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나는 국토순례(261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석양에 비친 보살의 미소가 중생의 번뇌를 녹여주는 듯 하다.

영원한 겨레의 땅
부처님 땅, 경주 남산

고개만 들면 불상이 보이고, 쉬는 곳마다 불탑이 서 있고, 숲과 숲 사이에서 여지없이 절터의 밑그림을 볼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있다면 그 땅의 이름은 ‘불국토’일 것이다. 천 년 신라의 땅이었던 경주의 남산이다. 해발 500m가 안 되는, 높지도 크지도 않은 이 산에는 찬란했던 신라의 천 년과 그 신라가 그렸고 누렸던 불국토의 증거들이 빼곡하게 남아 있다. 절터 147곳,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그리고 왕릉과 산성지를 비롯해 672점의 유물과 유적지가 있다. 산 전체가 박물관이고, 살아 숨 쉬는 도록이다. 그 옛날 자장 스님이 불국토임을 확인했던 부처님의 땅이다.

천 년 신라의 시작과 끝

불두를 잃어버린 채 좌정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세계사에서 천 년의 역사를 누린 나라는 많지 않다. 신라와 로마 말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유구한 신라의 역사는 경주의 작은 산 남산에서 시작됐고 남산에서 끝이 났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나정(蘿井)과 신라의 실질적 마지막 왕인 경애왕이 숨을 거둔 포석정이 모두 남산에 있다. 그 고금에 흔치 않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 부처님의 나라였으니 그 역사는 불사(佛史) 중의 큰 불사가 틀림없다. 더욱이 우리 불교 1,700년 중 천 년이 그 한 시대의 것이었으니 불사라는 생각에 이견은 없을 듯하다.

신의 산

경북유형문화재 제21호인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경주의 옛 이름은 서라벌.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거북이 한 마리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모양을 하고 있는데, 북쪽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4km, 남북 10km의 타원형 모양이다. 산은 높지 않으나 골이 깊고 능선이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잘 어울린다. 남산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서라벌에는 원래 산이 없었다. 맑은 시내와 너른 들판만이 있었다. 어느 날, 시냇가에서 한 처자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두 신(神)이 내려왔다. 산처럼 거대한 남신과 여신이었다. 신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서라벌 땅에 감탄했다. 하늘 아래 머물고 싶은 땅을 찾아낸 두 신은 감탄사를 외쳤다. 이때 빨래하던 처자가 신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놀라 신들을 보게 됐고, 신을 보고 놀란 처자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산이다!” 처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발아래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두 신은 걸음을 멈추었는데,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인간에게 모습을 들킨 두 신은 인간의 외침이 주문(呪文)이 되어 그대로 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의 부드럽고 포근해 보이는 망산(望山)이 되었고, 남신은 씩씩해 보이는 남산이 되었다. 전설이다. 그 후로 망산과 남산 주변에 많은 산들이 생겼다고 한다. 남산이 천년 불국토임을 생각한다면 전설 속 두 신의 근거는 불가(佛家)와 무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남산을 보는 길은 크게 3개의 코스가 있다. ▴삼릉(三陵)에서 용장리(茸長里)까지, ▴부처골에서 신선암까지, ▴포석정에서 금오정까지 가는 코스다. 그리고 동남산ㆍ남남산ㆍ서남산ㆍ삼릉 가는길ㆍ삼릉골 단축길 등 방위와 지역별로 나눈 코스가 있으며, 두 개의 자전거 하이킹 코스도 있다.

나무 반 불상 반…삼릉에서 용장리까지

닙술에 붉은 색이 남아 있는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그림 같은 소나무 숲이 길을 열어주는 삼릉에서 남산의 주봉인 금오봉을 거쳐 용장사지와 용장리까지 걷는 길은 남산의 대표적인 답사길이다. 약 4~5 시간 정도 소요된다.

삼릉에서 얼마 되지 않는 길에 불두가 없는 불상이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이다. 다가가 보니 두 손도 사라졌다. 땅 속에서 찾은 불상이라고 하니 머리와 두 손은 아마도 흙이 된 듯하다. 그렇게 고단해 보이는 여래의 형상이지만 선명하게 남은 법의(法衣) 자국 앞에 서면 이내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진다. 뜻 모를 글자라도 한 자 구해다 적고 싶고, 이름 없는 향이라도 한 자루 사르고 싶어진다. 여래의 법이 새삼 기막히다.

길을 계속하면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경북 유형문화재 19호)’ㆍ‘선각육존불(경북 유형문화재 21호)’ㆍ‘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三陵溪谷線刻如來坐像, 경북 유형문화재 159호)’ㆍ‘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ㆍ‘삼릉골 마애선각여래좌상’을 차례로 만난다. 숲엔 나무 반, 불상 반이다.

상선암은 남산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암자 중 한 곳이다.

가파른 계단 앞에 서면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들려온다. 상선암이다. 불국토인 남산에는 절보다 절터가 훨씬 더 많다. 상선암은 남산에서 몇 안 되는 암자다. 작은 법당 한 채와 후원 한 채가 남산 기슭 한쪽에 조용히 깃들어 있다. 남산이 내려다보인다. 힘들었던 걸음을 놓고 지나온 길과 발아래 펼쳐진 숲을 바라보면 모든 것들이 아득한 쪽으로 흘러가고, 또 아득한 쪽에서 다가온다. 상선암을 지나면 다시 상선암의 지붕이 보인다. 조금 전의 모습이 그렇게 또 아득한 곳에 가 있다. 상선암의 지붕이 사라지고 나면 건너편 산기슭에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158호)’이 나타난다. 거대한 암벽에 새긴 6m 높이의 불상이 사바를 내려다보고 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거대한 암벽에 새긴 6m 높이의 불상이 사바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불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불과 석탑이며, 석불 중에는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이 석조인 것은 남산에 질 좋은 화강암이 많고, 불교 전래 이전부터 바위 신앙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남산 바위 속에는 천상의 신들과 땅 위의 선신들이 머물면서 백성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숲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뀐 것이라고 믿었다.

금오봉 정상을 지나면 용장골이다.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186호)’이 산기슭 벼랑 끝에 등대처럼 솟아 있다. 땅의 것인지 하늘의 것인지 석탑은 마을의 늙은 촌장처럼 이 산 저 산에서 불어오는 온갖 바람을 맞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다.

삼층석탑 밑에는 용장사지가 있다. 그 흔적으로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과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그리고 ‘탑재와 석등대석’이 남아있다. 삼륜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모습의 석조여래좌상도 머리 부문이 사라졌다. 사라진 용장사는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 대현(大賢) 스님과 조선 시대의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인연을 남긴 곳이다.

용장사곡 삼층석탑. 거대 암반을 기단석으로 삼은 이 탑은 용장사 터가 이 곳임을 알려준다.

김시습은 조선 세조 때 출가하여 법호를 설잠(雪岑)이라 하였는데,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다고 하니 조선 중기까지는 용장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화천태사상을 깊이 탐구한 설잠 스님은 법화경의 각 품마다 찬(讚)·송을 붙인〈연경별찬(蓮經別讚)〉을 저술하였는데, 이후 효령대군의 추천을 받아 국역 〈묘법연화경〉을 교정보는데 동참키도 하였다.

용장사지를 지나 용장리까지 가는 길엔 골짜기 마다 간절한 적석탑들이 보인다. 그 중에 혹시 천 년 전의 것이 있을까.

너무도 극적인 자리…부처골에서 신선암까지

부처골에서 신선암까지 가는 길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의 전성기까지, 신라의 불교미술을 보여준다. 부처골부터 염불사지(남리 절터)까지는 도보와 차량을 병행하면서 답사가 가능하고, 염불사지에서 신선암까지는 도보로 올라가야 한다.

불곡 마애여래좌상. 신라 선덕여왕의 모습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부처골 입구에서 가까운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198호)’은 바위를 90cm나 파내어 감실을 만든 후 여래좌상을 모셨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있는 석불은 ‘장창골(長倉谷) 애기부처’, ‘배동(拜洞) 삼존불’과 함께 신라 석불로는 아주 이른 시기인 7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으로 인해 계곡의 이름을 부처골이라 부르게 됐다.

옥룡암 마당을 지나 솔숲에 이르면 높이 약 10m, 둘레 약40m의 거대한 바위에 부처님의 세계를 조각한 ‘탑곡 마애불상군(보물 201호)’을 만난다. 바위 사방에 목탑과 석가여래상, 비천상, 승려상, 보살상, 인왕상, 삼존불상 등이 새겨져 있다. 솔숲을 헤치고 쏟아지는 햇살이 남면의 삼존불을 비춘다. 햇살에 드러난 무뎌진 부처의 얼굴과 보살의 손끝은 수 없이 석불 앞을 지나간 중생의 생애 속에 있으리라. 이와 같이 여러 불상이 한자리에 새겨진 예는 보기 드문 일로 지금까지 34점의 비슷한 도상이 확인됐다.

보리사터에 남아 있는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보리사터에 남아 있는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136호)’과 ‘보리사 마애석불(경북 유형문화재 193호)’을 차례로 만나고 나면 남산리 사지의 ‘남산동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124호)’과 ‘염불사지 삼층석탑(사적 311호)’을 만난다. 두 절터 모두 남산이 시작되는 곳에 주춧돌을 놓았다. 사라진 절은 산이 되었고, 남겨진 탑은 남산의 저녁 그림자에 잠든다. 염불사지에서부터 약 1시간 정도 걸으면 칠불암과 신선암에 닿는다.

칠불암 마애불상군. 병풍바위에 새긴 삼존불과 사각돌기둥의 사면에 각1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칠불암에 들어서면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312호)’이 보인다. 가파른 산비탈을 깎고 높이 4m 가량의 축대 위에 모신 불상군이다. 병풍바위에 새긴 삼존불과 사각 돌기둥에 새긴 사면석불상으로, 모두 칠불이 모셔져 있다. 그 위로 약 50m쯤 올라가면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199호)’을 만난다. 오르기가 쉽지만은 않다. 급한 경사의 산길을 오르면 마지막으로 작은 벼랑 끝이 보인다. 벼랑의 모퉁이를 돌고나면 보살을 만난다. 단 한 걸음이면 된다. 한 걸음만 옮기면 보살 눈앞에 서게 된다. 보살의 눈에 비친 나를 볼 수 있고 보살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다. 이보다 극적인 자리와 이보다 극적인 노력이 또 있을까. 이 극적인 자리에 서면 아득한 그 천년의 근거가 너무나 궁금해진다.

길 끝에서 석탑은 또 부르고…포석정에서 금오정까지

이 길은 나라의 번영을 천신에게 바라던 포석정에서 시작하여 전망대가 있는 금오정까지 가는 길이다. 그 길에서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알려졌다가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拜里潤乙谷磨崖佛坐像, 경북 유형문화재 195호)’과 석양 무렵이면 부처님과 바위 전체가 황금빛을 발하는 ‘부엉골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늠비봉 오층석탑’ 등을 만날 수 있다. 늠비봉 오층석탑은 백제의 양식이 보이는 석탑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석탑은 또 저문다. 더 이상 갈 길이 없어 보이는 길 끝에 서서 중생을 또 부른다.

백제 양식의 늠비봉 오층석탑이 바위 위에 우뚝 솟아있다.

남산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뿐

“새긴 게 아니라, 찾아낸 거죠.”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61)은 남산에 모신 모든 마애불이 그렇다고 했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게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라고. 그렇다. 남산은 섣불리 설명할 수 없는 산이다. 산에 들어서면 길목마다 불상을 만나고, 길 끝에선 불탑을 만난다. 그저 돌이고 말았을 바위에 불보살이 깃들어 있고, 그저 길의 끝이고 말았을 벼랑 끝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말(言)로는 설명할 수 없고, 우리의 글로는 적어낼 수 없는 산, 그것이 천 년 불사의 땅 남산이다. 결국 남산을 설명하려면 부처님의 글자가 필요한 것이다. 천 년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선 부처님의 글을 깨치는 길밖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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