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있는 여행지 260호

순천만 갈대밭.

미다스왕의 이발사는 왕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발사는 하루하루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이발사는 들판으로 나가 구덩이를 파고 작은 목소리로 왕의 비밀을 속삭였다. 그리고 흙으로 구덩이를 덮어 왕의 비밀을 봉인했다. 그 후, 그 자리엔 갈대가 피었고 바람이 갈대를 흔들 때마다 갈대는 왕의 비밀을 속삭였다.-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바람결에 갈대밭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바로 그 비밀이었다.

그렇게 갈대는 비밀의 씨앗이 피운 꽃이며 속삭임의 운명을 타고난 풀이다. 자신의 초록빛 생명을 온 우주에 다 내어주고 나면 갈대는 그때부터 텅 빈 몸뚱이로, 삶을 다한 몸뚱이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속삭임은 온 세상의 비밀들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 알게 된 생사의 비밀이다. 이 겨울, 세상의 온갖 비밀과 생사의 비밀을 들려주는 갈대의 속삭임을 들으러 가자. 텅 빈 몸으로 차가운 바람을 견디고 있는 갈대를 보고 오자. 그리고 돌아와 다시 이 겨울을 살자. 우리 땅에서 가장 큰 갈대밭이 있는 순천이다.

순천만 갈대밭.

세계 5대 연안습지 순천만 갈대밭

멀리 갯벌 위로 바닷물이 다가온다. 갯벌 끝에선 검은 왜가리 한 마리가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다. 왜가리의 분명한 시선이 지금 이 순간의 갯벌과 바다를, 그리고 이 순간을 스쳐가는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세계 5대 연안습지로 불리는 순천만이다.

아름다운 순천만 풍경.

690만 평의 갯벌은 갈대밭과 칠면초 군락, S자형 수로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해안생태경관을 보여준다. 순천만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최우수자연경관’이다. 또한 2003년 해양수산부가 습지보존지역으로 지정했으며, 2006년에는 우리나라의 연안습지로는 최초로 람사르협약에 등록돼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갯벌에는 갯지렁이류와 각종 게류, 조개류 등 다양한 갯벌 생물들이 서식하고,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와 먹황새,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한 흰목물떼새, 방울새, 개개비, 검은머리물떼새 등 11종의 국제 희귀 조류와 200여 종의 조류가 이곳을 찾는다.

순천만 갈대길.

순천만 갈대밭으로 가려면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 입장해야 한다. 공원에 들어서면 곧장 갈대의 기별이 들려온다. 160만 평의 갈대밭이 바다의 흔적 위에서 또 하나의 바다로 일렁인다. 160만 평의 갈대밭은 끝이 없어 보이는 바다보다도 더 끝없어 보인다. 갈대밭과 갈대밭 사이를 걸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속삭임을 듣고 있으면 바람도 갈대도 모두 ‘언어’로 다가온다. 인간의 언어보다 훨씬 오래 된, 훨씬 더 분명한 언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천만 갈대길.

그렇게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에서 세상의 비밀이 들려오지만 우리는 그 비밀은 알아들을 수 없다. 그야말로 ‘비밀’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세상의 비밀을 속삭여주고 있건만 우리는 그 비밀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외온 해변.

바람과 갈대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한참을 걸으면 갈대밭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그 앞엔 작은 산이 하나 서있다. 이 산엔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승천할 때가 된 용이 승천하다가 순천만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용은 여의주를 바다에 던지고 산이 되었다. 용산이다. 이 용산전망대(공원 입구에서 약 2km)에 오르면 순천만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용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바다와 육지와 갈대밭이 어우러진 비경은 승천하는 용의 마음을 돌려세우고도 그 이유가 남는다. 그 감탄스러운 풍경들이 세상의 비밀이다.

순천만 갈대길, 순천 드라마 촬영장

순천 드라마 촬영장 - 60년대 순천 읍내.

용산전망대에서 남도삼백리길 중 하나인 ‘순천만 갈대길’을 따라 약 4km정도 걸으면 와온해변에 닿는다. 한 쪽에선 물 빠진 갯벌이 한 발 한 발 곁으로 따라오고, 한 쪽에선 듬성듬성 갈대들이 지나간다. 멀리 갯벌 끝에서 작은 섬 하나가 차가운 바람을 견디고 있고, 갯벌 한 쪽엔 이름 모를 겨울풀들이 바다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풀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나면 갯벌은 멀리서부터 바다를 준비한다. 바다가 된 갯벌이 누웠던 배를 세우고, 철새들은 바다 위를 날기 시작한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드라마틱하다. 서로 알지 못하는 비밀들이 모여 이 순간을 극적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 - 70년대 서울 봉천동 달동네.

순천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명소가 하나 있다. 순천드라마촬영장이다. 2006년 방영된 SBS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세트장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30여 편의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순천드라마촬영장은 시대별 3개의 마을로 되어 있는데, 60년대 순천 읍내 거리, 70년대 서울 봉천동 달동네 그리고 80년대 서울 변두리 거리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그 옛 시절들을 보고 걷고 나면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모두 갈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삶의 비밀을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비밀의 속삭임을 들으며 살아가는 가는 것이 ‘삶’ 아닐까. 순천에 가면 그 비밀들과 좀 더 가까워진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에서, 갯벌을 따라 걷는 해변에서, 그리고 옛날을 그려놓은 촬영장에서 많은 비밀들이 들려온다. 알 수 없는 비밀이지만 듣지 않을 수 없는 비밀들이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 - 80년대 서울 변두리.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