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문(262호)

야야포불면  夜夜胞佛眠
조조환공기  朝朝還共起
기좌진상수  起坐鎭相隨
어묵동거지  語默同居止

밤마다 부처를 품고 자다가
아침이면 함께 일어난다.
앉으나 서나 서로 붙어 다니며
말을 하건 안 하건 같이 머물러 산다.

요즘 포대화상(布袋和尙, ? ~ 917)을 조성해 모시는 사찰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찰들이 전각 밖에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웃는 입이 커다란 포대화상의 상을 모시는데 불자들은 물론이고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좋다고 한다. 포대화상에게서는 친근함과 인간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포대화상이 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이므로 그에게 경배하며 복을 나누어 받고 싶은 심리도 있을 것이다.

포대화상은 당나라 말기에 실존했던 스님으로 본명은 계차(契此)다. 뚱뚱한 몸에 늘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녀서 포대화상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 자루 안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 있었는데 필요한 사람에게는 꺼내어 나누어 주었고 또 사람들이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서 담았다. 그러나 돈은 절대로 받지 않고 돌려주었다 한다.

특히 아이들이 스님을 좋아하여 마을에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가 스님의 등이며 어깨를 올라타고 과자 등을 얻어먹기도 했다니 그 풍경을 상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스님이 나막신을 신고 나타나면 얼마 뒤에 비가 내리고, 짚신을 신고 나타나면 비가 그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님의 신발을 보고 날씨를 짐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하자면 포대화상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민중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두타 수행자였다. 포대화상을 미륵보살의 화신이라고 믿기도 하는데, 그의 삶이 미륵불처럼 중생의 희로애락과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

포대화상의 삶은 지극히 파격적인 것이지만 그 본질은 무엇보다 숭엄한 부처의 길이었다. 밤마다 부처를 품고 잠들고 아침에는 함께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부처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본래진면목을 깨우쳐 알고 그 진면목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모든 수행자들의 목표다. ‘깨우쳐 부처가 되겠다’는 것을 뛰어넘어 ‘깨우쳐 부처로 살겠다’는 서원을 실천한 것이다.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이 다 부처의 행위로 계합되어 부처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그런 그의 행적이 민간의 일화로 전해졌고 불교의 한 신앙형태로 전승되어 오늘날에는 그의 상을 모시는 사찰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포대화상이 복을 주는 분이라는 것에 집착하느라 진면목을 깨친 수행자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생과 부처를 둘로 보지 않은 안목 높은 수행자였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정신을 아낌없이 실천했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시들이 그의 열린 마음자리를 보여준다. 앞에 보인 시는 그가 남긴 임종게의 첫 수다. 임종게는 모두 5수로 이루어졌는데, 민간에는 더러 순서가 맞지 않게 유포되기도 하지만 걸림 없이 살다간 포대화상의 참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포대화상을 좌상이나 입상으로 조성해 모시는 것은 그의 걸림 없는 삶과 무한한 나눔의 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지, 그 앞에 절하여 복을 받자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찰에 모져진 포대화상 좌상은 배꼽에 새까맣게 손때가 묻어 있다. 그 배꼽을 문지르면 복을 받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복을 비는 마음이야 간절하고 애틋하지만, 구복과 기복이 본질을 앞서거나 왜곡시키는 것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금의 중생들 마음을 포대화상도 이미 짐작했던 것일까? 그의 임종게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미륵진미륵  彌勒眞彌勒
분신백천억  分身千百億
시시시시인  時時示時人
시인자불식  時人自不識

미륵이여 참 미륵이여
천백 억의 몸으로 나투어 앉으나
때때로 세속 사람들에게 보이나
세속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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