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판적인 순응주의는
탈인간화 부추기는 요인
해법은 부처님 가르침에

나는 최근 영화 <박하사탕>을 처음으로 봤다. 영화가 나온 지 어언 17년이나 되고, 그 사이에 이미 한국 영화사의 고전이 됐는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보지 않아왔다. 결국 보지 않음으로써 여태까지 손해를 본 것은 나다. 이 영화는, 사회와 인생 등에 대해서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많은 부분들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의 첫사랑의 말대로 ‘착한 손’을 가진 남자 주인공인 영호. 그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군대에 가라 하니 군대에 가고, 광주 시민들을 진압하라 하니 진압군의 일원으로서 5월의 광주에 들어가 뜻 아니게 살인자가 된다. 고참들이 때리는 대로 그냥 맞고 산다. 한데 제대 이후 본인이 경찰서 형사가 되어 남을 때릴 순서가 됐다.

이젠 단순 구타도 아니고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이다. ‘착한 손’은 독재국가의 흉기로 화하고, ‘선량한 국민’ 영호의 내면은 파괴되고 병들어간다. 첫사랑은 따돌려지고, 결국 이루게 된 가정은 파탄되고 이윽고 영호 개인도 자살이라는 형태로 최종의 파산을 맞는다.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지만, 그가 돌아갈 수 있는 그 종전의 자아는 이미 가고 없다. 국가의 말을 듣고 순응주의적으로 살아온 그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쌓아온 업은, 그를 죽이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이 영화가 나올 때쯤에 출간된, 법정 스님이 번역한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한 유명한 구절을 떠올렸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고, 살아 있는 그 어느 것도 괴롭히지 말며,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리고 인간을 궁극적으로 죽이게끔 만드는 순응주의에 대한 해독제가 초기불교의 가르침 속에 분명히 포함돼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불교의 핵심인 ‘깨달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함유한다.

존재론적으로는 ‘깨달음’이란 ‘나’나 세상만사가 변화무쌍의 오온가합(五蘊假合)이라는 상관관계의 총화에 불과하여 그 어떤 자성이나 실체가 없다는 점을 터득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통상적인 사고상 ‘나’를 뜯어 맞추어야 할 세상이라는 건 사실 환상일 뿐이다. 인식론적으로 깨달음이란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가 어디까지나 의식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像)’이라는 걸 이해했단 이야기다. 마음이 달라지는 순간 이 상(像)도 달라진다. 깨달은 이에게는 과연 이 무지막지한 ‘국가’란 개인이 무조건 항복하여 밑으로 들어가야 할 대상으로만 보일 것인가? 그리고 사회적으로 깨달음은 그 주체의 자율화를 뜻한다. 깨달은 이는 자타의 업을 바로 볼 줄 알고 그 아무리 ‘힘센’ 조직이라 해도 악업을 짓게끔 하는 조직의 명령을 거부한다. 깨달은 이는 과연 삼성과 같은 기업에 들어가서 노동자 백혈병 발병의 확률이 높은 공정을 한 마디 저항없이 관리할 것인가? 그렇게 하기에는, 남을 죽이게 하는 그 순간 그 자신도 파탄과 죽음을 향해 떠나게 된다는 점을 그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결국 〈박하사탕〉이 나에게 들려준 메시지는,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자유야말로 ‘나’를 순응주의의 치명적 위협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친 저항도 각종 윤리적 딜레마들을 수반하겠지만, 무비판적 순응주의만큼 인간을 탈인간화시키는 기제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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