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무소의 뿔처럼(261호)

25년 간 찬불가 공연 700회
“佛歌 부를 땐 내가 더 행복해져요!”

불자가수 하윤주.

1980년대 불교계는 여전히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만, 1954년 출범한 기독교방송(CBS)의 발전을 지켜보던 불자들은 ‘불교방송국’의 개국을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그 결실이 1990년 개국한 불교방송(BBS)입니다. 개국 당시 불교방송에서 연락이 와 이태행 편집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부가요교실의 강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지도해본 경험이 없어 선배 불자가수 남강수 선생님을 추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방송국에서 다시 연락이 와서 찾아갔더니 ‘두 분이 같이 해주시면 좋겠다’며 간곡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강수 선생님마저도 ‘혼자는 못하니 함께 하자’고 해서 선배님을 도와 드리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찬불가 지도 1호 강사’란 감사한 호칭을 얻게 된 인연입니다.

불교방송 개국 후 ‘주부가요교실’의 강사를 맡은 하윤주 씨. 1990년 3월 회원들과 함께 한 기념촬영. 한가운데 남강수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찬불가를 배우고 부르는 것은 저나 함께 부르는 법우님들이나 행복하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찬불가를 처음 접해보았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가요보다 더 가슴시린 곡들이 많아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찬불가를 부르다 보면 자꾸만 코끝이 찡하고 목이 메어와 노래를 부르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나뿐 아니라 다른 법우님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찬불가를 더 좋아하게 됐고, 불교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알아가게 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낯선 분이 저를 찾아와 자신을 ‘작곡가 조영근’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가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어서 밤새 간병을 하다가 잠깐 졸고 있었습니다. 초췌한 모습으로 낯선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당황스러웠던 저에게, 그는 불교음반을 만들고 싶다면서, 저보고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불러달라고 제안해왔습니다. 거절을 했지만, 어찌나 끈질기게 설득을 하던지 결국 그의 진심에 설득을 당했고, 함께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영근 작곡가는 불교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불교음반을 꾸준히 제작하던, 찬불가 히트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연세가 일흔이 훌쩍 넘은 현재도 여러 사찰의 지휘자로 찬불가 공연을 활발하게 하고 계십니다.

1991년 작곡가 조영근 씨로부터 불교음반을 내자는 제안을 받고, 그해 겨울 남강수 선생과 함께 낸 음반 ‘선시-춘몽만가’.
2015년 5월 발표한 찬불가 앨범 ‘가슴을 울리는 부처님말씀-음성공향’.
2015년 10월 발표한 찬불가 앨범 ‘길’.

조영근 씨를 만난 후 무척 바빠졌습니다. 첫 공연을 서울 강남 구룡사에서 했는데 도심 속 사찰의 웅장함에 놀랐고, 현대적 시설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가수다보니 구두를 신고 무대에 서는 게 익숙했는데, 법당에서 구두를 벗고 스타킹만 신은 채 노래를 부르려니 누가 뒤에서 자꾸 잡아당기는 것 만 같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제 등 뒤에 커다란 부처님이 계셔서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와중에도 습이 들어 빠른 곡조의 노래를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새 몸을 흔들게 돼 민망하기도 하고, 무척 난감했습니다. 거기에 앞줄에 앉아서 노래를 듣던 법우님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머릿속이 하얘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법우님들은 “찬불가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며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면서 “앞으로 많은 공연과 불교포교를 많이 해달라”며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저에게 작은 용기가 싹텄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 날이기도 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스님들의 생각은 달랐나 봅니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법당에서 공연을 하는 것에 대해 무척 부정적이었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연예인들이 노래를 하는 것을 경망스럽게 본 거죠. 설득하기가 어려워서 우리들은 군 법당을 찾아가 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음성 포교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2005년 8월 갑사 템플스테이 특별공연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윤주 씨.

지금은 고속도로가 잘 뚫려있고, 국도도 포장이 잘 되어 있지만 1990년대 초는 비포장도로가 많아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한 번은 한명숙·명국환 선배님을 모시고 강원도 양양의 군부대로 공연을 갔습니다. 마침 산을 깎아 도로를 내고 있는 공사 중이었는데, 안내표시가 제대로 없어서 그만 산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자그마치 자갈길을 2시간 이상을 헤맸습니다. 하늘같은 선배님께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길을 잘못들은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명숙 선배님께서는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하시면서 “나가는 길이 나오면 무조건 나가자”고 하셨습니다.

1993년 10월 발생한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당시 유족돕기 자선공연.

우여곡절 끝에 부대 관사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4시였는데, 11월 추위에 무슨 사고가 난줄 알고 모두 나와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휴대폰이 없어서,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잘 도착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쉬지도 못하고 다음날 아침공연을 하러 공연장에 갔습니다. 오전 10시였는데 빈자리 하나 없이 관객석은 꽉차있었고, 오히려 공연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원도 양양은 부대가 많아서 거의가 군인가족이고, 우리들의 불교 공연은 동네잔치였습니다. 양양은 멀기도 하고, 규모도 작은 도시라 연예인들은 아예 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인기가수 한명숙·명국환 두 분이 나온다고 하니 꼬부랑 할머니부터 꼬맹이들까지 온 가족이 손을 잡고 와서 놀랐습니다. 왠지 마음이 짠해서 고생스럽게 내려간 만큼 공연을 열심히, 자~알 하고 왔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 포교를 하러 다니던 때의 추억을 조금씩 꺼내서 즐기곤 한답니다. 행복한 시간들이었으니까요. 군부대 공연하면서 휴가증으로 집에 가고픈 장병들을 집에 보내준 적도 많았고, 교도소에서 마음이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공연을 하고 돌아오면, 그들은 공연을 생각하며 몇 달 동안을 행복한 마음으로 지낸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공연도 소홀하게 할 수가 없었지요. 선배님께 부탁을 드려 출연료 한 푼 드리지 못한 채 모시고 다녔고, 경비도 스스로 충당했지만, 그때는 힘든 줄 몰랐습니다. 가끔씩 실수가 생겨도 서로 보완하며, 다음에는 더욱 잘해보자고 ‘화이팅’을 하며 500회 기념공연을 조계사에서 마쳤습니다.

누군가 제게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물어온다면 ‘나의 노래를 듣는 관객들보다 내가 더 행복했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요. 25년이 지난 지금도 찬불가 음반을 내고 있지만, 내 목소리가 찬불가에 제일 잘 어울린다는 말을 주위에서 듣곤 합니다. 착각이라도 좋고, 그런 칭찬에 히죽이는 바보라고 불려도 좋습니다. 멜로디에 내 목소리를 얹을 수 있는 한 찬불가를 부르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습니다. 요즘은 인생을 좀 알아야 찬불가가 더욱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찬불가의 가사는 불경(佛經)이고, 불법(佛法)이고, 법문이고, 염불입니다. 어떻게 바른 마음가짐 없이 찬불가를 부르면서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노래를 부르는 모든 후배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찬불가를 불러주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하윤주
1955년 생. 1990년 불교방송 개국 후 ‘찬불가 지도 1호 강사’로 불렸다. 1992년부터 조계종 포교사로 활동했으며, 그동안 찬불가 공연만 700회 이상 해왔다. 사)한국불교예술인연합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2012년 찬불가 ‘영혼의 울림’ 2015년 ‘음성공향’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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