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그리고 불교신앙

부산 범어사 대웅전 약사삼존도. 가운데는 붉은 약병을 든 약사여래, 좌우에는 해와 달을 든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문화재청

자연의 근원인 해와 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한 상징성을 지녔다. 밝음과 풍요로움으로 모든 존재들을 길러내고 보듬어 주기에, 해와 달은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신성한 존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도 이른 시기부터 해와 달이 지닌 미덕과 위대함을 불보살에 투영시켜 왔고, 이러한 관념들이 교리적으로 체계화되기도 하였다. 해와 달은 하늘에 떠있는 음양(陰陽)의 대표주자로, 신비로운 종교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대립과 조화의 양 존재이다. 따라서 각각의 특성이 다채로운 상징과 비유로 수용되면서 불교신앙은 물론 불교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소중한 영향을 미쳐 왔다.

불교와 만난 일월(日月)의 빛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있는 보로부두르 불탑 정상에서 바라본 일몰. ⓒ김성철

어둠을 밝혀주는 ‘빛’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진리와 지혜로 이끌어주는 절대가치의 상징성을 지녔다. 그러기에 성자(聖者)들은 늘 빛과 같은 존재, 광명을 주는 존재로 표현된다. 불상을 표현할 때도 부처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핵심요소는 단연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다. 몸에서 둥글게 발산하는 광명은 깨달음의 에너지요, 지혜와 자비의 징표인 것이다. 가장 근원적이며 위대한 자연의 빛은 햇빛과 달빛이기에, 부처가 태양신과 월광왕의 면모를 지니는가 하면 일월이 짝을 이루어 보살로 좌정하기도 한다.

불교에서 해와 달이 나란히 존상으로 등장하는 대표적 존재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다. 두 보살은 병고와 재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약사불(藥師佛)의 좌우 협시(脇侍)로 등장한다.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는 주불과 함께, 일월의 보살은 어느 곳 비추지 않는 데가 없는 햇빛과 달빛처럼 중생을 어루만지고 보살피는 존재로 자리한 것이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각기 붉은 해와 흰 달을 지니고 있어 구분이 쉽다.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에는 두 보살의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 해와 달을 그렸고, 범어사 대웅전 벽화에는 보살이 들고 있는 연꽃 위로 해와 달이 떠오른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동학사 삼성각 칠성도의 보살은 해와 달을 두 손으로 안고 있는 모습이다. 칠성도ㆍ치성광여래도(熾星光如來圖)는 북극성을 뜻하는 치성광여래를 주불로 하여, 북두칠성을 칠여래, 해와 달을 일광보살ㆍ월광보살로 표현해 불교적으로 수용한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세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 우주관을 나타낸 수미산에는 해와 달이 어디쯤 자리할까. 수미산의 우주체계에 따르면 땅 밑에 지옥이 있으며, 가장 낮은 땅 기슭에 인간계, 중턱에 사왕천(四王天)이 사방을 지킨다. 사왕천을 제1천으로 하여 정상인 도리천은 제2천이 되며, 욕계(6천)ㆍ색계(18천)ㆍ무색계(4천)의 28천이 층층으로 있고, 이러한 28개의 하늘나라 위를 부처의 경지로 삼았다.

해와 달은 바로 사왕천의 주신인 사천왕(四天王)이 머무는 중턱에 있다. 〈장아함경〉 등에 일월을 신격화한 일천자(日天子)ㆍ월천자(月天子)의 궁전이 수미산 중턱을 회전한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인도의 무더운 기후 탓에 일월숭배가 약하여 하급 신으로 배치했다고 보는 이도 있으나, 수미산의 우주론에서는 중턱이 합당해 보인다. 제1천은 인간계에서 지각하는 최초의 하늘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인 사방(四方)의 수호신 사천왕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리천 이후는 일반적 하늘 개념을 벗어난 경지로, 그곳의 어딘가에 일월을 두는 것은 교학체계에서 볼 때 어색하다.

출가자의 전통 가사(袈裟)에도 해와 달을 수놓은 일광첩(日光貼)과 월광첩(月光貼)이 등장한다. 해와 달은 수미산과 함께하고, 가사의 네 모퉁이에 사천왕을 뜻하는 ‘天’과 ‘王’이 부착돼있어 가사 전체가 불교 우주관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25조 가사는 총 125조각의 천으로 짓는데, 조각마다 불보살ㆍ경전ㆍ존자 등 삼보의 명호를 새기고 해와 달은 약사불 아래 둠으로써 그 상징성의 체계적이고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이처럼 일월은 불교의 신앙체계 속에서 불보살의 화신이나 불법을 수호하는 자연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져 그 상징성이 더욱 깊고 풍요로워졌다. 이는 일광보살ㆍ월광보살로 거듭난 해와 달뿐만 아니라, 북극성ㆍ북두칠성을 여래의 화현으로 정립시킨 데서도 일관되게 드러나는 자연신의 불교적 수용이라 하겠다.

태양신으로 거듭난 부처님

달이 밝은 물가에서 선재동자가 관세음보살에게 가르침을 받는 수월관음도. 조선시대에 의겸 스님이 그린 작품이다. ⓒ문화재청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일월이 토속적인 자연신의 모습에 가깝다면, 해의 독자적인 정체성은 보다 위대하고 강력한 태양신의 면모를 지녔다. 그믐달에서 만월까지 변화하는 달이 신과 인간의 영역을 공유하는 상징성을 지닌 데 비해, 불변의 해는 온전히 신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음(陰)의 대표 주자인 달은 대지ㆍ여성ㆍ물과 짝을 이루어 모성의 덕을 나타내는 데 주로 비유되고, 양(陽)의 대표주자 태양은 위대한 존재로서 하늘ㆍ남성ㆍ불과 짝을 이루는 신성성을 상징한다.

태양숭배사상은 인류의 태초부터 이어진 보편의 것으로, 불교에서도 최고의 존재에게 늘 태양의 상징성을 부여해 왔다. 〈숫타니파타〉에는 석존을 ‘태양의 후예’로 기록하여 석가족의 신성성을 드러내었다. 아울러 고대인도에서는 불교와 무관하게 비로자나(毘盧遮那)로 한역되는 범어 ‘Vairocana’가 ‘널리 비추다’, ‘두루 빛나다’라는 뜻을 지녀, 태양 또는 태양신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다. 이에 최고의 진리를 깨치고 그것을 실현한 석존을 위대한 태양에 견주어 ‘비로자나’라는 이름으로 추앙하기에 이른다.

이후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의 진신인 법신불이자 진리의 당체를 상징하는 부처로 거듭나게 된다. 태양의 이미지, 광명의 위대함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법신을 인격화한 비로자나불을 성립시키게 된 것이다. 밀교에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비로자나불을 대일여래라 일컫는데, 대일(大日)이란 태양보다 더욱 큰 의미로 ‘마하비로자나’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화엄경〉에 “세존이 미간의 백호상(白毫相)으로부터 대광명을 놓으니 이를 ‘여래출현’이라 부른다. …그 광명이 시방의 허공법계와 모든 세계를 두루 비추며 여래의 한량없는 자재함을 나타내고, 무수한 보살ㆍ대중을 깨우치며 일체의 시방세계를 진동하고….”라는 묘사가 나온다. 광명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은 바로 태양에 대한 묘사와 다르지 않다.

고대인도를 비롯한 서아시아와 지중해문화권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태양신이 전차(戰車)나 배를 타고 하늘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것으로 보는 신화적 관념이 있었다. 이에 인도 불교미술에 전차를 탄 태양신의 도상이 즐겨 등장하며 석존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사두전차의 태양신 문양이 새겨진 터번을 쓴 싯다르타 태자상을 비롯해,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동기로 회자되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상에는 태자가 탄 말을 당시 태양전차와 같은 형상의 황금빛 사두마차로 표현해 태양신의 면모를 부각시킨 모습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부처를 광명의 태양신과 결부시킨 사례는 무수하다.

특히 천안(千眼)의 소유자는 태양신적 성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태양신 수리야가 천 개의 눈을 가진 존재이듯, 수많은 눈은 무엇이든 보고 어디에나 비추는 전지전능한 태양안(太陽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 개의 손을 지닌 천수관음보살은 하나하나의 손마다 눈을 지니고 있어 곧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보살이다. 천의 눈으로 모든 중생의 고통을 낱낱이 살피고, 천의 손으로 두루 자비를 베푼다는 뜻을 담았으니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의 힘을 드러내는 데 태양의 광명은 참으로 적합하다.

불성, 해를 품은 달과 같아

구인사의 월출. ⓒ대한불교천태종

해의 이미지는 불과 통하고 달의 이미지는 물과 통한다. 흔히 ‘타오르는 태양’, ‘따스한 햇볕’이라 표현하듯이 해는 뜨겁거나 따뜻한 불의 속성을 지녔다면, 달에 대해서는 ‘달빛이 깊다’, ‘달이 흐른다’, ‘달빛이 차다’고 하여 물의 속성으로 묘사하곤 한다. 쳐다보면 눈이 부시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타버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해와 달리, 달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모든 존재를 감싸듯 비춘다.

따라서 부처의 위대하고 전지전능함은 해로 상징되며, 자비롭고 원융한 성품은 달로 즐겨 표현된다. 나아가 이러한 달의 상징성은 중생구제를 서원한 보살과 즐겨 짝을 이룬다. 월광보살ㆍ수월보살(水月菩薩)ㆍ만월보살(滿月菩薩)과 같이 원만하고 자애로운 달의 미덕을 지닌 보살들이 중생을 보살피도록 한 것이다.

〈왕생십인(往生十因)〉에서는 “고요하고 맑은 물과 같은 마음을 지니면 절로 둥근 달과 같은 부처를 볼 수 있나니, 깨끗한 물을 인연으로 하여 허공에 뜬 본래의 달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만월과 같은 원만함은 부처의 덕일 뿐만 아니라 중생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임을 깨우쳐주는 말이다. 달은 때로 각을 세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마침내 한 점의 이지러짐도 없이 나타나는 만월은 우리 안의 불성과 같다.

만해 스님 또한 부처의 가르침을 뜻하는 불광(佛光)이 달빛과 닮았다고 여겼던 듯하다. 그는 불성(佛性)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달이 떠서 질 때까지의 단계로 표현하여 ‘견월(見月)-완월(玩月)-월욕생(月欲生)-월초생(月初生)-월방중(月方中)-월욕락(月欲落)’이라는 여섯 편의 시를 지은 바 있다. 마치 십우도(十牛圖)와 같은 의미의 이들 시에서 자신의 선적(禪 的)깨달음의 자취를 더듬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가 하면 간다라의 탁실라지방에는 부처의 전신 월광왕(月光王)을 기리는 스투파가 있다. 월광왕은 아득한 옛날에 8만4천의 나라를 거느리며 백성을 덕으로 통치하여 사방에 그의 칭송이 가득하였다. 그를 질투한 변방의 한 왕이 변괴를 일으켜 나라를 어지럽히며 월광왕의 머리를 요구하자, 월광왕은 자신의 전생을 살핀 뒤 스스로 머리를 베어 보시하고 열반에 들었다. 그는 999개의 머리를 보시하고 마지막 하나를 더하여 천 생(千生)에 걸쳐 1천 번 머리를 잘라 완전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다. ‘탁실라’란 ‘잘려진 머리’라는 뜻으로 지역명이 본생담(本生譚)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곳에 아소카왕이 월광왕을 기려 스투파를 세움으로써 400년대 당나라의 구법승 법현(法顯)을 비롯해 오늘날에도 이 지역을 순례하는 불자들이 본생담의 무대를 찾아 월광왕의 흔적을 더듬게 한다.

사람들은 달의 밝음에서 불법의 원융함과 자비로움을 본다. 그러나 달은 한없이 부드럽고 원만하지만 물처럼 흐르는 차가운 이성을 담고 있다. 신앙심만 있으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고 보는 여타종교와 달리, 불교는 종교적 믿음만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성찰적 삶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부드럽고 원만함 속에 냉철한 이성으로 이끄는 외유내강의 어머니와 같아, ‘해를 품은 달’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

 

구미래

불교민속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 학술연구교수, 중앙대 외래교수, 조계종 총무원 성보보존위원, 한국불교민속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존엄한 죽음의 문화사>(모시는사람들, 2015), <한국불교의 일생의례>(민족사, 2012),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민속원,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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