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다 '나무' 259호

수상생활과 문명의 성쇠

인류의 삶은 숲에서 시작했다. 현재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도 숲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재난은 ‘숲의 제거(除去)’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문명사는 곧 ‘숲 제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숲과 문명의 관계는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 9.~ )가 <문명의 붕괴>(2005)에서 구체적으로 밝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명이든 사라진 문명이든 숲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숲으로 만든 문명을 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숲과 점차 멀어진 것은 ‘수상(樹上)생활’을 마감하면서부터였다. 인간이 수상생활에서 벗어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부 지역이 산불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숲에서 내려온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서 직립·보행할 수밖에 없었다. 직립·보행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게 했다. 인간은 손을 이용해서 도구를 사용했고, 도구의 사용은 곧 노동의 시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를 창조하면서 지금의 문명을 만들었다. 도구발달사에서 청동기시대는 이전과 전혀 다른 시대를 예고했다. 역사학에서는 청동기시대를 문명단계로 파악한다. 그 이유는 청동기시대는 석기시대와 전혀 다른 단계였기 때문이다. 즉 청동기시대는 원시공동체사회를 붕괴시킴과 동시에 인류사회 최초로 빈부 격차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석기시대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숲을 제거한 단계였다. 청동기와 철기의 생산량은 숲의 제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무 소비(消費)’에 비례한다. 만약 나무가 없다면 청동기와 철기의 생산은 불가능했다.

종묘 ⓒ김성철

소나무와 조선의 궁궐 및 병선(兵船)

나무는 고대사회부터 중세사회까지, 심지어 지금까지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다. 세계 각국에 남아 있는 이른바 ‘신목(神木), ‘우주목(宇宙木)’, ‘세계수(世界樹)’는 나무가 종교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나무는 신앙의 대상을 넘어 인간 삶의 절대 조건이었다. 특히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삶을 상징하는 나무다. 경상북도 안동 제비원에 전하는 ‘성주풀이’는 소나무가 우리 민족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우리 민족은 사람이 태어나면 소나무 가지나 잎으로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고, 소나무로 집을 지었으며, 죽으면 소나무로 관을 만들었다.

애국가에 등장하는 소나뭇과의 소나무는 한반도의 국방에 절대적인 재료였다. 특히 조선왕조는 왕족의 거주지와 정치공간을 위해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을 지었다. 아울러 왕조의 계승과 제사를 위해 종묘를 건설했다. 그러나 만약 궁궐과 종묘를 건설하는데 소나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을 짓는데 소나무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어떻게 수급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가치, 특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과 종묘의 가치는 곧 소나무 덕분이다. 왕과 더불어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들의 집도 소나무로 지었다. 현재 양반들의 집들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 적지 않은 것도 소나무 덕택이다.

조선시대 소나무의 가치는 병선(兵船)의 제작에 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경우 군사의 핵심은 해군력이었다. 특히 해군력은 인접한 일본과의 전쟁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일찍부터 병선 수급을 위해 조공정책을 실시했다. 그래서 각 지방에서는 중앙 정부에서 할당한 병선을 바쳐야만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지역별 병선 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병선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나무였다. 특히 병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100살 정도의 소나무가 필요했다.

조선왕조는 병선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 강력한 소나무 보호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소나무 보호 정책을 수록하고 있다. 조선의 소나무 보호 정책은 문헌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봉금(封禁)을 알리는 유적도 경상북도 울진군 소광리(召光里)를 비롯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처럼 소나무와 관련한 조선시대의 정책과 기록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세계사적인 가치로 만들려는 노력은 아직 부족하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를 소유한 나라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에서 발굴된 2척의 배는 8,000년 전 200살의 소나무로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조선(造船) 분야의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최고(最古)의 조선기술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로 만든 조선시대의 병선은 임진왜란을 비롯해 전통시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소나무로 만든 조선의 판옥선과 거북선은 삼나무로 만든 일본의 배를 격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소나무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 우리나라 소나무의 가치는 현재 일본 교토의 광륭사(廣隆寺) 신영보전(新靈寶殿)의 국보 제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의 소나무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느티나무와 사찰 및 서원

부석사 무량수전(배흘림기둥).

느릅나뭇과의 느티나무는 소나무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신앙에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마을 어귀에는 거의 예외 없이 느티나무 한 그루 정도는 살고 있다. 느티나무는 건축 재료로도 아주 훌륭하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 중에서 느티나무로 만든 기둥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다. 무량수전이 국보 제18호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느티나무로 만든 기둥 덕분이었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이니 모두 20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필요한 20개의 느티나무는 적어도 100살이 넘어야 한다. 느티나무는 소나무보다 오래 견딜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무량수전은 경북 안동의 봉정사 다음으로 오래된 목조 건물이지만, 우리나라의 나무인 느티나무로 만든 것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지금까지 무량수전을 보존할 수 있었는 것은 바로 느티나무 덕분이다. 앞으로도 무량수전은 느티나무 덕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도동서원 강당(중정당).

서원은 사찰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보고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道東)에 위치한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도 으뜸이다. 동방 5현 중 최고로 꼽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모시고 있는 도동서원 강당의 기둥이 바로 느티나무다. 고색창연한 강당의 모습은 느티나무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강당이 400년 이상 견디고 있는 것은 바로 느티나무의 위력 덕분이다.

부석사무량수전과 도동서원의 느티나무 기둥을 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량수전과 도동서원에 사용한 느티나무처럼 곧은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울창한 나무들이 경쟁하는 숲속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넓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느티나무들은 곧게 자라기 어렵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곧게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산속에서 느티나무 군락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에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과 도동서원의 강당처럼 느티나무로 만든 것을 영원히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나무도 기후온난화로 점차 사라진다고 예상하면 소나무와 느티나무로 만든 문화재에 대한 관심은 매우 중요하다.

 

강판권

경남 창녕군 고암면 중대리에서 출생했다. ‘대구생명의숲’ 공동대표(2004~2008)를 역임했다. 현재 계명대 사학과 교수, ‘명청사학회(明淸史學會)’ 편집위원, ‘대구사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 <나무열전>,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나무철학> 외 1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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