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를 빛낸 세계 불교유산 (263호)

고려대장경연구소가 복간한 초조대장경 복간본(두루마리).

Ⅰ. 서론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 불교의 교리가 기록되어 있는 경전이다. 부처님의 열반 이후 그 설법과 교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패엽경(貝葉經)을 만들었고, 이 기록을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후에 대장경을 간행하게 되었다. 대장경은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三藏)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장은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梵語] 혹은 팔리어(Pali, Bali)로 된 트리피타카(Tripitaka)를 한역한 말로서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은 부처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의 조항과 그 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것이다.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글, 즉 논을 담은 것이다. 대장경은 당나라시대부터 쓰이던 용어이며, 이전에는 중경(衆經) 혹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 장경 등으로 쓰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인도어로 된 불경들을 한역하는 작업이 많아지게 되었다. 수·당 시대에 이러한 번역작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나 필사를 하는 정도로 그쳤으며 이 과정에서 이중 번역, 오역 등이 잦았다. 종이가 흔하지 않던 시대이므로 나뭇잎, 대나무, 나무껍질 등의 매체는 보관상에 문제가 많았으며, 오래 보관이 가능한 재료를 찾는 과정을 거쳐 돌을 재료로 한 석판대장경(石版大藏經) 등이 쓰이게 되었는데, 그 중 중국 운거산 방산 석경 1만 여 장이 가장 대표적이다.

또한 취급과 보존, 인쇄하여 널리 알리는데 편리한 점을 고려하여 나무를 주재료로 하여 자연스럽게 목판대장경(木版大藏經)이 중국의 송대에 최초로 만들어져 10세기말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대장경들 중 동북아의 대표적인 3국의 대장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합천 해인사 장경각 판전 내부. 고려 재조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Ⅱ. 중국의 대장경

1.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板大藏經)>

중국 개보칙판대장경 인경본과 함.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율·론 삼장을 일괄적으로 한자로 번역한 최초의 대장경은 <개보장(開寶藏)>이며, <북송관판(北宋官版) 촉본(蜀本)>이라고도 한다. 현재 극소수의 잔권(殘卷)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권자본(卷子本)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23행 14, 15자로 구성되어 있다. 송 태조가 개보 4년(971)에 대장경을 조조하게 하여 태평흥국 8년(983년)에 13만여 판의 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이후 수정과 증보를 거듭하였고 이렇게 완성된 대장경은 거란, 서하, 고려, 일본 등의 인접국가로 전파되었다.

중국 태산 석경.
개보칙판대장경 인경본.
거란대장경.

2. <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

<개보칙판대장경> 이후 거란(요나라)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데, 이를 <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이라고 하며 <거란장> 혹은 <요판대장경(遼版大藏經)>이라고도 한다. 흥종(興宗)의 명에 따라 1031년부터 1054년까지 불전의 교감과 조조를 진행하였다. 금(여진족) 대정 2년(1162) 성학의 <대금국서경대화엄사중수박가교장기(大金國西京大華嚴寺重修薄伽敎藏記)>에는 요나라 중희(重熙) 연간(1032~1054) 거란판대장경 579질이 박가교장내(薄伽敎藏內)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거란대장경>은 1974년 7월 산서 응현 목탑의 석가불상 복장(腹藏)에서 처음으로 실물이 다수 발견되어 목판불경(木板佛經) 47권 중 천자문의 번호가 부여된 12권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칭찬대승공덕경(稱讚大乘功德經)>의 권1에 통화 21년(1003)의 제기(題記)가 있고 또 도종(道宗)의 피휘(避諱)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시기는 성종조(聖宗朝)로 추정된다. 이에 대하여 1983년 나소(羅炤)는 <칭찬대승공덕경(稱讚大乘功德經)>이 단각의 불경으로 <거란장>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나 일본의 축사아장(竺沙雅章)은 일개 승려가 <관판대장경(개보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함가순(函架順)을 부여하여 경전을 독립적으로 간행하기란 어려우므로 이 책을 <관판대장경> 보다 앞선 시기에 번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 방산석경(房山石經)에 행수와 글자 수, 글자체까지 거의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거란장>은 고려에 여러 번 유입되어 고려 사경 혹은 출판의 저본 혹은 교정의 기준본으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각국사 의천 스님의 <제종교장(諸宗敎藏)·속장경>의 저본으로 활용된 점,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의 수기법사가 교정의 참고본으로 사용하였던 점 등을 통해 후세 불교계에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거란장>의 또 다른 판종의 형식은 <동문선> 권 112에 수록된 고려 원감국사의 <단본대장경찬소(丹本大藏經讚疏)>에서 ‘부피가 작고 가벼우며 전체가 2백 함이 되지 않고 종이는 얇고 글자는 빽빽하였다. 1천 책이 되지 않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라는 기록을 통해 작은 자로 줄이 빽빽하게 새겨진 것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숭덕만수대장 대반열반경>.  ⓒ남권희

3. <숭덕만수대장(崇德萬壽大藏)>

이 대장경은 <숭녕장(崇寧藏)>이라고 한다. 권수(卷首)의 3행이나 4행에 간기에 해당하는 장경제기(藏經題記)를 새겼으며 그 제기의 내용은 연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최초의 각인 시기는 원풍 3년(1080)이며 휘종 숭녕 2년(1103)에 완성하였다. 본문의 한 행이 17자인 경장은 모두 497함으로 되어 있고, 남송 순희 2년(1175)에는 많이 늘어나서 580함에 1,440부, 6,108권이 되었다. 그러나 <대반야경> 600권은 권두에 제기가 없고 권말에 도권수(都權首) 주지(住持) 혜공대사(慧空大師) 충진(冲眞)과 청주(請主) 참지정사(參知政事) 원강(元絳)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4. <비로대장경(毗盧大藏經)>

<비로장>은 송나라 휘종 선화 2년(1122)에 시작하여 고종 소흥 21년(1151)에 완성하였는데, 모두 596함, 1,451부, 6,132권으로 개원사(開元寺)의 주지 본명(本明)이 이 경장의 각인을 주관하고, 채준신(蔡俊臣), 갈귀년(葛龜年), 장주(張周), 임소(林昭), 진방(陳芳), 탁원충(卓元忠), 조천여(趙天與) 등 25인이 참여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출판비용을 조달하였다.

판식은 30행 17자이며 권수의 제기(題記) 혹은 권말의 제호(題號) 아래의 천자문 및 그 절첩장정 등은 모두 동선사등각원본과 서로 동일하나, 판면이 조금 작을 뿐이다. 이 대장경은 남송말 함순 4년(1268)에 주지 문적(文迪)이 판본을 보각하였으며 인쇄는 원나라의 대덕년간(大德年間)까지 계속되었다.

5. <사계대장경(思溪大藏經)>

1) 남송 호주 <사계원각선원대장경>

<사계장>이라고도 하며 밀주의 관찰사 왕영종(王永從)과 그의 동생 숭신군승선사 왕영석(王永錫) 등이 발원하고 승려 정범, 회침 등이 권하여 길주 사계 원각원에서 각인하였으며 북송 말기에 시작하여 남송 고종 소흥 2년에 완성되었는데 모두 1,459부, 5,940권이다.

<사계장>의 특징은 경론의 앞뒤에 모두 기록이 없다는 것이고 다만 전장의 한 두 곳에 2면 크기의 소흥 2년(1132) 4월의 각장에 제기와 부주가 있는 것으로, 사계장이 왕씨 일족의 가재를 희사해서 이루어진 출판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경론의 각첩의 말미에 모두 자음석이 주기되어 있는 점은 동선등각원판이 매자함마다 자음석 한 첩을 첨부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2) 남송 안길주 <사계자복선사대장경>

<사계판 대장경>에는 <사계원각선원신조대장경률론등목록(思溪圓覺禪院新雕大藏經律論等目錄)> 2권과 <안길주사계법보자복사신조대장경목록(安吉州思溪法寶資福寺新雕大藏經目錄)> 2권 등 2종의 출판목록이 있는데 지명과 사찰명의 차이가 있고 2종의 대장경에 모두 ‘신조’ 2자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사계장> 인경에 두 가지 목록이 있었다고 하여 두 종의 신조대장경판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다만 시간의 전후차와 ‘원’, ‘사’의 명칭이 다른 것이다.

법보 자복사의 대장경은 ‘천’자함의 <대반야경>으로부터 제548 ‘합’자함에 이르는 남본 <열반경>이 모두 전의 <사계장>의 원각선원판본이나, ‘제’자함의 <종경록>으로부터 ‘최’자함이 대장경목록에 이르는 모두 24부, 4백50함은 후의 사계 법보 자복사에서 추조, 보각한 것이다.

6. <적사대장경(磧砂大藏經)>

평강부(平江府) 적사(磧砂) 연성사(延聖寺)의 승려와 조안국(趙安國) 등이 각인을 주관해 원 대덕 10년(1306)경 완성했는데 <적사장>의 원주와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591함, 1,532부, 6,36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정 5년(1232)경에 송 왕실 일족인 조안국이 주축이 되어 수많은 승속들을 강절 각지까지 파견하여 모연토록 하여 <대반야경> 6백 권과 <마사반야경> 30권을 출판하였다. 최초의 간기는 대보적경에 소정 4년(1231) 7월 기록이 보인다. 대략 이 때 전반적인 조조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사장>의 말미에 나타난 간기를 통해 간행 차례를 살펴보면 판을 새길 때 자료가 모아지는 대로 다소의 경론을 새기고 출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평 원년(1254)에 이미 <평강부적사연성선원신조대장경율론등목록(平江府磧砂延聖禪院新雕大藏經律論等目錄)> 2권을 새겼다.

7. <보령대장경(普寧大藏經)>

<원장(元藏)>이라고도 부른다. 남송말 덕우 2년(1276) 오흥 사계의 법보자복사 전당이 원병에 의하여 소실되자 그 다음 해 원나라 지원 14년(1277) 원조의 군정통치하 임안에서 대명경사(적당사 종사)가 여러 지역의 선교 고승을 초청하여 대장경의 재조를 계획하였다. 이 사업의 완성을 위해 고산 도안 및 그 종문과 백운종도 등의 협조를 요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이후 도안, 여일, 여지, 여현 등이 모여 사계, 복주대장경을 대조, 교감하여 조조작업에 착수하여 원 세조 지원 14년(1277)에 시작, 지원 27년(1290)에 조조를 완료하였다.

이 대장경판은 <사계장>의 중간에 뜻을 두었으므로 그 판식·권말의 음석 및 장정에서 목록까지 대체로 사계장의 장점을 채용하였으나 다만 단순히 사계장의 번각에 머물지 않고 복주의 두 가지 장경 등을 교감에 참고하여 대장경을 완성하였다. 판식은 매반엽 6행, 매행 17자이며 새김이 매우 정교하였으며 판식은 송본에 비해 작고, 표지는 단색을 사용하였다. 전장은 모두 558함, 1,437부이었다.

8. <조성 금장(趙城 金藏)>

<조성 금장 금강반야바라밀경>. ⓒ남권희

<조성 금장>은 송의 <개보칙판대장경>과 거란의 <거란대장경>을 바탕으로 금대(여진) 민간에서 간행된 대장경이다. 1149년 로주(潞州) 장자현 법진(法塵)이 시작해서 1178년까지 30년 동안 산서, 섬서에서 168,103판 6,980권을 간행하였다.

9. <영락 남장(永樂 南藏)>

명대에 제작된 관판대장경으로 명 성조가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으며, 화재로 소실된 홍무 남장을 저본으로 하였다. 총 636함, 1,610부, 6,331권으로 이루어졌으며 경판은 총 57,160매이다.

10. <건륭대장경(乾隆大藏經)>

청에서 제작한 유일한 관판대장경이며 <용장(龍藏)> 혹은 <청장(淸藏)>이라고도 한다. 청 황실의 인물들이 주도하여 조성을 하였다. 총 724함 1,669부 7,168권이며, 정장 485함, 속장 239함으로 나뉜다. 중국의 대장경 중 유일하게 경판이 남아있다.

이상과 같은 한역대장경의 계보를 그림으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서하판 석경.

Ⅲ. 한국의 대장경

해인사 장경각.

1.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북송(北宋) 태조가 971년(開寶 4년)에 판각을 명하여 983년에 완성한 <개보장(開寶藏, 971~983)>은 991년(성종 10년) 고려에 전래되었다. 거란이 1010년(현종 1년)에 침입하여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왕이 피난길에 올랐고, 이후 1011년 2월 15일에 청주 행궁에서 연등회를 개최하면서 대장경 판각을 발원하였다. 즉, 불력(佛力)으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해 개보장을 바탕으로 1011년(현종 2년) 판각에 착수하여 1029년(현종 20년)까지 1차 완성하였다. 이후 요(遼)나라에서 1031년에 착수되어 1054년에 완성된 <거란장(契丹藏)>이 1063년(문종 17년)에 도입되고, 이를 <개보장>과 대조해 누락된 부분과 오류를 가려 보각했으며, 송대의 추가분을 합하여 1087년에 완성한 것이 <초조대장경>이다. 처음에는 개성의 흥왕사 대장전에 보관하였다가 후에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옮겨 보관하던 중 1232년(고종 19)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현재 전하는 <초조대장경>의 인출본은 국내에 400여 권, 일본 남선사에 1,800여 권, 대마도에 600여 권이 전하고 있다.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외침 등에 대응하여 진병대장경으로 만들어져 이규보가 찬한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도 나타나 있듯이 대장경 판각에 의한 불력으로 타개하고자 하였다. 즉, 현종 2년(1011) 무렵 <초조대장경>의 판각은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나라에 선양하고자 함과 동시에, 신앙으로 당시 당면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발원에서 착수된 것이다.

초조본의 판각에는 주로 송본이 밑바탕이 되었으나, <거란대장경> 역시 적지 않게 편입되었다. 거란본은 요의 경복년간(1031)에 착수되어 중희 23년(1054)무렵까지 대체로 완성을 본 것인데, 고려는 이를 문종 17년(1063) 3월에 도입하여 추가간행을 진행하였다.

2. <교장(敎藏)>

고려 <제종교장> 인경본.

<교장총록(敎藏總錄)>은 고려의 승려인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편찬한 불교 장소(章疏)의 목록을 수록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목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며, 각권의 내제(內題)에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現行錄)’이라 하였고, 약칭으로는 ‘의천목록(義天目錄)’ 또는 ‘의천록(義天錄)’이라 하였다. <교장총록>은 인도·중국을 통하여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의 정본(正本) 이외의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편찬한 것이다.

고려 문종(文宗) 27년 ‘대세자집교장발원소(大世子集敎藏發願疏)’를 지은 이후 선종(宣宗) 7년 8월까지 25년간 장구한 시간을 두고 국내는 물론 송(宋)·요(遼)·일본 등지에까지 산재한 주석서를 최대한으로 수집한 것이다. 체제 중 상권은 경의 장소 561부(部) 2,586권, 중권은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687권을 수록하고 있으며, 모두 1,010부 4,740권이다.

<신편제종교장총록>(고산사본) 제2책.

그 교장의 간행은 의천과, 입송하기 전부터 그의 장소 수집 간행에 대한 간절한 홍원을 돕기 위해 혜덕왕사 등이 추진하였다.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었고 혜덕은 금산사 광교원에도 판각시설을 갖추고 선종 즉위년(1083)부터 숙종 2년(1097)까지 32부 353권을 간행하였다. 교장의 대부분이 수·당 시대를 전후한 중국 학문승들의 것이며 신라와 고려 학문승들의 것을 포함한 동양 학문승들의 장소를 최초로 집성하여 간행을 하고자 편찬된 목록이다.

경부는 모두 대승경의 장소만 수록되어 있고, 율부는 대·소승률의 장소가, 논부에는 대·소승론과 그리고 삼론종·법상종·천태종·화엄종·정토종 계통의 제종 장소와 기타가 수록되어 있다. 기타는 목록·음의·승사·전기류 등이다.

3.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재조대장경 반야심경> 목판(해인사판).
초조ㆍ재조대장경 인경본.

고려시대는 국초부터 거란족과 여진족의 외침에 이어 고종 때에는 몽고족이 침략하여 끊임없이 외침에 시달렸다. 고종 18년(1231)에 몽고군이 국도 송도에 육박해 오자 하는 수 없이 조정은 그 다음 해인 19년(1232) 강화로 피난하여 임시 수도로 삼고 외침에 대항하였다. 그때 <초조대장경판>은 대구 부근의 부인사에 간직되어 있었으나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의 침략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현종이 호국과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조성한 나라의 큰 보배가 일시에 소실됨으로 인해 받은 충격은 컸으며, 그 외침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대장경을 조조하여 불력의 수호를 비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 생각했다. 또한 국가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새 대장경을 새길 계획을 세워 거국적으로 발원하였다. 이러한 대장경 조판작업에는 불교계의 협조가 중요하였으므로 법상종과 화엄종 계통이 당시의 대장경 조조사업에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마침 현종 때 초조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간 과거의 예를 보아 정성껏 대장경을 간행하면 포악한 몽고군도 물러갈 것이라는 바람과 민심의 수습과 일체감의 강조를 위하여 <진병대장경(鎭兵大藏經)>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난중의 어려운 역경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다시 새길 것을 결행하여 완성시킨 것이 곧 재조대장경이며 현재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밀교대장(密敎大藏)>과 <사본대장경(寫本大藏經)>

고려에서는 목판으로 새긴 대장경외에도 실담자를 중심으로 한 밀교대장경 130권을 만들어 조선 초기까지 왕실을 중심으로 보존되었다. 또 왕실에서 발원한 금자, 은자 대장경도 사경원(寫經院)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그 체제는 간본대장경과 같이 함차순 표시와 1행 14자의 형식 외에 국왕발원임을 권말에 부기하였고 필사자도 함께 기록하였다.

Ⅳ. 일본의 대장경

일본 남선사 수장고 법보전.

일본의 대장경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전래됐다. 이후 중국과 한국의 목판본 대장경에 영향을 받아 에도시대의 <종존판(宗存版)>, <천해판(天海版)>과 <황벽판(黃蘗版)> 등으로 전개되었다. 이 대장경들은 17세기에 제작되었으며 중국의 대장경과 같은 목판본 한역대장경과 천태사문 종존에 의하여 목활자로 조판된 두 종의 대장경도 조성되었다. 그 중 <종존판>은 <고려대장경>의 형식을 모방하여 판식이나 간기부분을 유사하게 하였으나 전체를 갖추지 못했고 <천해판>에 이르러서는 목활자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후 철안(鐵眼)에 의한 <황벽판>이 중국의 <만력판>을 번각하여 그 판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는 <축쇄장경본(縮刷藏經本)>, <만자장본(卍字藏本)>, <속만자장본(續卍字藏本)>과 고려판을 바탕으로 교정과 집적을 이룬 <대정신수장경본(大正新修藏經本)>이 있다.

일본 평안시대 와제불경(기와불전).

이 중 <속만자장본>은 <만자장경>을 이어서 보완한 대장경이다. 구성은 모두 10부문으로, 인도 찬술과 중국 찬술 총 1,660부 6,957권이 수록되었다. 주로 중국의 찬술서를 수록한 중국불교 총서이다.

Ⅴ. 티베트대장경과 남전대장경 및 기타

티벳 만다라 인경본.

1. 티베트대장경

티베트어로 번역된 대장경이며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이라고도 한다. 티베트에서 불교가 정착하고 불경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목판본 불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에 의하여 간행된 것으로는 나르탕판(sNartha 1732년), 델게판(sDedge 1733년), 쪼네판(Cone 1773년), 라싸판(lHasa 1773년), 리탕판(Litha 1773년) 등이며 그밖에 명대에 제작된 영락판(永樂版)과 청대 제작된 강희판(康熙版), 건륭판(乾隆版) 등이 있다.

티베트대장경은 칸규르(Bkah-hgyur, 甘殊爾)와 텐규르(Bstan-hgyur, 丹殊爾)로 나뉘어지는데 칸규르는 불어부(佛語部)란 뜻으로 경·율장(經·律藏)이 이에 해당하고 텐규르는 논소부(論疏部)라는 뜻으로 논장(論藏)이 이에 해당한다.

태국 금동판 불경.
인도 팔리어 패엽경.

2.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남전대장경은 팔리어로 쓰인 불경의 총칭이다. 팔리(Pali)에는 성전이라는 뜻도 있어서, ‘팔리’라는 말 자체가 팔리 삼장[tipiṭaka]을 의미하기도 한다. 팔리 문헌은 팔리, 즉 삼장과 앗타까타(aṭṭhakathā)로 분류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65권 7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팔리어는 본래 서부 인도의 평민계층에서 쓰던 속어(俗語)이다. 부처는 상류계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梵語)가 아니라 이 평민계층의 언어인 팔리어로 설법하였다고 전한다. 부처의 입멸(入滅) 후 원시불교의 교단이 서부 인도로 확대됨에 따라 성전 기록용 언어가 되었다.

이러한 대장경이외에도 몽골대장경(蒙古大藏經)과 미얀마대장경 등이 있다.

Ⅵ. 결론

이상과 같이 대장경은 시대별, 문자별, 국가별, 간행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자별로는 팔리어대장경, 티베트대장경, 한문대장경, 한글대장경 등으로 구분하고 체제별로는 개보판대장경, 금장, 고려대장경 등의 14자 체재와 이후 중국에서 간행된 17자 체제, 15~18자의 거란대장경 등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간행 재료별로는 목판대장경, 목활자대장경, 금·은자대장경, 필사대장경으로 구분가능 하며 이 밖에도 시대와 국가별 대장경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동북아의 대장경들은 초기에 결집된 이후 수정, 증보가 계속해서 이루어져 왔다. 우리 고려의 <초조대장경>은 전래된 <개보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하여 11세기 후반 거란대장경과 송판 추가본을 받아들여 내용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이 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고자 하여 <진병대장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의천 대각국사에 의하여 대장경의 주석서인 <교장>이 수집되어 흥왕사 교장도감에서 주석서를 간행하게 되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짐으로 고려 고종은 13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재조대장경>을 다시 추진하였다. 강화도의 선원사의 대장도감을 두고 남해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재조대장경>을 판각하였다. 최근 밝혀진 사실로 계령(김천)에도 분사대장도감이 존재하였다. 이때 대장경의 수집과 내용에 대한 철저한 교정은 수기법사가 맡았으며 후대의 다른 대장경을 만드는데 있어 표준이 되었다.

그 밖에 왕실에서 <밀교대장>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130권을 유통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대장경은 고려 말 이후 조선 중기까지 끊임없이 일본에서 대장경을 요청해와 많은 인본들이 일본으로 보내져 오늘날까지 일본의 사찰과 도서관 등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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