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의 선지식을 찾아서(261호)

가난하지만 선한 이웃의 외로움과 울분을 노래한
보살 같은 시인 신경림

신경림 시인의 서재에서.

지난 연말, 80세의 신경림 시인은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또래의 문인들과 촛불집회에 동참했다. 이번 촛불집회는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며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비장하게 참여하던 과거의 시위와는 견줄 수 없는, 축제 같은 공간이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시인은 손주들도 만났다. 반가웠지만 ‘앞선 세대’로서 손주 세대들까지 거리로 내몬 현실이 착잡했다고 했다. 시인은 불통이 가져온 이 정국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기본이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른 이를 이해하고 귀 기울이는 노력이 있어야 하죠. 새해는 그런 점에서 나아질 겁니다. 홍역을 겪었으니 나라안팎이 거듭나고 고쳐지겠지요. 열려 있는 자세로 소통하는 한해이길 기대합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현장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신경림 시인이 있었다. 항시 온화한 미소에 소탈하고 꾸밈없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추구하는 가치, 옳다고 생각한 것만큼은 양보’하지 않고 살아온 분이다. 그런 연유로 신경림 시인은 암울한 시대엔 무수한 탄압을 받기도 했다.

“독재시절 반체제 운동을 했지만 목숨 걸고 적극적으로 하진 못했어요. 돌아보면 다른 건 다 부족했던 것 같아요. 가장 잘 한 일은 글 쓰는 일이었죠. 글쓰기는 성실히, 열심히 했어요. 그러고 보면 거리에 나선 것도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까를 고심했기 때문이에요.”

사찰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감옥에 다녀온 그 모든 것이 기실, 불통의 현실에서 ‘소통’을 추구하느라 생겨난 일들이었다.

충주는 선사시대를 비롯해, 마한과 삼국을 아우르는 유적이 가득한 중원에 있다. 시인은 금광개발이 한창이던 중원의 노은면 연하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개울가에 파묻혀 있던 고구려 중원비는 마을아낙들의 빨래판이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중원비 위에 올라앉아 발을 닦으며, 왜 빨래판에 한자가 쓰여 있는지 궁금히 여기기도 했다.

4학년 때 고향을 벗어나 가장 멀리 간 곳이 목계였다. 남한강의 물산이 집결되는 나루터에선 흥성한 장이 펼쳐졌다. 목계나루에서 스무 척에 이르는 뗏목의 장관을 보았다. 뗏목꾼들이 주고받는 유장한 소리에 매료되었다. 목계의 풍경을 말똥종이공책에 적은 것을 교사가 보곤 ‘시인’이라 불러주었다. 충북지역 초등학생 문예공모전에 학교대표로 참여했다. 모두들 그가 학교를 대표하는 수상자가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같은 반 산지기아들이 쓴 산문이 입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어린 시인은 하늘이 노래지는 충격 속에서 ‘다시는 글 따위는 쓰지도 읽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연한 이 결심이 무너진 건 고교시절이었다. ‘놀라운 글’이라는 교사의 찬사를 받으면서 부터다.

“고교시절에 백석과 임화, 이용악, 오장환의 시를 즐겨 읽었어요. 일상에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빚어 올린 시인들이죠. 꼭 할 말만 하면서도 깊은 향기를 지닌 시였지요.”

이 무렵 시집이 너덜거리도록 시를 외우며 시심을 키웠다.

긴 세월 민요를 찾아다니는 일을 해오면서 우리 전통의 가락과 선율을 몸에 익힌 신경림 시인이라, 그의 시는 읽는 동안 노래가 된다. 그런 그를 두고 우리는 가객이라고 부른다. 사진제공=창작과비평사.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할머니를 따라 절을 찾았다. 어머님도 절에 다니셨다. 불교집안에서 자랐으니 누가 종교를 물으면 ‘불교’라 답했다. 1955년 동국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창시절, 불교학 강의를 열심히 들었어요. 특히 뇌허 김동화 박사의 강의에 매료됐죠.”

1964년, 서른이 되던 해에 혼인을 했다. 예식장은 충주시내의 절, 대원사였다. 그 시절 사찰은 대중들의 혼례식장이기도 했다. 대원사는 그가 평소에 수시로 들러 참배하던 곳이었다. 대처승 주지스님이 흔쾌히 주례를 맡아주셨다.

신경림 시인은 ‘짐승과 새와 벌나비와 더불어/이 땅에 땀 흘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이 땅에 힘겹게 살다 간 사람들과 더불어/이 땅에 언제까지고 살아갈 사람들과 더불어‘ 시를 써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시를 쓸 것이다.

“답답할 때 쉬러가는 곳이 절이에요. 아주 오래전에 들렀던 동화사는 아련하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집근처에는 유서 깊은 흥천사가 있지요. 종종 들릅니다. 2015년에 인도의 라닥에 갔어요. 티베트 절을 둘러보는데 참 좋은 느낌이더군요. 우리 불교가 갖지 못한 맑고 향기로운 무소유 정신을 그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각별한 사찰 중에 하나는 백담사일 것이다. 이곳에서 만해대상을 수상했고, 한때 만해 선사를 기리는 만해마을의 대표를 맡은 인연이 있다. 2004년에는 백담사에서 오현 스님과 10여 차례 만남을 가진 뒤 이를 엮어 ‘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간의 만남’이란 책으로 펴냈다. 시인은 선승에게 비단을 덮어주고, 선승은 시인에게 옥돌을 다듬어 주었다[詩爲禪客添錦花, 禪是詩家切玉刀]는 중국 고사 마냥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여행, 사랑, 욕망 같은 사사로운 이야기부터 문학, 환경, 전쟁, 통일과 같은 굵직한 담론을 펼쳐놓고 시인과 선사는 승속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솔하고도 예리한 대화를 쏟아냈다. 그 바람에 오현 스님과는 지중해 여행을 떠날 만큼, 각별한 사이가 됐다.

신경림 시인은 수시로 집 앞 북한산에 오르고, 강연 때문이든 역마살 때문이든 수시로 여행을 즐긴다. 지난해에는 일본도 가고 우크라이나에도 다녀왔다. 몽골사막에선 별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걸 경험했고, 지중해 바다위에서도 별을 즐겼다.

“어린 시절 내 꿈은 고향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떠나는 일이었어요. 다시는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가고 싶었어요.”

신경림 시인의 역마살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는 무수한 발품을 팔며 세상을 헤맸다. 그러나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고향은 -남한강이며, 목계장터며, 광산 등은- 하나같이 그에게 들러붙어 그의 노래가 되었다.

1956년에 ‘갈대’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한다. 올해로 등단 61주년이다. 시력(詩歷)으로 회갑을 맞는 시인이지만, 등단 직후 문단에 대한 불신 때문에 시를 짓지 못했던 시간도 있었다.

“시도 신명이 나야 쓰죠. 모든 게 허망해서 쓸 수가 없었어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아름다움만 찾을 수 있는가’해서 방황했지요. 그렇게 10년을 방황하면서 인생공부를 다시 시작했지요. 별의 별 일을 다 했어요.”

농부로, 광부로, 인부로 떠돌며 일했던 ‘별의 별 일’ 중에는 장사도 있다. 친구 따라 고무신을 들고 나섰지만 보름동안 단 한 켤레도 팔지 못했다. ‘비윗장’이 없는 탓이었다. 무수한 대중 앞에서 감동어린 강연을 들려주는 신경림 시인이건만 그는 지금도 뭘 팔 자신은 없다고 했다. 유랑의 시간 동안 무수한 이웃들을 만났다. 그들의 밑바닥 정서를 읽었고, 그들의 서러움을 헤아렸다. 떠돌이 생활 10년 동안 쓴 시는 딱 두 편, ‘그날’과 ‘눈길’ 뿐이었다. 세간에선 ‘절필’했던 시기라 평하고, 시인은 ‘방황했던’ 시간이라 말하지만, 그 시간은 시인의 시가 가슴속에서 아프게 농익어가는 과정이었다. 적어도 1971년에 ‘농무’ 등을 발표한 이래 2~3년 사이에 무려 30~40여 편의 시가 쏟아지듯 발표된 것만 보아도 그러하거니와, 시편마다 농민들의 애환과 가난한 이웃들의 절절한 현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으니 말이다.

시집 <농무>.

시인은 1973년 근대화,
도시화 과정으로
농촌이 붕괴하기 시작하던
시절 농민의 현실을 노래로
승화시킨 첫 시집
‘농무’를 발표했다.
이 시로 신경림 시인은
현대문학사의 흐름을
바꾼 시인이 된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시 쓰는 일임을 깨닫고서야 신경림 시인은 다시 문학판으로 돌아왔다.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다시 신명나게 시를 썼다. 관념적인 시가 문단의 중심을 이루던 시절, 삶의 정한이 깃든 첫 시집 ‘농무’로 신경림 시인은 현대문학사의 흐름을 바꾼 시인이 된다. 이 시집을 읽은 백낙청 교수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보아라 이런 시집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도 신경림 시인의 질박한 삶의 기행은 지속되었다. 1980년대, 시인은 민요를 채집하러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사라져가는 민요를 건져 올리면서 민요연구회를 만들어 문화운동의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1995년 신경림 시인의 회갑기념 평론집 앞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경림 시인만큼 환갑노인이란 말이 안 어울리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스무 해가 지났다. 아직도 이 문장은 유효하다. 여전히 신경림 시인만큼 팔순노인이란 말이 안 어울리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고희기념으로 신경림 전집 두 권을 선보일 때 시인은 호기롭게 말했다.

“지금까지 쓴 시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진짜 시 한번 써봐야죠.”

그래서일까, 팔순을 기념해 펴낸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는 시인이 지난 생애를 반추하고 관조하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나이 들면서 깨닫는 인생의 의미, 그 눈 밝은 지혜가 나지막하면서도 묵직하게 울려 퍼진다.

“긴 세월, 세속적인 욕망쪽으론 마음 두지 않고 살았어요. 나이 들수록 잘 버리고 잘 내려놔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유일하게 욕심내자면 지금보다 더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거예요.”

더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건, 시인으로서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욕심이다. 80여 년 인생길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시인은 말했다. “지금”이라고.

“우환이 끊이질 않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죠. 지금이 가장 편안해요.”

시를 통해 가난한 이웃들의 정한을 헤아리고 보듬어온 신경림 시인이지만, 궁핍한 시대를 함께 견딘 아내는 첫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어린 3남매를 돌보면서 중풍의 아버지, 치매 앓는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시절도 있었다. 고단함도, 암울함도 결국 시인은 시를 통해 치유하지 않았을까?

“시는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앞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독이고 위로해주는 게 시입니다. 시인은 말해야 할 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어려울 때 나서서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길을 찾아줘야 합니다. 현장의 삶을 살면서 소통하는 게 시인의 길이지요.”

한시도 시대를 외면한 적이 없다. 가난하지만 선한 이웃들의 외로움과 울분을 민요의 정조로 빚어냈다. 그네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눈물 흘리며 공감하고, 한없이 연민하는 노래를 불러왔다. 이렇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고 기쁨을 주는 이가 보살이 아니던가. 그가 신경림 시인이다.

 

이윤수
KBS방송작가. 1990년 불교방송 개국과 함께 방송작가를 시작, 1993년 KBS로 옮겨 24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방송 원고를 쓰고 있다. KBS-TV <문화가산책>, KBS 1라디오 <문화공감>이 대표작이다. 지금은 1라디오 <행복한 시니어>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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