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하다 앉은뱅이에 장님 … 왕자로 환생

2017년 첫 법화(法話)는 대각국사 의천(義天) 스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다시 그려 보아도 아름다운 설화가 동반되는 스님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고려 문종(文宗) 때였고 중국 송나라 인종(仁宗) 시절이었습니다.

중국 땅 호숫가 어느 암자에 세상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스님 한분이 상좌 하나를 데리고 염불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상좌가 하였기 때문에 이 스님은 산문 출입을 하지 않고, 오로지 〈법화경〉을 독송하며 관세음보살님께 발원하는 진실한 염불수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삼생의 인과응보를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염불을 하던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출가수행자로서 그까짓 육신의 병쯤이야 마음에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대소변을 비롯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어린 상좌에게 미안하였을 뿐 불필요하게 다닐 일이 없게 되어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스님은 또 다시 두 눈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이번에도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공부하기에는 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염불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던 스님이 어찌해서 앉은뱅이가 되고, 장님까지 되었는가? 부처님도 무심하다고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는 스님 노릇을 잘 못하여 부처님께 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소낙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 날, 스님은 벼락을 맞아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정성으로 시봉을 하고 있던 상좌스님은 너무나 허망하고 기가 막혔습니다.

“정성으로 〈법화경〉을 외우고 관세음보살님을 독송하면 죽어서 극락왕생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 스님이 벼락을 맞아 돌아가시니 누가 불교를 믿겠는가? 〈법화경〉도, 관세음보살님도 영험이 없다.”

상좌는 통곡을 하다가 돌아가신 스님의 왼 손바닥에 ‘부처님은 영험이 없다(佛無靈驗)’고 쓴 뒤 다비를 모시고, 스승한테 배운 대로 열심히 염불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 즈음 고려에서는 문종이 즉위한지 9년이 되어 왕실과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는 자리에서 인예왕후가 은밀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마마, 기뻐하여 주십시오. 저에게 태기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간밤에는 태몽을 꾸었습니다.”

“그렇다면 태몽을 말해보오.”

“하늘에서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서 천지를 뒤덮었습니다.”

“오! 하늘의 뜻이로다. 이제야 짐의 소원이 하늘에 닿았음이로다.”

하늘의 뜻이란 곧 의천(義天)이니 문종은 왕후의 태몽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려 하늘과 땅을 덮었으니, 이는 필시 땅에서 하늘에 맞닿는 큰일을 도모할 징조임에 틀림이 없었던 게지요. 문종은 백성들에게 선언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들어라. 이제 우리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지기(地氣)를 튼튼히 해야 한다. 마침내 우리 고려가 기다리던 성천자가 태어날 것이니 지신(地神)을 달래고 지기를 튼튼히 하여 고을마다 성심을 다하여 그 뜻이 하늘에 이르도록 하라!”

우리 민족에게는 서낭당 같이 민족 대대로 믿어오던 지신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고갯마루나 산등성이 마다 돌무덤을 쌓아올렸고, 천 년 묵은 고목에 골탑을 쌓으며 나라의 안녕을 빌던 곳이었습니다. 전란 때는 이 돌을 던져 적을 무찌르는데 쓰기도 하였지요.

그렇게 왕실과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서낭당을 만들어 지기를 돋우던 무렵, 드디어 천지를 뒤흔드는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넷째 왕자가 태어났습니다. 문종이 생각한대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행할 성천자일 테니 그 이름을 ‘의천’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나 왕실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큰 근심거리로 변했습니다. 유달리 우렁찬 왕자의 울음소리가 끊일 줄을 모르고 몇 날이고 계속 이어지기만 하였던 것이지요. 한 번 울기 시작한 왕자는 계속 울기만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문종은 의원을 불러 약을 쓰고 별짓을 다 해 보았지만, 왕자의 울음을 그치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울다가도 어디서 목탁 소리만 들리면 울음을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문종이 신하들을 시켜서 그 목탁 소리가 나는 곳을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귀가 밝은 신하는 목탁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한없이 따라 갔습니다. 그 소리는 바다 건너에서 은은하게 파도를 타고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놀랍게도 중국 땅 항주(杭州) 근처의 조그만 암자였습니다.

그곳에 젊은 스님이 한 분이 홀로 앉아 열심히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시오?”

“고려에서 온 사신인데 이 절에 계신 도승을 만나러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호수에 절을 지어 임금님께서 절 이름까지 내려주신 명찰이긴 하나, 고승은커녕 소승도 없습니다.”

“그럼 아무도 없단 말이오?”

“얼마 전에 많았지만 부처님의 영험이 없다고 모두 떠나버리고, 이렇게 혼자 남아서 절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목탁은 누가 쳤습니까?”

“그야 물론 제가 쳤지요.”

“아무리 영험이 없는 불상일지라도 예불은 해야 하니까요.”

그제야 신하들이 합장을 올리고 자신들이 그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해주자,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스님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왕자님을 뵈옵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신하들과 함께 고려로 온 그 스님이 왕자의 손을 만지자 그토록 울던 울음을 그치며 쥐고 있던 손을 펴는데, 그 손바닥에 ‘부처님은 영험이 없다(佛無靈驗)’ 라고 쓴 글자가 그대로 선명하게 쓰여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문종과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왕자님은 전생에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천성이 근면하여 돈을 우물 안에 저축한 뒤 그 돈으로 호수에 절을 짓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임금님이 치하하고 절 이름까지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1년 만에 그만 앉은뱅이가 되어 불편하게 되더니, 다시 장님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다가 끝내는 벼락을 맞아 입적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부처님도 영험이 없다고 떠나버렸습니다. 저도 원통하고 분해서 스님을 장사지낼 때 ‘무불영험(佛無靈驗)’이라고 써서 관 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왕자님으로 환생하시다니 이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어린 왕자의 귀에다가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스승님! 이제 염불 공덕으로 인간 세상의 왕자로 환생하셨으니, 지난 일은 모두 잊으시고 스님의 원력대로 불사를 성취하십시오.”

그제야 왕자는 방실방실 웃었습니다.

이 분이 바로 문종의 넷째 왕자로 이름은 후(煦)이며, 자는 의천(義天)인 대각국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훗날 마침내 천태종의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처님 법을 두고 서로 옳다고 다투는 이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던 것입니다.

“토끼 뿔은 실재하지도 않는데 한쪽에서는 길다고 우기고

한쪽에서는 짧다고 우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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