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260호

사명당 유정 진영. 보물 제1505호. 대구 동화사 소장. ⓒ문화재청

 1. 갈등의 노래

사명대사의 갈등은 내면적으로는 출가 수행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갈등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심법을 받아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자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의승병을 모아 참전했다.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심정을 노래한 시가 ‘시월 삼일에 눈이 오기에 회포를 적다’이다.

하늘의 찬 기운이 이르러
흰 눈이 함박만 하게 오네.
적두(赤頭)와 녹의(綠衣) 종횡으로 줄을 잇고
어육(魚肉)된 우리 백성 길가에 즐비하네.
통곡하고 통곡하도다.
날은 저물어 산은 희뿌연 한데
요해(遼海)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하늘 한쪽 바라보며 임금님 기리네.

임진년 의승병을 이끌고 평양으로 가면서 처참히 죽은 백성들이 길가에 즐비한 현장을 보고 통곡하면서, 피난 간 임금을 걱정하고 쓴 시이다.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산문을 나와 전쟁터로 나아갈 수밖에 없던 사명대사였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명대사는 한시바삐 산으로 돌아가 수행에 전념하기를 갈망했지만, 조정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산성을 쌓고 궁궐을 복원하는 데 의승병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노래한 시가 여러 편 있다.

‘기해년 가을에 변주사와 헤어지며’

조정의 명령 받들어 군문(軍門)에 내려오니
변방과 본토의 산하가 여기에서 나뉘누나.
사해의 풍진 속에 전장을 누비며
십 년 수자리에 다시 종군한다오.
성 모퉁이 지는 해에 돌아오는 새를 보면서
하늘 밖 돌아가고픈 마음 가는 구름 바라보네.
정령 어느 날에 요기(妖氣)를 소탕하고
쇠향로의 재 헤치며 세향(細香)을 사를거나.

전쟁이 끝난 기해년(1599)이지만 조선 땅은 전쟁의 잔재들이 남아 있었다. 조정의 명령에 의해 성곽을 축조하고 변방을 지키는 일로 종군하면서 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에 비유하였다.

‘진천을 지나가며’

중양절 옛 역에서 검을 안고 슬퍼하니
오직 달이 따라와 병든 몸을 비춰주네.
형봉(衡峰)의 토란구이 참으로 내 소원이니
벼슬길 살진 말 타는 게 어찌 내게 맞으랴.
바다에서 십 년 수자리 헛되이 보내었는데
향성(香城)으로 돌아갈 날 언제리오.
맑은 하늘에 외기러기는 강동으로 날아가는데
꺼져 가는 등잔 앞에 해진 옷만 부여잡네.

병든 몸으로 주장자 대신 칼을 쥐고 중양절을 맞이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자신은 오직 산으로 돌아가 수도하기를 바랄 뿐, 세속의 벼슬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10년이나 산속을 나와 떠돌아다녔는데 언제쯤 산으로 돌아가 수행자로서 살 수 있을까라고 노래하고 있다.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고, 이제 전쟁이 끝났음에도 산속으로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에 갈등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기해)년부터 일본은 조선과 강화를 요구하며 대마도주 소오요시토시(宗義智) 등이 여러 차례 찾아왔으나 조선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강화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①강화문제는 명나라와 상의해야 하고, ②일본에 대한 원한과 불신, ③조정 내 파쟁으로 갑론을박이 되풀이 되며 결정이 나지 않고, ④조정의 중신들이 일본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불구대천의 원수와 화친을 맺을 수 없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조선 땅을 짓밟고 백성들을 살육한 일본과의 깊은 갈등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던 중, 1604년 다찌바나(橘智正)가 와서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이라면서 강화를 강청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임진왜란과 같은 변란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하므로, 조정에서는 우선 사명대사를 보내야겠다고 결정하였다.

조정은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임시방편으로 일본의 거센 강화요청을 무마하고자, 정식 사신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국서(國書)를 주지도 않고 사명대사를 일본에 보냈다.

탐적사로 일본으로 들어가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시가 여러 편 남아있다.

‘적관의 바다에서 밤에 묵으며’

잘못되었도다, 내 삶이여.
아아, 이제 그만 두었으면.
지나온 예순 두 해
태반을 길거리에서 보냈구나.
머리는 희어도 마음은 희지 않고
모습은 말랐어도 도는 마르지 않았다오.

비록 세속에 나와 전장을 누볐고 일본까지 오게 된 인생이 잘못된 일이며, 그만 두고자 하지만 구도의 마음은 변함없으니, 몸은 늙었으나 도는 마르지 않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2. 치유의 몸짓

갈등의 구성요소로는 쟁점, 사람, 의사소통을 들 수 있는데,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함에 사명대사는 이 모두를 갖춘 적임자였다. 사명대사는 무공이 뛰어난 장수나 화술이 능한 달변가여서가 아니라 수행을 통한 지혜와 법력(法力)이 높은 고승이기에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미 왜장 가또 기요마사(加籐淸正)와 왜승들과 신뢰를 구축하고 의사소통을 했다. 적진에 들어가 가또 기요마사에게 “네 목이 보배다.”말했고, 이를 가또 기요마사가 일본에 전함으로써 일본에서도 사명대사는 설보(說寶) 화상으로 알려졌다.

사명대사는 쟁점요소인 조선과 일본의 요구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요소인 정치ㆍ경제ㆍ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행력을 갖추고 있었다, 의사소통의 요소인 이성과 논리뿐만 아니라 감정을 서로 나누었으므로 갈등을 해결할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는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해결할 적임자였다.

사명대사는 조·일 양국의 입장과 이해득실을 간파하여 전란 중에 납치되었던 피뢰인의 송환을 요구하고, 일본은 국교회복의 상징으로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본인이 귀국하면서 끌려갔던 동포 1,391명을 쇄환했고, 이후 지속적인 동포 송환을 요구하여 사명대사가 입적하기 전까지 3,775명을 쇄환했다.

이후 260년간 동북아시아가 한차례의 전쟁과 분쟁이 없이 안정과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명대사가 개척한 조선통신사외교의 최대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사명대사는 언제나 불상생의 계율과 현실적 참전의 필요성, 이상과 현실, 승(僧)과 속(俗) 사이의 갈등과 고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자기 내면의 갈등을 인식하고 있었고 갈등을 자비심과 중생구원의 실천으로 치유했다.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은 도일(渡日)하여 지은 여러 시와 귀국하여 일본 승려들에게 보낸 글에서 알 수 있다.

교또(京都) 혼묘지(本法寺)에서 지은 시에

‘마음의 달은 휘영청 밝아 빛이 갈수록 선명하고
자비의 꽃은 옥산처럼 고독하고 견고해라.

고 노래하고 있다. 자기 마음은 달빛처럼 선명하고, 자비의 꽃은 고독하지만 견고하다고 했다.

왜승 쇼타이(承兌)의 시운을 따라 지은 시에서는

창생을 널리 건지려는 무궁한 이 뜻이여
우리 남선(南禪)의 손쓰는 중에 있다 하리라.

고 노래하고 있다.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돌아와서도 동포들의 쇄환을 바라는 심정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교류했던 왜승 겐소(玄蘇, 仙巢)에게 보낸 글에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왔다며, 생령을 모두 쇄환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왜승 겐키츠(元佶)에게는 ‘나의 본원은 오직 적자(赤子)를 모두 쇄환하여 생령(生靈)을 널리 구제하라는 선사의 가르침에 부응하려고 했던 것’이라며 생령을 쇄환하기 위해 대장군에게 나아가 고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렇듯 끌려간 동포를 송환하려는 사명대사의 바람은 중생구제라는 자비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사명당 유정 진영. 보물 제1505호. 대구 동화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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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헌(李哲憲)
1958년 태어났다. 동국대학교에서 석ㆍ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나옹혜근의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를 맡고 있다. ‘사명당 유정의 名ㆍ字ㆍ號’, ‘표충사 춘추제향의 역사와 설행’ 등 사명당과 표충사 관련, 다수의 연구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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