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에 담긴 불교 이야기(262호)

인왕산은 조선왕조의 수호산

인왕산(仁王山)은 종로구와 서대문구 사이에 있는 338m 높이의 험준한 바위산으로 경복궁 뒤편의 북악산(北岳山, 342m)과 어깨를 같이 하고 있다. 인왕산에는 청풍계(淸風溪)라는 계곡과 백운동천(白雲洞川)이 있으며, 여기서 발생한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水聲洞)과 옥류동(玉流洞)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성곽 안으로 가서는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동쪽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한다.

인왕산의 능선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남쪽으로 행촌동과 사직동이 있고 동쪽으로 필운동, 누상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으로 이어진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아 다양한 이름들이 지어져 있다.

선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데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 모자를 닮은 모자바위, 돼지를 닮은 돼지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가 있고, 남쪽 능선 정상에 있는 달팽이바위는 달팽이가 기어가는 형상으로 유명하다. 호랑이 굴이 있는 남쪽 능선에 호랑이바위, 정상부에 이르면 뾰족한 메부리바위가 있으며 삿갓모양의 삿갓바위가 인왕산 정상이다. 그외 치마바위, 해골바위, 기차바위, 부처님바위 등이 있다.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인왕산은 북악산, 남산(南山, 265m) 그리고 혜화역 동쪽의 낙산(駱山, 125m)과 함께 한양도성을 들러 싼 내사산(內四山)으로 불렸다. 한성의 주산(主山)인 북악산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여 ‘호랑이 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왕산’의 본래 이름은 서산(西山), 혹은 서봉(西峰)이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4년 2월 조(條)에 보면 ‘태조는 서봉 아래에 행차하여 사직단(社稷壇) 축조를 지켜보았다.(上 幸西峰下 觀築社稷壇)’라고 하는 구절에서 ‘서봉’이 등장한다. 또 4년 윤9월 조에는 ‘서산에 행차하여(幸西山)’라고 하여 ‘서산’으로도 불리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태조실록』 6년 6월 조와, 7년 정월 조에 ‘태조가 인왕사(仁王寺)에 행차하여’라는 구절이 처음으로 나타나, ‘인왕사’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전해준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의종(毅宗) 22년 3월 조에 ‘왕이 인왕사에 행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인왕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본래 개성에 있었고, 새로이 한양의 서산 즉 인왕산에 나타난 동명의 사찰은 이태조가 천도 후 세운 새로운 사찰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인왕사’가 세워져 ‘서산’은 ‘인왕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이 기록은 세종실록 15년 7월 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8년 4월 조에서 ‘인왕산은 이전에 인왕사가 있는 고로 이름 하였다.(山 舊有仁王寺 故名)’라는 기록이 있어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이외에도 인왕산에는 복세암(福世庵)·금강굴(金剛屈) 등 수많은 사찰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서 불교적 성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마침내 연산군의 폭정하에서는 이 사찰들이 경복궁의 맥(脈)을 누르는 ‘임압(臨壓) 사찰’이라 하여 인왕사 등 10개의 사찰이 폐사되는 운명을 맞이한다(燕山君日記 9年 條).

이러한 인왕역사에 담긴 이유로 일제강점기에는 인왕산의 표기를 별 뜻이 없는 ‘仁旺’이라 하였다가, 1995년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청와대를 경호하는 군사적인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호국불교의 상징, 금강역사

인왕(仁王)은 ‘인왕역사(仁王力士)’를 말하며 통칭 ‘금강역사(金剛力士)로 불린다. 몸은 하나에 두 이름을 지녀서 이왕(二王)·이천왕(二天王) 이라고도 하며, 경전에서는 금강수(金剛手)·금강밀적천(金剛密迹天)·집금강신(執金剛神)·금강신(金剛神)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한다. 큰 절에는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인왕문 또는 금강문이라는 문을 만들어놓기도 하는데 여기에 안치된 상이 인왕역사 또는 금강역사이다.

금강역사란 금강저(金剛杵)를 손에 들고 있는 신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금강저란 불교에서 수행승들이 불도를 닦을 때 쓰는 도구인 방망이를 말하는데, 원래는 고대 인도의 강력한 무기이다. 이들 금강역사는 어떠한 무기로도 당할 수 없는 이 금강저를 손에 들고 부처가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 불법을 수호한다.

〈오분율(五分律)〉이라는 경전에는 모든 부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500의 금강신이 있어 좌우에서 부처님을 호위하며 모시고 있다고 하여 금강역사가 부처의 수호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80화엄경에는 여러 이름의 집금강신들이 나열되는데, 이들 모두 부처를 바로 곁에서 공양하고 성불하기를 발원하였다.

인왕역사에서 비롯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은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이라고도 하는데, 호국의 불경으로 신라와 고려에서는 이 경의 정해진 바에 따라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 등을 열고 호국의 정성을 길렀다. 이 경의 내용은 16대국의 왕들이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케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묻자, 부처님이 그 물음에 답하여 설법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성계는 한성을 둘러싼 서산을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상징인 인왕역사가 계신 곳이라는 믿음을 갖고,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이 한양의 주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신들은 정도전이 내세운 북악산을 받들어 한성의 주산으로 삼았다.

이에 무학대사가 탄식하였다.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내 말을 생각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은 가장 핵심의 터인 청와대가 있는 자리는 신이 머무는 곳으로 사람이 감히 범접하면 좋지 않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 말을 들어 경복궁 터를 이곳에서 피했지만, 일제시대에는 민족의 기를 끊어버리겠다며 이곳에 총독 관사를 세웠다. 그러나 총독 관저에 머물렀던 일본인이나 그 후 그곳에 머무른 대한민국의 여덟 명의 대통령은 그 말로가 좋지 않았다.

만약 무학대사의 말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을 향하여 궁터를 잡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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