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에세이(261호)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지난해는 다사다난했다. 여름은 역사 이래 가장 무덥고 길었고 가물었고, 경제는 어려웠고, 정치적으로는 나라가 흔들거렸다.
그 어지러움은 새해로 이어진다. 올해에는 새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우리는 더 얼마나 시끄럽고 어려운 격동을 겪어야 할까. 우리 지도자들 주변에는 탐욕 많은 사람들만 득시글거리는 듯싶다. 자본주의라는 잔인한 정글 속에서 사는 우리 힘없는 서민들은 아득하고 조마조마해진다.
누구에게 나라 살림살이를 맡겨야 마음이 편안해질까. 우리는 어디에 의탁을 해야 할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가 한승원.

내 등불 내가 켜들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 제자 아난이

“부처님께서 떠나시고 나면 우리는 어디에 의탁해야 할까요?”

하고 울며 말하자, 부처님은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신에게도 의탁하지 말고 악마에게도 의탁하지 말고 자기 등불 자기가 켜들고 헤쳐 나가거라. 끝없이 정진하여라.”

그 말씀을 나는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마음이 산란해지면 바다로 나간다. 맨살 맨 몸이 되기 위하여, 내 등불 내가 켜들기 위하여 바다로 나간다. 바닷바람과 먼 바다에서 달려온 파도가 마음의 티끌들을 씻어준다.

아침 바닷바람은 상쾌하다. 모래밭을 씩씩하게 속보로 걷는다. 모래를 밟으면서 몇 억겁을 살아온 지구의 진화를 생각한다. 모래밭을 걷는 것은 나 혼자뿐이 아니다. 물떼새 도요새 비둘기도 상형문자 같은 자국을 남기며 걷는다.

떠오르는 새빨간 해를 맞이한다. 해에게 기도하고 영감을 얻는다. 해는 나에게 기를 주입해준다. 해에게서 불을 붙여 내 등불을 밝히는 것이다. 해를 향해 서서 체조를 하고 달려오는 파도들을 향한 채 심호흡을 한다.

죽음이 없는 바다는 부처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나는 바다에서 영원을 읽는다.

소설가 한승원.

바다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스승의 얼굴

불제자인 나는 이제 80 나이를 앞두고 있는 노인이다. 나는 흙탕물처럼 어지러워진 세상 속에서 순수해지려고 애쓴다. 순수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탐욕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뒤숭숭한 악순환은 어찌하여 생기는가. 모두가 탐욕 때문이다. 탐욕이란 무엇인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편히 자고 맛깔스러운 것을 배불리 먹고, 화려하고 쾌적하게 입고 이성과 뜨겁게 사랑하고, 외국산 목재나 석재로 호화롭게 지은 거처에서 가족과 더불어 안락한 행복을 누리는데 필요한 재물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자식들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게 하고, 세상에서 왕족처럼 대우받고 살도록 만들어주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권력을 움켜쥐어야 하고, 재산을 축적해야 하고,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고, 하던 일에서 물러난 다음 떵떵거리며 누릴 재물을 몰래 챙겨야 한다.

권력과 재산을 많이 가진 다음에는 못가진 자들과 부하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많은 지식을 쌓은 다음 무식한 자들에게 으스대며 오만해져야 한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자식들보다 더 충성하고 효도하게 인맥을 만들어 놓으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탐욕이란 것은 그 사람이 죽어간 다음에는 모두가 허무하고 무상한 것들이다.

사람은 언제인가는 죽어 사라진다. 죽으면서는 모든 것을 다 놓고 간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신 모습을 다 보아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다 허망하게 모든 것을 다 벗어놓고 간 모습을 지켜보아왔다. 시체를 담은 관 뚜껑을 닫을 때는 모두가 빈손인 것이다. 그것을 보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허무와 무상을 감지하지 못한 사람은 어리석은 바보이다.

이별연습 하는 시간

나는 이별연습을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던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나가는 연습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이별하는 연습이다. 친구들과 내가 아끼던 책과 덮던 이불과 입던 옷과 살던 허술한 집과 신던 구두와 운동화와 슬리퍼와 컴퓨터와 내가 저술한 책들과도 이별연습을 하는 것이다. 날아다니는 새, 뜰의 정원수들 하늘 바다 구름하고도 이별연습을 한다.

이별연습은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버린다는 것이 아니고 더욱 사랑해주고 더나간다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왕궁의 호화로운 삶을 버리고 출가를 했듯, 나는 저 세상으로의 출가를 꿈꾸는 것이다.

남은 삶을 출가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출가정신이란 무엇인가. 저 세상 갈 때는 가지고 갈 것 하나 없음을 체득하고 마음을 비우고 못 가진 자에게 베풀며 사는 정신이다.

<사람의 맨발>이란 장편소설을 쓴 적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소설로 승화시킨 졸작이다.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행적에 푯대를 맞춘 것이 아니었다.

왕궁에서 왕자로 살던 싯다르타(석가모니 부처님)가 출가를 결심하기까지, 또 그 결심을 실현하기까지, 실현하고 나서 맨발로 누더기를 걸치고 걸식을 하면서 사는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에 푯대를 맞추었다.

왕자로서 맛깔스러운 음식을 먹고 포근하고 다사로운 잠자리에서 호화롭게,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던 삶을 정리하고 출가하는 싯다르타의 심사를 묘사하면서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덮던 이불, 침대, 커튼, 읽던 책, 정원의 푸나무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싯다르타의 심사가 되지 않고는 그 글을 쓸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 대목을 쓰면서 울었다.

친구처럼 대하는 마부만 데리고 몰래 동문을 빠져 나간 싯다르타는 강변에 이르러 그 마부하고도 이별을 한다. 말안장 위에 왕자의 관, 차고 있던 칼,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얹어주고 이별하자고 잘라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이별을 고할 수 있었을까.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칼로 자르듯이 인생의 획(전환점)을 긋는 혁명적인 과감함 때문에 그분을 내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젊은 시절, 하루에 몇 번씩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수행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분의 그러한 용기를 실현할 수 없었다.

사진제공=불광출판사.

초지보살의 경지

나는 득도하기 이전의 싯다르타의 삶을 천만분의 일만이라도 닮고 싶다. 그렇지만 어찌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가. 다만 탐욕을 줄이는 일만이라도 실천하면서 늙은 삶을 잘 살아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자기 도량에서 계율 잘 지키며 수도하는 스님들이 한없이 존경스럽다. 그들 중 학승들을 존경한다. 나는 불교의 경전을 읽다가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나와 교류하는 학승들에게 묻곤 한다. 그들은 자상하게 검색한 결과를 이메일로 보내준다.

나이 칠십이면 마음가는대로 살지만 법도에 어그러짐 없다는 공자가 말한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 경지는 무엇일까. 한 걸음 나아가, 초지보살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의 참모습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해에게서 발견하고, 안개에서 발견하고, 들꽃에서 발견하고 흐르는 물에서 발견한다. 달의 흐름에서 발견하고, 별에서 발견하고 흘러가는 구름에서 발견한다.

내가 주체가 되어 구름처럼 흘러야 하고, 별처럼 반짝거려야 하고,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야 하고, 달처럼 천강을 비추어야 하고, 들꽃처럼 바느질 흔적 없이 수수하게 피어야 하고, 해처럼 세상을 훈훈하게 덥히고 모든 것을 자라나게 해야 한다. 바람처럼 자유자재하게 되어야 한다.

사람이 찾아올 때면 정원의 나무 한 그루로 서서 향기로운 꽃향기를 풍기며 그를 즐겁게 해야 하고, 풀밭에 송아지만한 바위로 엎드려 그가 내 등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아, 누가 가져다 줄 것인가

정원의 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박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공작단풍나무의 연약한 가지에 앉곤 한다. 뺨과 배가 하얀 박새의 작은 몸을 싣고 있기가 힘이 든 공작단풍나무 가지는 심하게 흔들린다. 박새는 무게중심을 잡기 위하여 꼬리를 까딱거리고 나를 바라보다가 멀리 날아간다. 박새가 날아가면서 걷어찬 가지가 한번 출렁하고 난 다음 오랜 동안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내 가슴으로 번져온다. 그때 문득 시상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운 사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을 때 나의 우주도 저렇게 흔들렸었다.

섭동이다. 그러한 흔들림 때문에 나의 운행 궤도는 바꾸어지는 것이다.

새해에는 이때껏 소설가의 가난함 속에서 고달프게 살아온, 허영과 탐욕 없는 늙은 아내와 함께 건강하게 맛있는 거 먹으면서 즐겁게 여행을 천천히 즐기고 싶다. 평생토록 나를 양생하며 자식들을 공양한, 오지랖 넓은 아내야말로 초지보살의 경지에 올라 있지 않을까. 이제부터는 가능하면 무겁지 않고, 답답해지지 않고, 서정적이면서 향기로운, 별로 길지 않은 글을 스트레스 쌓이지 않게 쓰고 싶다. 여행을 하는 것도 산뜻한 가벼운 글을 쓰는 것도 이별연습이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에

“아, 누가 가져다 줄 것인가, 그 아름다운 첫사랑의 날을”

이라는 슬픈 노래가 있었는데, 나는 나와 아내와의 이별연습 하는 시간에 그것을 적용하곤 한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어갈수록 인생은 더욱 아름답고 고귀하고 아깝다. 남은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보내고 싶다.

바닷가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모래밭에 널려 있는 조개껍질들 중에서 하얗게 씻기고 바래진 보석 같은 것을 하나 주워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모래밭에 버린다. 조개껍질은 역시 모래밭에 널려있어야 제 멋이 난다. 바다를 뒤로 하고 농로를 타고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중얼거린다.

‘아, 누가 가져다줄 것인가. 그 아름다운 첫사랑의 날을.’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설 원효〉, 〈초의〉, 〈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써오고 있는 작가는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