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ㆍ마을 주민 7천명
왜군 정예병 2만 5천과 목숨 건 혈투
성 함락돼 절개 지키려 바위에 몸 던져

조선은 건국 200년 후인 1592년 임진년에 왜의 침략을 받습니다. 그리고 1597년 정유년에 재침을 당하지요. 함양지역의 무지랭이 농부와 아낙네들이 삶터를 지키기 위해 황석산성에 올라 진을 치고 왜적에 맞서지만 정예군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황석산성은 조선 백성들의 피로 물들고 맙니다.(인트로)

한국을 대표하는 ‘뼈대 있는 고장’은 어디일까요? 많은 분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마을이 있는 경북 안동을 꼽을 테지요. 안동의 선비정신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고을이 경남에도 있습니다. 함양입니다. ‘좌안동(左安東) 우함양(右咸陽)’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한양에서 보면 낙동강 왼쪽에 있는 안동과 오른쪽에 있는 함양 모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해 냈고, 학문과 문벌이 손꼽히던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두 지역 모두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꽃피웠던 고장이지요.

군사 요충지, 고대부터 축성

선비의 고장 함양에는 정유재란 때 조선 백성들이 왜의 정예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던 황석산성이 있습니다. 이 산성은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에 걸쳐 있는 해발 1,190m의 바위산인 황석산 정상의 암봉(岩峰)에 잇대어 축성한 성입니다. 면적 446,186㎡, 높이 3m, 둘레 2.5㎞의 이 산성은 사적 제322호로 지정돼 있으며,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육십령(六十嶺)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요새입니다.

황석산은 월봉산(月峰山, 1279m), 기백산(箕白山, 1331m), 괘관산(掛冠山, 1252m) 등과 함께 영ㆍ호남 지방을 아우르는 지리적 특성상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고대부터 이곳에 산성을 쌓아 방어했으며, 고려ㆍ조선시대에 개축돼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성곽’조에는 ‘황석산성(黃石山城) 석축이며 둘레는 2,924척이다. 성 안에 시내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고 전합니다.

황석산성을 찾아가는 길,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녹록치 않습니다. 이미 소개한 경주 명활산성이나 단양 적성산성이 평지 혹은 약간의 경사진 곳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은데 비해 황석산성은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함양군 서하면 우전마을에서 시작되는 코스가 최단거리입니다. 2.5km로 거리는 짧지만, 산이 가팔라서 성인 기준 왕복 3~4시간 가량 소요됩니다.

정상까지는 거의 오르막입니다. 우전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면 오른쪽에 등산로 입구 표지판이 나옵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약 600m 위쪽에 슬픈 사연이 깃든 피바위가 있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을 가쁜 숨을 몰아가며 오르면 황석산성 남문지(南門址)가 나옵니다. 남문지에서 한 숨 돌리고 성벽을 따라 가면 웅장한 바위 봉우리에 잇대 쌓은 황석산성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정상 부근에 다다릅니다. 여기에는 산성의 동북문지도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서면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빼어난 경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피바위’는 이름만 들어도 섬뜩합니다. 이 바위에는 우리 조상들의 비통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한 왜와 맞서 싸우던 조선은 전쟁을 종식시키려 화의교섭(和議交涉)을 시도했었죠. 그런데 이 화의교섭이 실패하자 일본은 1597년 정유년에 재차 조선을 침략합니다. 정유재란입니다. 이때 여러 전투가 벌어졌는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전투가 바로 황석산성 전투입니다.

성 함락, 몸 던져 절개 지켜

황석산성 함락 후 산 아래로 몸을 던진 백성들의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하는 피바위.

피바위 안내문에 따르면 선조 30년 정유년(1597)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고 조선을 재침한 왜군 14만 명 중 2만 7,000명이 음력 8월 16일 가또ㆍ구로다 등의 지휘로 황석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의 지휘로 소수의 병력과 인근 7개 마을의 백성들이 황석산성에 올라 활ㆍ창ㆍ칼 등의 무기와 돌로 왜군의 신식무기인 조총에 맞서 싸웁니다. 하지만 결국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이 때 성 안에서 싸우다가 살아남은 여자들은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산 아래로 몸을 던지는 등 자결을 선택합니다. 이들의 피는 산 아래의 바위로 흘러내려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릅니다.

함양지역 사람들의 충절과 절개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예로부터 함양지역 사람들은 기질이 강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풍속’조에 ‘억세고 사납게 다투고 싸움한다’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니까요.

황석산성 전투와 관련해 산성을 공격한 왜군 병력의 수와 조선인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숨을 걸고 왜적과 맞서 싸운 호국충정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요.

황석산성 전투 관련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현일의 시문집인 <갈암집>, 함양 출신의 선비 정경운이 임진왜란 발발 해인 1592년부터 1609년까지 18년 동안 쓴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 등 여러 문헌에 기록돼 있습니다.

<선조실록> 정유(1597)년 11월 14일의 ‘감사 이용순이 한형의 처 이씨, 조종도의 죽음을 포장하도록 건의하다’에는 “…성이 함락되려고 하자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그의 딸 한씨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같이 죽었으며, 시비(侍婢) 한 사람도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는 처자를 이끌고 산성에 들어가 지키다가 성 안이 붕괴되자, 백사림(白士霖)에게 달려가 방책을 논의하려고 하였는데, 벌써 도피하였으므로 다시 곽준(郭䞭)을 남문으로 찾아가 손을 잡고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의 아들 조영혼(趙英混) 및 곽준과 함께 모두 피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병오(1726)년의 ‘조순(趙純) 등을 배향한 함안(咸安) 삼현사(三賢祠)에 사액(賜額)해 줄 것을 청하는 경상도 생원 박성시(朴聖時) 등의 상소’에도 “…조종도가 이때 함양군수에서 체차(遞差) 되어 집에 있다가 ‘남자가 죽으려면 당당하게 죽어야 한다.’고 개탄하고는 안음현감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을 지켰다. 성이 함락되자 곽준에게 ‘남자는 한 번 죽을 뿐이니 불의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공과 함께 북쪽을 향해 임금께 절하고 결전하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같은 날 순절했다.”고 전합니다.

<갈암집(葛庵集)> 제29권 시장(諡狀)의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존재(存齋) 곽공(郭公) 시장’과, <고대일록> 제2권 정유년 ‘8월 28일 병술(丙戌)’조에도 황석산성 전투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위 문헌들과 내용은 비슷합니다.

사당 건립해 매년 위령제 지내

황석산성 전투 당시 순절한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건립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사원’조에는 ‘…황암사(黃巖寺)를 숙종 을미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곽준의 호는 임재(任齋)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벼슬은 안음현감이었는데 이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조종도의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며 본관은 함안이다. 벼슬은 함양군수였는데 이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황암사 사액을 받은 뒤 매년 봄ㆍ가을 위령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황암사는 일제에 의해 철거되는 수난을 겪습니다. 일제가 수치로 여기는 과거 역사를 지우기 위한 만행이었죠.

이에 해방 후 40년이 지난 1985년 함양지역 유림들은 뜻을 모아 ‘황석산성순국선열추모위원회’를 발족하고 해마다 추모행사를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1987년 황석산성이 사적 제322호로 지정되자, 1998년 사당복원계획을 세워 2001년 호국의총(護國義冢)을 정화하고 사당을 중건한 뒤 매년 음력 8월 18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입으로만 해대는 100만 번의 ‘나라사랑’ 말보다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 행동으로 실천에 옮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요.

산 정상의 바위봉우리에 올라 산성을 바라보면 농기구를 쥐었던 손에 무기를 들고 왜적과 맞서 싸운 선조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처절함이 몸을 휘감고 지나갑니다. 이 역사의 현장을 만나기 위해선 등산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과 이에 수반되는 육체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된 어제와 역사가 될 오늘을 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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