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260호

가수 데뷔 60년을 맞아 최근 기념음반을 발매한 원로가수 송춘희 씨.

송춘희 백련장학회장
한평생 백련 향기 퍼뜨려 온
이 시대의 건달바

한 곡의 노래는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삶이 힘겨울 때 위안이 되어주고, 잊고 있던 추억을 아련히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는 건 노래만이 가진 힘이다. 한 곡의 노래는 한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수덕사의 여승’(1966년)을 부른 원로가수 송춘희(80) 씨가 대표적인 예다.

스무 살에 데뷔해 60년을 노래와 함께 살아온 여가수는 어느덧 여든의 할머니가 됐다. 최근 ‘인생 80년, 데뷔 60년’을 기념해 음반을 발매한 원로가수 송춘희 씨는 11월 2일 서울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행사를 이틀 앞둔 10월의 마지막 날, 서울 대흥동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사무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한 모습의 그녀에게 근황과 함께 건강 비결을 물어봤다.

“오늘이 초하루여서 제기동 법화정사에서 〈법화경〉 사경을 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동안 〈법화경〉을 한글로 열 번, 한문으로 세 번 썼어요. 〈반야심경〉도 백 번 썼고, 〈금강경〉은 스물일곱 번 썼네요. 사경에 폭 빠져 살고 있어요. 평일엔 느긋하게 일어나 운동(아쿠아로빅)을 다녀온 후, 경전 독송을 하고 바깥일을 봅니다. 매주 수·금요일엔 교도소 포교를, 주말엔 빠지지 않고 군법당을 찾아요. 요즘 허리디스크가 생겨서 경기도권을 벗어나진 못해요. 그래도 매주 젊은 군장병들의 기를 받아서인지 젊게 보이나 봐요.(웃음)”

‘보살’, ‘법사’로 불리는 대표 불자가수

1960년대 후반, 하얀 고깔을 쓰고 ‘수덕사의 여승’을 부르고 있는 송춘희 씨.

송춘희 씨는 우리나라 대표 불자가수다. 그녀의 이름 뒤에는 항상 ‘보살’, ‘법사’란 호칭이 따라붙는다. 가수 인생 60년 중 포교사로 살아온 인생이 40년을 넘다보니 ‘가수’라 불리기보다 ‘보살’, ‘법사’로 불리는 게 더욱 친숙할 만도 하다.

1937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인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학예회가 열리면 매번 노래솜씨를 뽐내곤 했다. 수원여고를 졸업할 무렵, 대학에 진학해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가세가 급격히 기운데다 부친의 병환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팔남매의 맏딸, 송춘희는 하루아침에 소녀가장이 되었다. 한 살 배기 막내 동생을 등에 업고 악극단 오디션장을 찾아간 건 갓 스물이 된 소녀가장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구책이었다.

“악극단에서 노래를 부리기 시작한 게 1956년인데, 부친은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후손이 딴따라가 웬 말이냐!’며 엄청 반대했어요. 매도 많이 맞았죠. 그래서 아버지를 피해 지방공연만 다녔어요. 지방을 전전하다보니 여관비가 밀리고, 배를 곯는 일도 잦았어요. 그땐 점심 값을 못 받아도 노래 부르는 게 마냥 즐거웠어요.”

악극단은 결국 몇 해 뒤 해체됐다. 이후 극장과 나이트클럽 공연을 전전하다 오민우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1963년 ‘삼다도 편지’, ‘울산 방어진’ 등의 곡으로 데뷔했지만, 가수 송춘희를 세상에 알린 노래는 1964년 부른 ‘영산강 처녀’다. 그리고 1966년 부른 ‘수덕사의 여승’은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두 곡의 히트로 1967년부터 5년 연속 ‘10대 가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지만, 수입은 크게 늘어 이렇게 번 돈으로 부모님을 포함한 열 식구의 생활비와 일곱 동생의 학비를 댔다.

그녀의 집안은 목사가 5명이 있을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집안이다. 그녀 역시 10대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 다녔다. 이런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건 히트곡 ‘수덕사의 여승’이다.

“1966년 ‘수덕사의 여승’을 부를 때까지만 해도 불교에 대해선 손톱만큼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 노래가 요즘말로 대박을 친 거예요. 매일 극장 다섯 곳에서 4회씩 20회를 불렀어요. 야간업소도 여덟 군데를 돌았죠. 그런데 공연 때마다 진행자가 ‘수덕사에 가봤느냐?’고 묻는 거예요. 당시 수덕사는 교통이 좋지 않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없어서, 대신 가까운 사찰을 찾아 법당에 들어갔어요. 절도 할 줄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데 부처님을 바로 보니 빙그레 웃으시더군요.”

부처님의 미소는 교회 대신 절을 찾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불자가 된 건 아니고, 절의 분위기가 좋고, 부처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이 무렵 수덕사 견성암의 일엽 스님 문도들이 찾아와 ‘노래하지 마라’, ‘가사를 바꿔 달라’며 거칠게 항의하기도 했다. 노래가 신여성으로 문필을 날렸고, 두 번 결혼했다가 출가한 일엽 스님을 떠올리게 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 걸음씩 불교에 다가섰다.

숭산 스님이 지어준 법명 ‘백련화’

1980년대 후반,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대중법회 모습이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인회 위문공연차 캐나다에서 공연을 하는데 객석에 앉아있는 비구니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공연 후 스님을 찾아가 “관광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스님은 “포교하러 왔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전국비구니회 부회장을 지낸 광옥 스님과의 만남이다.

“공연 후 열흘 동안 공연할 때를 제외하고는 스님과 항상 붙어 다녔어요. 법문도 듣고, 어떻게 하면 불교를 빨리 배울 수 있는지 귀찮을 정도로 물었어요. ‘부처님 일대기’를 읽고는 환희심을 느껴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조계사 앞에 가서 불교서적을 구해 달라’고도 했지요. 그 열흘은 불교공부를 1년 동안 한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됐어요. 저의 열정 때문인지 광옥 스님은 LA에 와 계시던 숭산 스님께 법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시애틀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숭산 스님이 지어준 법명이 바로 ‘백련화(白蓮華)’예요.”

숭산 스님은 법명을 지어주면서 “참선 도중에 연밭에 피어난 한 송이 백련을 봤다. 불가에서 백련은 부처님을 상징하니 부처님 같은 삶을 살라.”고 당부했다. 광옥 스님 곁에 몇 개월 간 행자 아닌 행자로 머물렀다. 숭산 스님이 지어준 법명의 영향일까? 가수가 본업인 그녀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가가 개신교의 찬송가처럼 널리 보급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당시만 해도 불자들은 사찰에 와도 법회의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1983년 귀국한 송춘희 씨는 ‘찬불가의 대부’로 불리던 고(故) 서창업 선생의 도움을 받아 ‘삼귀의’, ‘보현행원’, ‘청법가’, ‘사홍서원’ 등 불자들이 꼭 알아야 할 찬불가를 묶어 음반을 냈다. 여러 사찰을 다니며 찬불가를 홍보했지만, ‘경건해야 할 법당에서 모슨 노래냐?’는 비난만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사찰을 누볐다. 불자가수 남강수와 함께 〈법화경〉 28품을 찬불가로 만들어 음반을 내기도 했다. 눈물겨운 노력 덕분일까? 찬불가 앨범을 찾는 불자들이 조금씩 늘어났고, 사찰에 합창단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공로로 1987년 받은 상이 조계종 제1회 포교대상 특별상이다.

“불교에 심취하면서 부처님 법에 대한 뒤늦은 목마름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어요. 1983년 숭산 스님이 써준 추천서를 들고 당시 조계종 포교원장을 맡고 계시던 무진장 스님을 찾아뵙고, 조계종에서 운영하는 포교사대학에 입학해 체계적인 불교공부를 시작했어요. 이후 일붕삼장대학원 전법사과정·동국대 불교대학원·해동불교범음대 등 모두 다섯 개 대학을 졸업했어요. 교도소나 군 법당과 인연을 맺은 것도 불교교양대학을 시작한 1983년이에요.”

1995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졸업식에서 사각모를 쓴 송춘희 씨.

33년째 매주 찾는 교도소, 군법당

어느 날, 불교교양대학을 함께 다니던 도반이 ‘봉사활동을 가자’고 권유했다. 이때 찾아간 곳이 영등포교도소(현 서울남부교도소)다. 얼떨결에 따라가 찬불가를 불렀는데, 간식거리를 못 챙겨간 게 돌아나오는 내내 미안했다. 열흘 후 푸짐한 간식을 싸들고 동료 가수들과 다시 찾아갔다. 33년 째 이어오는 교도소와 군법당 위문행사의 시작이었다.

1990년대 초, 군부대를 위문 차 방문했을 때의 모습. 내부반에 둘러앉은 장병들 앞에 먹을거리가 푸짐하다.

이후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이면 전국의 교도소를 누볐다. 일요일에는 군법당을 찾아가 장병들을 위해 음성공양을 했다. 찬불가 앨범 판매수익을 전부 털어 간식을 조달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동료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다. 30여 년간 가보지 않은 군법당이 없고, 주도해서 건립한 군법당만 25사단 적성사를 비롯해 다섯 곳에 이른다. 이런 공덕은 1992년 법무부장관 교정대상을 받게 했고, 문화관광부장관 표창(2회)·법무부장관 표창(2회)·조계종총무원장 표창(3회)으로 이어졌다.

앞서 수상이력이 불자의 본분에 충실하게 살아온 과정의 결실이라면, 문화예술분야에서의 활동은 2004년 정부로부터 받은 화관문화훈장을 손꼽을 수 있다. 또 수많은 가수 중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노래비를 세웠다는 점도 한 사람의 가수로서 가슴 뿌듯한 이력이다. 하지만 말 못할 아쉬움도 있다.

2000년 세워진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는 2~3년 전 누군가에 의해 없어지고 말았다.

“2000년 전남 화순 너릿재 공원에 히트곡 ‘영산강 처녀’ 노래비를 세우고, 한 달 뒤 수덕사 주차장 인근 마을회관 앞에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를 세웠어요. 당시에도 이 기념비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최근 2~3년 새 노래비가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지인들의 도움으로 만들었는데 말이죠. 들리는 말로는 노래비가 눈에 거슬렸던 어느 스님이 밤중에 포클레인으로 치웠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가수 송춘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백련장학회’다. 그녀의 법명을 딴 장학회는 교도소 교화 초기에 만난 재소자 불교반장이 “재소자 중에 할머니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이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해온 게 계기가 됐다. 이 인연으로 학비 지원을 시작했고, 사형수 자녀들의 뒷바라지도 맡게 됐다. 학비를 지원해야 할 아이 수가 금세 열 명을 넘어섰다. 혼자는 버거워 성지순례를 함께 다니던 도반들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또 다시 십시일반 돈이 걷혔다. 이 돈이 1991년 설립한 백련장학회의 종자돈이다.

지난해 생명나눔 통해 장기기증

1993년 8월 한 사찰에서 어린이법회를 하고 있는 송춘희 씨.

“첫 해인 1991년 청소년 22명의 학비를 (졸업 때까지) 지원했어요. 올해가 25년째인데 그동안 고등학교를 졸업시킨 장학생이 310명이 넘어요. 제가 못간 대학을 젊은 친구들이 가는 걸 보면 흐뭇해요. 서울대를 비롯해 명문대에 들어간 친구들도 꽤 있어요. 취직해 첫 월급을 탔다고 보내준 빨간 내복도 여러 벌이에요.”

살아오면서 다섯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그녀는 특히 1985년 교통사고를 당해 갈비뼈 8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을 때 부처님의 가피로 인해 살아났다고 굳게 믿는다. 정신을 차리기 전 아련히 부처님의 뒷모습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부처님을 부르며 다가가려는데 평소 미소로 맞아주던 부처님은 오간데 없고 ‘썩 돌아가라’는 불호령만 들렸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 침대였다. 주위 스님들은 의미 없는 꿈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부처님의 가피라고 확신한다.

베트남전 위문공연 때 비행기 추락사고도 겪었고, 2004년 위암이 발병해 수술도 받았다. 이 과정이 ‘자신을 경책하는 가르침’이라 생각하는 송춘희 씨. 그래서 스스로에게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 법을 전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며 세상 물욕은 사라진지 오래다. 사는 집도 함께 사는 여동생 명의고, 자동차와 핸드폰도 동생 명의다.

지난해에는 생명나눔실천본부에 장기, 안구, 조직 기증을 모두 포함한 장기기증 서약도 했다. 동생에게도 ‘죽으면 수의 대신 법복을 입혀 산에 뿌려 달라’고 당부했다. 앞으로의 바람을 묻자 ‘그동안 받은 감사패와 음반 등을 전시할 수 있는 작은 기념관의 건립’이라고 대답했다. 천생 가수다운 대답이다. 건달바(乾闥婆)는 팔부신중 중 하나다. 천상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樂士)이며, 불법(佛法)의 수호자다. 80년을 살았고, 60년간 노래를 불렀으며, 40년을 ‘찬불가’와 ‘군 포교’·‘재소자 교화’·‘백련장학회’와 함께해온 그녀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건달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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