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기도수행’ 했다 (262호)

기도가 생활이었던 어린 시절

나의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작은 불단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조각이 화려한 장롱 한 칸 정도의 크기였다. 부모님이 이곳에 촛불과 향을 켜고, 매일 독경과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이렇게 향냄새와 독경 소리는 자연스레 나에게 훈습되어 왔다.

성년이 되어 군종법사 시절 최전방에 근무할 적에 정기적인 법회 외에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것은 백일기도였다. 소위 사분정근(四分精勤)으로 새벽예불 기도와 사시(巳時) 기도 그리고 오후 2시 기도, 저녁 예불 기도 등 하루 4번에 걸친 기도를 동참한 신도들과 함께 열심히 하며 자신의 신심을 다져갔다.

물론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기도에 대한 신심이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기도가 보편적이었다. 대학시절 겨울 방학 때 백양사 산내 암자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어느 젊은 스님이 삼칠일 동안 밤새도록 기도를 하고 아침 공양 때 쉰 목소리로 기도 중의 신비한 체험을 들려주곤 하였다. 또한 큰 불사를 앞두고 있는 스님들은 반드시 먼저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고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으려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행의 밑바탕에 진솔한 신심이 깔려있었다고 생각된다.

역경 속에서 빛나는 기도와 가피 그리고 참회

짧은 인생이라는데 그 삶의 여정이 결코 순탄치 만은 않다. 누구나 다 나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기도는 그 녹록치 않은 삶과 함께 한다. 부처님의 자비에 매달리는 길 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기도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꽉 막힌 상황,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다급한 경우에 기도는 더욱 절실해진다. 부끄럽지만 중생이기에 어쩔 수 없다. 열심히 빌었다. 한번은 기도하다 잠간 잠이 들었는데, 줄무늬의 빛깔도 선명한 큰 호랑이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집에 들어와 우리가 제공하는 먹이를 먹고 사라졌는데, 꿈을 깨고 나니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일이 잘 해결되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생각지도 않게 일이 잘 풀리어 마음의 큰 짐을 덜게 되었다.

〈법화경〉 「법사품」제 10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생각으로

칼·몽둥이·기와조각·돌 따위로 해치려 하면

곧 조화로 만든 사람을 보내어

법사를 호위할 것이니라.

若人欲加惡 刀杖及瓦石

則遣變化人 爲之作衛護

는 대목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독송하였는데 감응도교(感應道交)가 이루어진 것임을 느꼈다.

기도하면 늘 기쁨이 생겨난다. 기쁨은 온몸의 떨림으로 바뀌고 새로운 힘이 솟는 느낌이다. 그 다음 단계는 고요한 삼매의 경지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기도를 하면 초연해 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경전을 암송하고 그 뜻을 음미하며 불보살님의 명호를 염하는 가운데 자신은 언제나 부처님 은혜 속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마음속에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기고 기적적으로 어려움을 피한 경우도 있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하지는 못하지만 참으로 신묘한 가피를 체험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살아있는 것도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신심에 비하면 과분한 가피라고 늘 생각하며 감사와 함께 죄송한 마음뿐이다. 부처님께 많은 빚을 진 것 같다. 이 큰 은혜를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다.

이러한 마음은 자연히 참회로 이어진다. 깊고 오묘한 인연의 법칙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였던 지난날의 나의 모습은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기도의 근본은 참회라고 생각한다. 불자로서 온전하게 살지 못한 죄는 그만두고라도 나이가 들수록 젊은 날을 되돌아보면 수많은 회한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너희도 늙어 보면 안다.’는 말이 있듯, 노인의 고독과 질병 등의 고통을 젊은 나이에 깊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돌아보면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으며, 모두가 어리석었던 자신을 책망하게 한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나에게 깊은 은혜를 베풀어 준 모든 이들에게 끝없는 참회의 마음을 바치면서 불보살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도록 두 손을 모으는 기도를 올리며 용서를 빈다.

나는 바르게 기도하고 있나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 속에 기도는 이어진다. 〈법화경〉 「요품(要品)」의 독송과 정근 등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기도 속에는 물론 작은 소망을 빌게 되는데 어떤 바람이 바른 것인가를 늘 반성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가만히 생각하여 볼 때 탐심의 발로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소위 ‘∼을 해 주십시오’하는 기도의 경우이다. 소박한 바람을 탓할 수는 없지만 반성해 보면 대개의 경우 탐·진·치 삼독 번뇌의 이기적 욕망의 소산임을 알게 된다.

기도 속에도 중생의 어리석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근본적으로 욕망[貪心]에 기초하기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 원망하는 마음[瞋心]을 갖게 되며 바른 인과를 무시하는 마음[癡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기도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선의(善意)의 마음이라도 사실은 욕망을 보기 좋게 다듬어 놓은 것에 불과한, 그것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다.

허망하기만 한 ‘욕망형’ 기도에서 ‘발원형’ 기도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의지 또는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의 기도가 모든 중생을 위하고 성불의 길로 나아가는 서원으로 승화 될 때까지 성숙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심에서 출발한 기도, 성불로 향해

기도는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교만한 사람이라도 기도를 하면 겸손해진다. 그만큼 기도는 쉽지 않은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보살님께 목숨 바쳐 의지하는 마음, 곧 ‘지심귀명례’는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어떤 것도 그 믿음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별것도 아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벌컥 일어난 성질을 부리며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지극한 신심을 가슴에 간직한 사람은 그 무엇도 불심과 바꿀 수는 없기에 모든 세속적 가치들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바다 같은 넓은 마음의 평정을 누리며[安心似海], 대지와 같이 남의 허물을 덮어 주고[用心如土], 태산 같은 마음의 큰 뜻을 세울[立志如山] 수 있다.

기도하려면 먼저 시간을 내야 하고 기도 중에 일어나는 치열한 번뇌와 싸워야 한다. 기도하지 못할 이유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은 유혹을 이겨내야 하고 갖가지 마음속 번뇌를 떨쳐야 한다. 기도 중에는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의 마음은 번뇌 망상을 따라 멀리 멀리 도망을 간다. 늘 이러한 것을 경험하기에 스스로 마음을 붙잡아 두는 수행이 바로 기도이기도 하다. 결국 기도는 스스로를 이겨야 하는 일이기에 평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져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다른 사람들에게 진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며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일이다. 이러한 능력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도를 통하여 길러진다.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가장 낮출 수 있는 마음은 평소 꾸준한 기도에서 생겨난다. 진정한 하심수행은 기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은 낮게 갖지만 가야 할 길은 멀다. 수행자에게 공부는 그것이 참선이든 염불이든 간경(看經)이든 오로지 성불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기도도 결국은 공부로 이어져야 한다. 무엇인가를 빈다는 의미의 기도가 깨달음으로 회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고 쌓아놓으려는 기도에서 한없이 내려놓고 내려놓는 기도, 허망한 자아의식으로 쳐놓은 아상(我相)의 벽들을 허물고 벗어나 무한한 광명의 세계와 하나 되는 기도가 된다면, 바로 수행이요 공부의 기도라 생각된다.

상월원각대조사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 가운데 진정한 공부인을 구별하여 엄하게 지도하셨다고 한다. 이는 기도가 단순한 기도의 경계를 넘어 수행의 단계로 들어가야 함을 뜻한다고 본다. 소구소망의 성취나 안심입명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해탈 열반의 길을 향해 결국은 성불의 길을 가는 공부로서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구하고 갈망하는 중생심에서 벗어나 다 내려놓고 내려놓아 참 불자의 면목을 회복하는 그 날까지 나의 기도는 쉬지 않을 것이다.

 

고우익

천태종 금강승가대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육군 군종법사, 조계종 종립학교 교법사 및 전국 교법사단 단장, 대한불교진흥원 다보사·다보수련원 상임법사를 역임했다. 저서 및 논문으로는 〈발원문선집〉, 〈중·고등학교 ‘종교[불교]’〉교과서(불교교육연합회, 공동집필), 〈불자생활가례의범〉, 〈부처님만남은 기쁨이어라〉, 〈법화삼부경 강설〉, 〈십선계의 고찰〉, 〈상월원각대조사 신이세계〉, 〈천태종 출가자의 일상행의와 제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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