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도량에 핀 연꽃(262호)

"큰스님, 세배 받으세요!"

정초, 10만 신도 구인사 참배

설(음력 1월 1일)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다. 이날 아침 행하는 ‘세배(歲拜)’는 집안 어른들께 올리는 새해의 첫 인사다. 세배는 친족 간에 이루어지는 의례이지만, 세배 문화를 신앙과 접목해 독특한 전통을 확립해 나가는 종단이 있다. 바로 대한불교천태종의 정초 참배다.

설날부터 보름까지
전국에서 모여드는 참배객
큰스님께 세배

3대 지표 중 생활불교
불교의례와 세간 풍습을 엮는
신앙의 실천

설을 전후해 전국의 도로는 귀성·귀경 인파로 넘쳐난다. 이 기간 사찰은 오히려 한적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단 한 곳, 천태종의 총본산 구인사만은 예외다. 구인사 입구에 위치한 드넓은 주차장은 전국에서 몰려든 버스와 승용차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주차공간이 부족해 인근 도로에 일렬주차한 모습도 장관이다. 정초를 맞아 구인사를 참배하고, 큰스님(종정예하)께 세배를 올리려는 신도들의 기나긴 행렬이다.

1990년 설날(1월 27일)을 맞아 대충대종사를 비롯한 종단 스님들이 적멸궁을 참배하고 있다.
삼보당에서는 하루 서너 차레 도용 종정예하께서 나오셔서 신도들로부터 단체 세배를 받는다. 신도들이 세배 후 덕담을 듣고 있다.

종정예하께 세배 올리고
도반 간에도 덕담 주고받아

천태종 신도들의 정초 참배는 설날 오후부터 시작한다. 사찰별로 참배를 희망하는 신도를 모아 단체로 구인사를 찾아오는데, 승용차를 이용한 가족단위 참배객과 구인사 입구까지 운행되는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신도들의 수도 적지 않다. 초닷새까지 3만여 명(버스만 500대 이상)이 줄을 잇고, 보름까지 7만여 명이 더 찾아와 매년 정초 참배를 하는 신도는 1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주말에 한꺼번에 몰리는 경우가 많아 총무원에서 사찰별로 참배일과 참배객수를 미리 정해 인원을 분산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정초 참배가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로 여성 신도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남성 신도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단정한 차림이다. 어린 자녀의 손을 붙잡은 이도 있고, 지역특산품을 선물로 준비한 이도 있다. 참배객들은 먼저 법당에서 부처님을 참배한 후 상월원각대조사가 모셔진 적멸궁이나 조사전을 참배한다. 이후 종정예하께 세배를 올리게 되는데, 참배인원이 많다보니 내빈과 사찰 간부에 한해 조실에서 세배를 받고, 일반 신도들은 하루 서너 차례 삼보당에서 단체로 세배를 올린다.

원로대덕 스님들께도 세배
주지스님들은 해당 사찰에서

“올 한 해, 수행 열심히 해서 부처님이 설하신 깊은 진리를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예. 스님도 올 한 해 건강하세요.”

“올해도 저희에게 좋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큰스님께 세배를 올린 신도들은 원로 스님들과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해 종의회의장·감사원장 스님을 찾아뵙고 새해 인사를 드리는데, 이때 주고받는 덕담이다. 각 처소 앞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신도들이 하루 종일 길게 늘어서 있다. 스님들은 미리 음료나 차를 준비하고, 사찰이나 단체에 맞춰 적절한 새해 덕담을 들려준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세뱃돈. 스님이 직접 나눠주는 봉투 안에는 한 해 동안 지침으로 삼을 만한 덕담 한 구절과 함께 새 돈으로 천원권이 두세 장 들어있다. 신도들은 이 세뱃돈을 복돈으로 여겨, 지갑 깊숙이 보관하기도 하고, 기부 등 좋은 일에 쓰기도 한다.

세배하는 신도들은 하루 시간을 내면 다녀가지만, 스님들은 보름 간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세배를 받아야 하다 보니 행복한 벌(?)이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까지는 총무원에서 소임을 보는 사찰 주지 스님들에게도 세배를 했는데, 몰려드는 참배객으로 종무행정이 차질을 빚으면서 해당 말사에서 세배를 받도록 지침을 내렸다. 구인사를 찾은 신도들 중에는 ‘떡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고, 4박5일 간 기도를 하는 경우도 많다.

1980년 중반까지 정초 참배를 온 천태종 신도들은 버스를 탄 채 영춘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려는 버스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구인사 창건 이후 이어진 전통
부처님·스님 새해 인사로 한해 시작

천태종의 구인사 정초 참배는 상월원각대조사께서 구인사를 창건한 이후 이어져오고 있는 천태종 고유의 풍습이다. 수많은 신도들이 구인사를 찾다보니 소임을 맡은 스님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설맞이 도량 대청소를 하고, 사찰별 참배 인원을 체크하며 조정한다. 세배 온 신도들의 점심공양을 준비하는 스님들은 음식이 남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사찰별로 공양 여부를 확인하기도 한다.

구인사 대중 스님들의 설날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다. 오전 5시 30분 큰스님과 함께 법당에서 부처님께 새해 인사를 올린 스님들은 이어 대조사전-한·중천태역대조사전을 참배한다. 다시 삼보당으로 돌아와 큰스님께 세배를 올리고, 대중 스님끼리 맞절을 하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아침공양은 떡국. 오전에는 입적한 스님들을 위한 다례를 올리고, 점심공양 후에 상월원각대조사님과 2대 남대충 대종사님의 적멸궁을 참배한다.

1980년대 후반 단양군 가곡면 보발재(고드너미재)가 개통하면서 영춘강을 건너는 버스 행렬이 크게 줄었다. 정초 참배를 온 버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신앙과 일상생활의 경계를 허물고
‘생활불교’의 참모습을 이루다

“염불은 모든 법 중의 제일이요, 효도는 백 가지 행의 으뜸이다. 효심이 곧 불심이며, 효행이 곧 불행(佛行)이다. 누구나 부처님과 같아지려면 반드시 부모에 효도해야 한다. 종색(宗色, 1009~1092) 스님은 ‘효지일자 중묘지문(孝之一字 衆妙之門)’이라 했고, 부처님 말씀에는 효로써 종(宗)을 삼았으며, 〈범망경〉에서는 효도로써 계를 삼는다고 했다.”

- 〈여산연종보감염불정인(廬山蓮宗寶鑑念佛正因)〉 권제1 ‘신행일감’ 중에서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고 했다. 출가수행을 권장하는 불교와는 괴리가 있는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불교는 위 인용문에서 보듯 어느 종교 못지않게 효를 중시한다. ‘설날 구인사 정초 참배’는 불교의 이 같은 효 사상과 선조들에 대한 공경을 부처님과 사찰, 스님과 도반으로까지 확대한 모범사례다. 신앙과 일상생활의 경계를 허문, 천태종 3대 지표의 하나인 ‘생활불교’의 실천을 보여주는 구인사 정초 참배는 천태종 종도들의 강력한 결집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지난해 설날을 맞아 정초 참배를 온 신도들이 총무원장 춘광 스님게 세배를 하고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린이 불자가 총무원장 춘광 스님께 세뱃돈을 받고 있다.
설날을 맞아 정초 참배를 온 신도들이 세배 후 스님의 덕담을 듣고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도들이 경내에서 한 비구니 스님을 만나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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