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천태불교사전 261호

법화천태의 소의경전과 교학 및 수행 용어, 인물, 저서, 사찰, 사건, 유물 등에 관한 사전을 편찬키 위한 천태불교문화연구원의 기획 집필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Saddharmapuṇḍarīka sūtra.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하였으며, 줄여서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한다. 7권28품으로 되어 있다. 묘법妙法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미묘하여 위없음을 뜻하며, 연화蓮華는 가르침의 미묘함을 연꽃 중의 최상인 백련白蓮에 비유한 것이다. 즉 ‘묘법연화경’이란 연화와 같이 미묘하고 부사의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 중의 하나이며, 대략 A.D. 50년에서 150년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여타의 대승경전에서 주로 소승불교를 비판함으로써 대승의 뜻을 선양하였다면, 본경에서는 대소승 모든 교설의 조화와 융섭을 지향하고 있다. 부처님이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삼승三乘으로 설한 것은 방편[權]이었으며, 궁극에는 모두 일불승一佛乘으로 이끌고자 한 것이 진실[實]임을 밝힌다.

또한 경의 후반부에서는 영원한 부처님[久遠實成佛]의 참모습에 대하여 찬탄한다. 석가모니불의 수명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실상이지만, 방편으로써 유한한 모습으로 열반을 보인 것임을 밝힌다. 이와 같이 일불승一佛乘과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심오한 가르침을 뛰어난 일곱 가지 비유[法華七喩]를 통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본경의 커다란 특징이다.

본경의 이역본異譯本으로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286)과 사나굴다闍那崛多·달마급다達磨笈多가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601)이 있다. 주석서로는 인도에서 일찍이 세친世親이 저술한 『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憂波提舍』2권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법운法雲의 『법화의기法華義記』8권, 지의智者의 『법화문구法華文句』10권, 길장吉藏의 『법화의소法華義疏』12권과 『법화현론法華玄論』10권, 규기窺基의 『법화현찬法華玄贊』20권 등이 있다. 천태 지의는 본경의 제법실상과 원융사상에 의거하여 교문敎門과 관문觀門을 체계화하여 중국의 천태종의 확립하였다.

천태대사【天台大師】(538~597) 중국 형주荊州(湖北)의 화용華容 사람이며, 속성은 진陳, 자字는 덕안德安이며 법명은 지의智顗이다. 7세 때부터 가람에 가서 스님으로부터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듣고 한 번에 외웠다고 한다. 18세에 과원사果願寺의 법서法緒 문하로 출가하였다.

23세에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으로 가서 혜사慧思(515-577)로부터 보현도량과 사안락행四安樂行을 전수받아 법화삼매의 전방편前方便을 증득하였다. 31세에 수도인 금릉金陵으로 가서 『법화경』과 『대지도론』을 강의하고 『차제선문次第禪門』 등을 설하면서 선법을 지도하였다.

모여드는 대중들을 뒤로 하고, 38세(575)에 천태산에 들어가서 11년간을 정진한다. 입산한 지 8년 무렵, 화정봉에서 두타행을 하던 중 어느 날 신승神僧을 감견感見하여 항마성도降魔成道에 이르며 일실제一實諦를 크게 깨달았다. 천태산에서 내려와 금릉으로 가서, 광택사에서 50세 때 『법화문구』를 강설하였다.

후에 고향인 형주로 가서 옥천사玉泉寺를 건립하고, 56세에 『법화현의』를, 그리고 이듬해에 『마하지관』을 설하여, 이로써 천태삼대부의 강설이 완성되었다. 54세(591) 때에는, 진왕晉王 광廣(隋焬帝)의 청으로 양주揚州에서 그에게 보살계를 주니, 진왕 광은 대사에게 ‘지자智者’라는 호를 바쳤다.

개황開皇 17년 11월, 춘추 60세로 입적하였다.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들에게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독송하도록 하고 그것을 들으며 아마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영접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다른 곳에서 스승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바라제목차[계율]가 너희들의 스승이며 사종삼매四種三昧를 닦음이야말로 너희들의 도사導師로 삼아야 한다.”

제자 가운데 관정灌頂·지월智越·지조智璪 등이 유명하며, 특히 관정(561-632)은 그의 모든 강설을 기록하고 집대성하여 이후 천태종이 성립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청사【國淸寺】 ① 중국 천태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절강浙江성 천태현天台縣 북쪽의 천태산天台山 불롱봉佛隴峰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수隋 개황開皇 18년(598) 진왕晋王 광廣(煬帝)이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538-597)를 위하여 창건한 절이다.

처음에 정광선사定光禪師라는 분이 이 봉우리에 주석하였는데, 일찍이 제자들에게 “장차 위대한 선지식이 대중을 이끌고 이 산으로 올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오래지 않아 지자智者대사가 강을 건너 이곳으로 와서 불롱봉 남쪽에 절을 지었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진왕 광은 매우 슬퍼하며 지자대사를 위하여 천승재千僧齋를 베풀고, 계속해서 사찰을 건립하여 완성시켰다.

처음에는 천태산사天台山寺라고 이름 하였다. 그런데 지자대사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 정광선사가 꿈에 나타나 ‘삼국(북주北周、북제北齊、진陳)이 합하여 하나가 되면, 큰 권세 있는 분이 나타나 절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절이 완성되면 나라[國]가 깨끗해지리니[淸], 마땅히 국청사國淸寺라고 이름 하라.’고 한 바가 있어, 그에 따라 수隋 대업大業 원년(605)에 ‘국청사’라는 편액을 내려 개명하였다.

절이 낙성된 후에 이곳에서 장안 관정章安灌頂(561-632)이 대중을 이끌어 천태종의 근본도량이 되었으며, 이해[解]와 실천[行]을 겸비한 뛰어난 승려가 많이 배출되었다. 당唐 정원貞元 연간 이후에는 최징最澄·의진義眞·원재圓載·원진圓珍·성심成尋·영서榮西 등 많은 일본 유학승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모두 지자대사의 탑묘를 참배하고 천태의 교법을 배우고 불상과 경론 등을 청하여 가지고 돌아가 일본불교에도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1에 따르면, 국청사에는 항상 150여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하안거를 마칠 때에는 300명이상이 있었다고 하니, 그로써 당시 사찰의 융성함을 짐작할 수 있다. 후에 당唐 회창훼불會昌毀佛(843-844) 때에, 사찰이 병화兵火로 불에 타서, 851년에 중건하고, 1005년(宋 景德2年)에는 ‘경덕국청사景德國淸寺’라고 개칭하였다. 후에 또 병화의 화를 입어 수많은 전적이 불에 타버렸으나, 지자대사가 제목을 쓴 법화경[蓮經]과 서역西域의 패엽경貝葉經 1권 그리고 수隋 전단불상栴檀佛像과 부처님 치아[佛牙]만은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1128년(南宋 建炎2年)에 칙령으로 사찰이 중수重修되어 도량이 더욱 넓고 아름다워졌으며, 1130년에는 조서를 내려 교敎를 선禪으로 바꾸게 하여, 국청강사國淸講寺를 선사禪寺로 개칭改稱하였다. 그 후 지원至元 년간(1335~1340)에, 성징대사性澄大師(1265—1342)가 상소를 올려 다시 천태종의 근본도량으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조물은 대략 청나라 옹정년간(1723-1735)에 세워진 것이다.

② 고려시대 천태종의 중심도량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에 있었던 사찰이다. 대각국사의 생모이자 문종의 비인 인예태후(仁睿太后)가 천태종을 널리 펴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숙종이 이어서 공사를 마쳤다. 결국 선종6년(1089)에 착공하여 9년만인 숙종2년(1097)에 준공되었다. 국청사가 낙성되자 숙종은 조칙으로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으로 하여금 주지를 맡도록 하였다.

국청사의 주지로 취임한 의천은 처음으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설하면서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멀리 생각하건대, 해동에 불법이 전래한 지 7백여 년에 비록 여러 종파가 다투어 연설하고 모든 교가 퍼졌지만, 다만 천태의 한 분야가 밝은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 옛적에 원효보살이 먼저 훌륭함을 칭찬했고, 뒤에서 제관법사가 전하여 드날렸다. … (중략) … 천태산 국청사와 천축의 교관을 이어 받고 불롱佛隴과 고산孤山에서 … (중략) …(지자대사)탑묘에 목숨이 다하도록 법등法燈 전할 것을 정성으로 맹세하였더니, 이제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도다.” 이로부터 의천은 국청사에서 천태의 교관을 강설하였고, 이후 그의 제자 교웅敎雄(1076-1142)도 이곳에서 경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국청사는 인예태후의 원찰願刹이기도 하였으므로, 진전眞殿이 이곳에 있어서 기일에는 행향行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인예태후가 조성한 13층 황금탑을 1105년(숙종10)에 이곳에 봉안하였다. 하지만 국청사는 몽고의 2차 침입 때 모두 불타버렸다. 충선왕이 즉위한 후 무외국통無畏國統 정오丁午로 하여금 이곳에 주지하게 하고, 절을 중수하게 하였다. 이에 무외국통은 금당을 새로 짓고 1313년(충숙왕 즉위년)에 석가삼존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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