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사회에서 크고 작은 분쟁(紛爭)은 피해갈 수 없나 봅니다. 분쟁이란 쉽게 말해 다툼을 말합니다. 언어·종교·문화·경제·정치 등 어느 분야에서든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처음 사소하게 시작된 다툼이 극한 상황으로 번져 도저히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인류사회는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즉 갈등과 대립이 분쟁이 되고 분쟁이 전쟁으로 치닫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게 인류사회의 현실입니다.

인류사회가 복잡다단해질수록 분쟁의 내용도 보다 구체화되고 세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각종 분쟁위원회가 생겨나 개인과 개인, 개인과 단체, 단체와 단체 간 분쟁사례를 조정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일례로 층간소음, 주차난 등 아파트 주민들 간 갈등이 커지자 정부는 ‘공동주택관리 중앙분쟁조정위원회’를 두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위원회는 관리비, 층간소음, 리모델링 등에 관련된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위원회가 조정한 결과는 분쟁당사자 모두가 합의할 경우 재판상 화해의 효력을 갖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정 신청 전 당사자들이 충분한 협의를 거쳐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게 중요합니다. 당사자들 간의 화합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엔 현재 수많은 분쟁조정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료분쟁조정위, 소비자분쟁조정위, 콘텐츠분쟁조정위, 환경분쟁조정위, 건설분쟁조정위,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 하자심사분쟁조정위, 개인정보분쟁조정위, 공공데이터제공분쟁조정위, 산업기술분쟁조정위 등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각 분야에 걸쳐 사람들의 갈등과 다툼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분쟁은 사회적 병폐이기도 하지만 자칫 범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층간소음과 주차시비 등으로 인해 상대를 살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쟁조정위원회가 아무리 많다 해도 중요한 것은 당사자 간 화합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부처님은 먼저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십니다. 그 이유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서로가 말로 다툼을 벌이고, 견해(見解)의 고집(固執)을 보이며, 마음이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즉 부처님은 “다툼을 일삼는 자들은 여러 목소리를 내면서 아무도 자신이 어리석다 생각하지 않는다. 승가가 분열할 때도 아무도 자신의 허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명한 대화는 잊어버리고 말꼬리만 물고 늘어진다. 입이 움직이는대로 마음대로 지껄여 무엇에 이끌려 그러는지 그것을 모른다.”고 경책하시며 이러한 이치를 아는 자만이 분쟁을 멈추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분쟁을 겪게 될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7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분쟁을 일으킨 사람을 대중 앞에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일종의 대중공사(大衆公事)인 셈입니다. 둘째는 문제의 발단을 정확하게 기억해내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분쟁을 해결하는데 포인트가 빗나가지 않습니다. 셋째는 허물을 지었을 때 어떤 이유로 정신이 혼미하였지만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 자신의 잘못을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일입니다. 이것 또한 분쟁을 해소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넷째는 본인이 자백해서 분쟁을 없애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 방법에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쓰이는 방법이 다섯 번째로 대중들이 다수결로 분쟁을 없애주는 일입니다. 앞서 열거했던 각종 분쟁조정위원회가 바로 이 같은 방법을 쓴다고 보시면 무방합니다. 여섯째는 허물의 증거를 찾아서 분쟁을 없애는 일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을 때 쓰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증거를 들이대야 잘못을 인정합니다. 증거는 이런 점에서 매우 요긴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는 증거나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들은 풀로 땅을 덮듯 분쟁을 없애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고집과 말싸움으로 이루어진 분쟁은 쟁론화하지 말고 그냥 묻어두라는 의미로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대승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주문하십니다. 즉 분쟁을 해결할 때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상대에 대한 증오를 자비(慈悲)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자비는 상대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증오와 적의(敵意)가 대립을 만들고 분쟁을 초래합니다.

불교는 투쟁 대신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가장 작은 생명일지언정 그들과도 조화와 평화가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립과 투쟁의 원인은 탐욕과 그릇된 견해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탐욕의 원인은 ‘내 것’이라는 아집(我執)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펼쳐야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또는 경제적 약자가 눈물 흘려야 하는 구조는 진정한 평화를 구현하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이들까지 모두 포섭하고 균등하고 평화롭게 어울릴 때 분쟁 대신 정토사회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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