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나는 국토순례 (262호)

영광 법성포.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약 1,500년 간 숨겼던 몸을 드러내 세상을 놀라게 한 ‘백제금동대향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

백제인들이 지극한 불심(佛心)으로 돌과 금속, 나무 등 온갖 재료를 마치 떡 주무르듯 자유자재로 깎고 자르고 다듬어 이룩해 놓은 불교문화유산은 한국을 넘어 세계의 유산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느끼는 찬란한 백제불교문화를 태동시킨 곳, 영광 법성포다. 백제의 불교는 일본에 전해져 일본불교와 문화융성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백제불교의 뿌리 법성포와 이를 품은 영광의 진면목을 찾아 떠났다.

백제불교는 마라난타 스님이 법성포를 거쳐 백제 땅에 들어온 뒤 창건한 불갑사에서 첫 꽃을 피우고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간다. 특히 영광 지역에는 불갑사·연흥사 등 고찰과 불교문화재와 유적, 그리고 불교와 민간 신앙이 결합된 미륵신앙이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울러 지역의 방어요새였던 법성진성과 정유재란 때 정절을 지킨 열부순절지(烈婦殉節地:전남도기념물 23호) 등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손꼽힌다.

영광에는 80여 곳의 사찰 터 등 불교유산과 문화유적이 많아 짧은 일정 안에 모두 둘러본다는 건 불가능하다. 영광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으로는 불갑사(佛甲寺)·연흥사(烟興寺)·설매리(雪梅里) 석조불두상·사기봉 마애불·신천리 삼층석탑·단주리 당간지주·월평사지 석탑·입암리 매향비·연성리 돌미륵 등이 있다. 근래에 영광군이 심혈을 기울여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마라난타사를 조성했다.

백수해안도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드넓게 펼쳐진 푸른 영광 앞바다를 감사할 수 있는 명소. 밀려오는 물보라 무리가 오래된 그림 속에 갇혀 있다가 방금 튀어나온 듯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인도 승려 마라난타, 백제 땅을 밟다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마라난타상. 동진에서 배를 타고 불교를 전래코자 백제 땅에 발을 디딘 인도출신의 마라난타 스님의 상이 사면대불에 새겨져 있다.

고구려·백제·신라는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국민을 통합하고 삼국통일의 꿈을 키우지만, 패권은 당나라의 힘을 빌린 신라가 차지한다. 삼국통일의 염원을 이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이룩해 놓은 불교문화유산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흡수, 발전시켜 나간다.

신라문화의 한 축이 된 백제의 불교문화는 384년 마라난타 스님이 법성포를 통해 백제 땅을 밟으면서 시작됐다. 마라난타 스님의 백제 입국과 인물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에 전한다.

‘…칠월에 사신을 진(晋)으로 파견해 조공(朝貢)했다. 구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으로부터 이르렀음으로 왕은 이를 맞아 궁 내에서 의례로써 공경하였는데, 불법(佛法)이 이로부터 시작됐다.’

- 〈삼국사기〉 권 제24 ‘백제본기 제2 침류왕(枕流王)’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甲申)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서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乙酉)에 새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 열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佛法)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이 즉위한 대원 17년 2월에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福)을 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는 번역해서 동학(童學)이라고 한다.’

- 〈삼국유사〉 제3권 홍법 제3 난타벽제(難陀闢濟)

마라난타는 인도 출신 승려이다. 그는 신통력을 가진 자로, 수행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스님은 불교를 전하는데 뜻을 두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교화하였으므로, 한 곳에 머무르는 경우가 없었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원래 인도의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한곳에 정착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는 수많은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인연이 닿는 곳이면 그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 〈해동고승전〉 권제1 마라난타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배를 타고 내디딘 백제 땅은 영광 칠산 앞바다였다. 지금의 법성포는 마라난타 스님이 가슴에 아미타불을 안고 내렸다고 해서 지명이 ‘아무포(阿無浦)’로 불렸다고 전한다. 또 마라난타 스님이 아미타불이 머무는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정토신앙을 전래했다는 이유로 ‘아무포’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아무포는 고려시대에 ‘불법이 널리 퍼졌다’는 의미의 ‘부용포(芙蓉浦)’로 불렸다. 부용은 연꽃을 달리 부르는 이름인데,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어서 그렇게 불린 것으로 추측한다. 이후 부용포는 ‘불법을 전해온 성인이 오신 곳’이라는 뜻의 ‘법성포(法聖浦)’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지명을 유지하고 있다.

설매리 석조불두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30호인 이 불두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광군, 마라난타사 조성

현재의 법성포 좌우두 일원에는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마라난타사(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불자들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영광군은 관광명소화사업의 일환으로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성역화 사업을 시행, 총면적 1만 3,745평에 사업비 약 184억 원을 들여 사면대불·만불전·부용루·탑원·간다라유물관·관리동·다원·존자정·만다라광장·연못·홍교 등을 조성했다.

마라난타사 사면대불의 정면에는 마라난타 스님상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아미타불, 양쪽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돼 있다. 마라난타사의 조형물 대부분은 간다라 양식이다. 마라난타 스님이 간다라 출신이라 그 지방 양식에 맞춰 조성했다. 특히 부용루 아래의 부처님 일대기 조각상과 탑원을 통해 간다라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탑원. 마라난타사에는 인도 간다라 양식의 탑원이 있어, 간다라 불교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존자정에서 바라보는 법성포의 풍광 또한 일품이다. 간다라 불교조각이 전시돼 있는 간다라미술관, 존자정 인근에 인도 아쇼카왕 석주를 본떠 만든 우뚝 솟은 석주도 볼거리다. 그렇게 마라난타사를 샅샅이 다니다보면 마라난타 스님의 자취를 어느 곳에선가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마라난타사 뒷산 정상에 오르면 사찰과 법성포 일원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신천리 삼층석탑 및 부도. 이흥사 터에 있는 신천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3층 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탑이다. 탑 옆에는 이름모를 스님의 부도 2기가 우두커니 서 있다.

사찰·탑·절터로 남은 불교

법성포에서 시작된 불교는 영광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마라난타 스님이 창건한 불갑사를 시작으로 사찰과 탑 등 많은 불교문화유산이 영광 땅에 세워진다. 하지만 몇몇 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은 세월의 무상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몇 개의 유구만이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항변하고 있을 뿐이다.

월평사지 3층 석탑. 사람 발길 뜸한 폐가(廢家) 옆에 있어 더 쓸쓸하고 슬퍼 보인다.

신천리 삼층석탑(보물 제504호), 단주리 당간지주(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3호) 등 국가나 지자체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유물은 그나마 보존 환경이 나은 편이다. 이흥사 터에 있는 신천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3층 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탑이다. 높이가 3.5m인 이 탑은 아담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탑 앞에는 석등 1기, 옆에는 이름 모를 스님의 부도 2기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서 있다. 탑 뒤로 내려앉은 나지막한 산이 포근한 느낌을 준다. 평평한 절터를 바라보고 있으면 밤낮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목청을 높여 불·보살을 명호하는 기도승과 한소식 얻으려 용맹정진하는 절구통 수좌의 선기(禪機) 번뜩이는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피었다가 사라진다.

단주리 당간지주. 고려 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높이는 12m에 달했는데 태풍으로 윗부분이 부러졌다.

단주리 당간지주는 원래 높이가 약 12m였다고 전하지만, 1945년 7월 태풍으로 윗부분이 부러졌다. 논 한켠에 우뚝 솟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주변에 고려시대 기와편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당간지주를 오른쪽에 두고 정면을 쳐다보면 100m 앞에 석탑 1기가 눈에 들어온다. 당간지주에 이 탑에 대한 설명이 없었더라면 스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탑이 서 있는 곳은 월평사지로 알려져 있는데 천작사였다는 설도 전한다. 이곳이 어느 사찰이었는지 말 못하는 탑만 알 뿐이다. 사람 발길 뜸한 폐가(廢家) 옆에 있어 더 쓸쓸하고 슬퍼 보인다. 잊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는 잊혀짐을 경험해 본 존재만 알리라. 이 탑이 잊혀진 존재가 되지 않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사기봉 마애불좌상. '연흥사 마애불'로 불리는 이 마애좌상은 바위에 새겨진 2구 중 그나마 윤곽이 잘 보이는 불상이다. 군유산 사기봉 정상 부근에 있는데, 옛 옥선사 산내 암자인 미륵암에서 조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영광에서 꼭 봐야할 불교유적 몇 곳을 선정하라면 주저없이 ‘사기봉 마애불’을 꼽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절벽에 매달려 한 땀 한 땀 부처님을 새겼을 석공의 불심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음이 첫 번째 이유요, 시간이 지날수록 부처님의 모습이 더 희미해져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친견해야 한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연흥사 종무소 뒤쪽으로 난 길로 30m 정도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30분가량 산 능선을 따라 가면 팔각정이 서 있다. 팔각정에 올라 오른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사각기둥같이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마애불 2구가 새겨진 바위다. 능선을 따라 길을 재촉하면 마애불과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바위 정면에는 마애불 1구가 흐릿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바람과 비에 깎여 희미해졌다. 마치 중생들에게 “바위 안에 숨은 나를 찾아보라.”는 듯 자꾸만 바위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듯하다. 바위 왼쪽으로 내려가면 윤곽이 비교적 또렷한 마애불 1구가 반긴다. 어떻게 저 위로 올라가 마애불을 새겼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조각 수법으로 따지자면 그리 능숙한 솜씨는 아니지만, 불심으로 따지자면 단 한 치도 뒤떨어짐이 없다. 마애불을 사기마을 인근의 옛 옥선사 산내암자인 미륵암에서 조성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영광에 뿌리 내린 미륵신앙

민간신앙과 결합한 불교는 ‘미륵신앙’으로 재탄생해 영광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게 뿌리내린다. 미륵불로 불리는 진내리 불두상(佛頭像), 설매리 석조불두상, 타 지방의 마을 입구에 있는 벅수나 장승에 비견되는 돌미륵, 그리고 매향신앙이 대표적이다. 미륵신앙의 흔적들은 영광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가져온 불상 중의 하나라고 전하는 ‘진내리 불두’를 친견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내비게이션으로 주소를 검색해 인근에 도착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작은 슈퍼가 눈에 띄어 주인에게 물었더니 가게 옆 골목 계단 아래에 있단다. 작은 한 칸짜리 전각 안에 조촐하게 모셔진 이 불두상은 높이 60cm, 두께 40cm인데, 중간 부분이 깨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불두를 미륵불이라고 부르며 이곳에서 복을 빌기도 한다고 한다. 비록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마라난타 스님이 가져 온 불상이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일었다.

영광에는 특이한 형태의 불두상이 있다. 군남면 설매리에 있는 석조불두상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30호인 이 불두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 잘생기지도 않은 바위 위에 불심 돈독한 재주 좋은 석공이 정성스레 조각한 불두를 살포시 올려놓으니, 바위는 그대로 신성한 부처의 몸이 돼 버렸다. 몸에 얼굴을 맞춘 셈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신비한 얼굴 표정은 이곳을 지나는 뭇 중생의 산란한 마음을 살포시 어루만진다. 설매리 마을 사람들은 이 불두를 ‘미륵불’로 부른다.

연성리 미륵. 연성리 마을 입구의 버스정류소 옆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돌미륵 1구가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사람들이 스치기 쉬운 문화유산이 바로 돌미륵이다. 마을 어귀에 돌 하나를 세워 놓은 듯 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저 돌일 뿐이다. 연성리 마을 입구의 버스정류소 옆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돌미륵 1구가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데, 돌미륵·미륵할머니·할머니미륵 등으로 불린다. 세월이 흘러 제 역할을 상실했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연성리 외에도 군서면 남죽리 너머터마을 미륵, 군남면 설매리 도고마을 미륵, 불갑면 건무리 화산 미륵, 염산면 야월리 이리 미륵 등이 남아 영광 사람들의 신앙 대상이 되고 있다.

미륵신앙의 또 다른 형태는 매향신앙(埋香信仰)이다. ‘매향’은 다음 생(生) 즉, 사후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간절히 바라며 향(香)을 땅에 묻는 행위다. 이 행위의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 매향비다. 향나무를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랫동안 묻어 두었다가 약재로 쓰거나 불교의식에 사용했다.

이 매향의식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널리 성행했다. 법성면 임정마을 노인회관 옆에 서 있는 입암리 매향비(전라남도 기념물 제224호)는 다른 매향비와 다르게 1371년(공민왕 4년)과 1410년(태종 8년)에 행해진 두 번의 매향 사실이 기록돼 있다. 마을 사람들은 배를 매어두는 기둥인 줄 알았다고 한다. 판독이 어려운 글자도 있지만, 비에는 매향 장소와 시기, 주도집단, 매향과 비석을 세운 경위, 참여자 등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입암리 매향비. '매향'은 사후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간절히 바라며 향(香)을 땅에 묻는 행위다. 이 행위의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 매향비다.

영광을 수호한 지킴이들

불교와 함께 영광을 지켜온 건 절개가 굳건한 영광 사람들과 법성진성·영광읍성·대절산성지·고성산성 등의 방어시설, 숲으로 된 성(城)인 법성진 숲쟁이(명승 제22호)다.

숲쟁이. ‘숲으로 된 성’을 뜻하는 숲쟁이는 법성진성이 위치한 산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걸쳐 조성된 인공림이다.

법성진성(法聖鎭城)은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인 법성포에 설치된 조선전기 영산창(榮山倉)과 2대 조창인 법성창(法聖倉) 방어를 위해 군인이 주둔했던 군사요충지다. 중종 9년(1514)에 쌓은 석성으로, 높이 약 3m, 너비 약 7m, 둘레 약 462m 규모의 산성이다. 성벽 일부에는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인력과 높이 등이 새겨져 있다. 성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조성돼 있어 산책하기 좋다. 성곽 아래에선 법성포와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넓게 펼쳐진 바다 풍경과 시원한 바람이 잠깐의 여유를 즐기게 한다.

‘숲으로 된 성’을 뜻하는 숲쟁이는 법성진성이 위치한 산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걸쳐 조성된 인공림이다. 숲에는 느티나무, 개서어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등이 자라고 있는데,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심은 것으로 전한다. 특히 숲쟁이는 법성포구와 마을의 방풍림 역할을 해왔다.

법성진성. 법성포에 설치된 조선전기 영산창(榮山倉)과 2대 조창인 법성창(法聖倉) 방어를 위해 군인이 주둔했던 군사요충지다.

짙푸른 바다를 끼고 조성돼 있는 절경의 백수해안도로를 일주하다 보면 바닷가 앞에 아담한 비각이 시선을 끈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지에 살던 동래 정씨와 진주 정씨 문중의 부녀자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열부순절지(烈婦殉節地)다. 사연은 이렇다. 두 문중의 부녀자들은 전쟁을 피해 묵방포(墨防浦)까지 도망갔지만, 왜적에게 붙잡힌다. 이들은 대마도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의롭게 죽겠다고 결심하고 모두 영광 칠산 앞바다에 몸을 던졌다. 숙종 7년(1681), 조정에서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비각 안의 두 개의 비는 1942년과 1946년에 세웠다고 한다.

정유재란 열부순절비. 정유재란(1597년) 당시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지에 살던 동래정씨와 진주정씨 문중의 부녀자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열부순절지(烈婦殉節地)다.

지금까지 영광 법성포는 ‘굴비로 유명한 고장’, ‘마라난타 스님이 처음 백제에 불교를 전한 곳’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영광은 많은 불교유산과 문화유적이 있는, 서민들의 삶에 불교신앙의 한 형태인 미륵신앙이 깊게 뿌리내린 불연(佛緣)이 깊고 깊은 곳이다. 그리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 절개를 지킨 사람들의 혼이 서린 충절의 고장이다. 유명한 사찰이나 관광지만 둘러보고 훌쩍 떠나버리기엔 아까운 곳이 영광이다. 보고, 듣고, 느껴야 할 문화유산이 너무 많기에. 영광의 진면목을 찾고 보고 진정으로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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