니다. 하나같이 부지런함과 열정, 치열함이 뒤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 문화에 매료돼 살아왔어요. 우리 역사에 미친 사람으로 살았고요. 역사는 불교사관에 입각해서 기술해왔죠. 한마디로 우리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는데 앞장서며 살아왔어요. 여한은 없습니다.”

열 살에 목표한 것을 서른에 이뤘고, 스물다섯에 목표한 것들을 이제 거의 이뤘다. 선생은 이제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겨울 끝자락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사인 매화는 희망의 존재다. 얼어붙은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눈밭에서도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인내, 고결, 절개를 지닌 고아함의 상징이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최완수 선생에게서 늘 그런 매화향을 느낀다. 번잡한 세상에서 꿋꿋한 성품의 선생을 뵙고 오는 길엔 가슴이 뻥 뚫리고 눈이 맑아진다. 긍정의 눈으로 조선을 들여다보고, 넘치는 자부심으로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며 살아온 선생의 70여 평생이 맑고 향기롭다.

문향천리(聞香千里), 매화향기는 천릿길이나 멀리 퍼져나간다 했던가. 맑고 고고한 가헌 최완수 선생의 정신이야 말로, 문향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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