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262호)

계절은 멈추지 않아 어느새 얼음장 밑에서 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끄러운 세상이라고 봄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니 엄동추위의 끄트머리에서 버들강아지가 그 고운 솜털을 내밀 것이다. 하루하루 해가 뜨고 별이 뜨는 것도, 철을 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는 것도 모두가 다 우주의 호흡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도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 것이고, 잎이 돋아 낙엽으로 떨어지는 그 시간에 뭇 중생의 생멸이 함께 한다.

이렇게 부지런한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계의 모든 행은 유한하다. 그렇지만 그 유한 속에 공성(空性)이 있음을 보고 인과의 굴레에서 진리의 실상을 알아차리는 지혜를 기르는 것이 불자의 수행이고 정진이다.

어느 날 승가라(僧迦羅)라는 청년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부처님, 착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치 달과 같다.”
“그렇다면 착한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치 달과 같다.”

<잡아함>의 ‘승가라경’에 나오는 이 대화는 마치 중국 선사들의 선문답 같다. 부처님은 왜 착한 사람도 착하지 않은 사람도 똑같이 ‘달과 같다’고 하셨을까? 달이 보름을 기준으로 차 오르기도 하고 다시 이지러지기도 하는 점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즉 착하지 않은 사람의 행업(行業)은 보름이 지난 뒤의 달처럼 점점 줄어들면서 빛을 잃는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 없는 행동을 하면 보름이 지난 뒤의 달처럼 공덕이 줄어들고 복이 줄어들고 관계하는 모든 것이 줄어든다. 생각도 행동도 모두 소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착한 사람의 업은 기울었던 달이 차오르는 것과 같다. 공덕을 쌓고 수행을 잘 하고 기도 정진을 잘 하는 사람의 복덕은 보름을 향해 날마다 커져가는 달과 같다. 날마다 달이 커지듯이 착한 행동과 생각으로 성불의 인연을 길러 나가는 것이다.

중국의 어느 사찰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고 한다. “아름드리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천리길도 첫걸음에서 시작하네. 사람 몸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우나니, 좋은 때는 쉽게 흘러가지만 그걸 알고 살아가긴 어렵네. 푸른 바다는 수많은 강을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고, 거울은 만물을 다 담아도 남음이 있으니 매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네.”

불자다운 삶은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나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털어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 대해 묻는 청년에게 바른 믿음과 청정한 계행, 늘 공부하는 구도행과 남에게 베푸는 보시행이 차오르는 달과 같은 삶의 길임을 강조하셨다.

항상 보름달을 품고 사는 삶도 있고, 이지러지는 달처럼 기울어 가는 삶도 있으며,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점점 둥글게 자라는 삶도 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인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이 발산하는 밝기를 측정해야 한다. 나를 향해 혹은 이웃을 향해 얼마나 밝은 빛이 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조선 중기에 귀봉 송익필(龜峯 宋翼弼, 1534~1599)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자연을 벗하며 안빈낙도를 즐기던 그는 학문이 매우 깊었고 글을 잘 써서 ‘8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했다. 그가 남긴 시 가운데 ‘망월(望月)’이 있다.

‘둥글지 않을 땐 더디게 차오름을 탓하건만(未圓常恨就圓遲)/ 둥근 후에는 어찌해 쉬이 이지러지는가.(圓後如何易就虧)/ 한 달 중 둥근 날은 하루 밤 일지니(三十日中圓一夜)/ 백년의 심사가 다 이 같을 뿐이라오.(百年心事摠如斯)’

자연에 묻혀 살던 선비는 한 달 가운데 보름달이 하루밖에 뜨지 않는다는 것을 두고 인간의 삶 또한 그런 것이라고 읊었다. 과연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만 뜨는가? 이제 곧 정월 대보름 달이 뜰 것이다. 그 환한 달을 보며 자신은 과연 어떤 달인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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