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261호)

민병도 시인이 아들에게

 지완아, 세한(歲寒)이 눈앞인데 시국마저 안정되지 못하니 몸보다 마음이 더 시리구나.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네 탓이오”를 부르짖으며 거리로 몰려나가는 촛불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아버지 역시 시대의 환우(患憂)를 예방하지 못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도도한 물결 속에는 분명히 너도 함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누가 옳고 누가 그러다는 분별을 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너의 그 어떤 선택과 행동에도 관여하거나 탓할 생각도 없다. 따지고 보면 너 역시 우리시대가 대비하지 못한 불균형과 부조화의 피해자일 테니 말이다. 다만 쌓여온 저마다의 불만이 분출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국가원수가 제공했다는 점에서의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즈음 얼마나 힘이 드느냐’고 굳이 묻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너는 또 무엇을 준비하느라 골몰하는지 궁금하구나. 아버지는 혹여 태산이라도 옮길 것 같던 너의 인생도전 1막이 실패로 끝났다고 패배의식에 빠지지나 않을까 잠시 걱정을 했었단다. 또 실제로 네게서 그러한 표정을 읽은 적도 있었단다. 애비로서 조급한 생각에 조바심도 가져보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단다. 그래도 요즘 다시 새로운 길을 나설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또 다른 기대를 보내고 있단다.
 지완아, 너도 이제 나이가 30대 중반이구나. 물론 공자께서도 서른에는 자립[三十而立]을 했다고 했을 정도이니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다. 맞지 않는 옷을 서둘러 입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그렇다고 맞는 옷만 찾느라 벌거벗은 채로 견딜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고충이 클 줄 믿는다. 너무 큰 옷은 줄이고 너무 작은 옷은 뜯어서라도 몸에 맞게 수선하여 입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절충점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네가 인생을 행복하게 설계하고 건축할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아직은 네가 들어가야 할 입구를 찾지 못해 주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라건대 너무 작은 것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가만히 보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은 꽃이 없고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들풀이라도 혹한의 눈보라를 이겨내지 않고 향긋한 봄을 맞는 경우는 없단다. 
 너는 다 잊었겠지만 내 마음의 금고에는 지난 날 너와 함께 보낸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들이 소중하게 적립되어 있단다. 네가 어린 날, 휴일 아침마다 수성못가에 나가 바람을 헤아리는 나뭇잎과 물결을 읽어가는 새끼 물오리, 수면을 뛰어오르는 고기들의 힘찬 도약을 함께 보면서 보낸 시간들이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네가 철학도가 되는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가끔씩 그때가 그립단다.  
 너는 아직 피가 뜨거운 청춘이다. 물론 나이가 젊다고 모두 다 청춘인 것은 아니다. 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지녀야 하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정의에 대한 실천의지를 지녀야만 청춘이라 할 것이다. 아무리 젊어도 지식과 지혜를 겸비하지 못하고 모험과 도전을 기피한다면 청춘이라 말할 수 없다. 비록 실패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는 자세야말로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일 테니 말이다.
 지완아, 가끔씩은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보아라. 자기 색깔도 갖지 않고 자기 모양도 갖지 않은 채 서로 덥석 손을 잡고 상처가 주는 대로 둥글게도 흐르다가 네모로도 흘러가는 강물을 말이다. 장애가 있으면 돌아가고 낭떠러지가 나타나면 자신을 흩어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거룩하기까지 하단다. 그렇게 강물은 자신을 밟고서 길을 낸다는 것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디 네게 주어진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해라. 그렇다고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또한 잘못하면 실패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도 발 묶여서는 안 된다.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반드시 성공하기 위하여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해가는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지완아, 반드시 세상의 주인일 필요는 없다. 다만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라.

민병도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슬픔의 상류>, <원효>, <장국밥> 등 17권의 시집과 <비정형의 정형화> 등 3권의 평론집, <꽃은 꽃을 버려서 열매를 얻는다> 등을 출간했다. 한국문학상,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등 수상했다. 현재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 계간 <시조21> 발행인.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사)국제시조협회 이사장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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