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다 '나무' 259호

나무는 식물적 상상력의 대표적인 대상이다. 나무는 동물처럼 먹이사슬구조에 의해 생존해 가는 것이 아니라 숙명처럼 자신의 주어진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강렬한 햇살에도, 강한 비바람이나 추운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는 묵묵히 견뎌낸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나무를 숭배의 대상으로, 무소유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나아가 희망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처럼 나무는 우리의 삶과 오랜 기간 동안 함께 해 온 소중하고 귀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문학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동구 어귀에 가면 우리를 먼저 반기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유년시절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어른들의 쉼터가 되기도 한 그 느티나무는 묵묵히 오랜 세월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담당해 왔다. 「나비」로 널리 알려진 윤곤강의 시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란 오란 아주 오오란 옛적

땅덩이 배포될 그때부터 있었더란다

굴 속처럼 속이 훼엥한 느티나무

귀 돛인 구렁이도 산다는 나무……

마을에 사는 어진 사람들은

풀 한 포기 뽑는 데도 가슴 조리고

나무 한 가지 꺾는 데도 겁을 내어

들에 산에 착하게 사는 온갖 것을

한맘 한뜻으로 섬기고 받들었더란다

안개 이는 아침은 멀리 나지 않고

비 오고 눈 나리는 대낮은 집에 웅크리고

천둥에 번개 이는 저녁은 무릎 꿇고 빌어

어질게 어질게 도란거리며 도란거리며 살았더란다

- 「느티나무 - 옛이야기처럼」 전문

충북 진천 보탑사 인근의 느티나무. ⓒ이승현

이 마을에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수령이 오래 되어 ‘굴 속’처럼 속이 패인 느티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한맘 한뜻으로” 섬기고 받들게 된다. 그들은 행여 잘못하여 동티라도 날까 봐 느티나무 이파리도, 가지도 함부로 꺾지 않고 잘 보살폈다. “비 오고 눈 나리는 대낮은 집에 웅크리고/ 천둥에 번개 이는 저녁은 무릎 꿇고 빌어/ 어질게 어질게 도란거리며 도란거리며 살았더란다”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듯 그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느티나무를 아끼고 섬기며 동고동락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동네 어귀에 자리 잡은 오래된 나무를 마을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매개로 여겨 소중하게, 지성(至誠)으로 돌본 것이다.

이문구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관촌수필」에도 오래된 나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는 충남 보령 관촌마을을 400년 가까이 지켜 온 ‘왕소나무’를 아주 특별한 대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일곱 살 나 천자문을 떼고 책씻이도 마친 어느 여름날 해 설핀 석양으로 잊지 않고 있지만, 나는 갯가 제방둑까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와 온 마을을 쓸어삼킬 듯이 쳐들어오던 바다 밀물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댕기물떼새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석양놀에 가뜩 떠있던 눈부신 바다를 구경했던 것이다. 방파제 곁으로 장항선 철로가 끝간 데 없고, 철로와 나란히 자갈마다 뽀얀 신작로는 모퉁이를 돌았는데, 그 왕소나무는 철로와 신작로가 가장 가까이로 다가선, 잡목 한 그루 없이 잔디만 펼쳐진 펑퍼짐한 버덩 위에서 400여 년이나 버티어 왔던 것이다.

-「관촌수필」 중에서

 

그는 400여 년에 걸친 모든 풍상을 다 이겨내고 십장생(十長生)의 으뜸다운 풍모로 마을을 수호해 온 왕소나무를 떠올린다. 왕소나무는 군내 (郡內)에서 “겨룰 데가 없던 백수(百樹)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유년시절, 형편이 아주 넉넉지 않았어도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지탱하게 된 데에는 왕소나무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고향을 떠난 지 몇 해 되지 않아 그 왕소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근대화의 물결에 의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는 나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적인 삶을 대변하듯, 모든 것을 다 내주는 ‘나무’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 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겨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여도

끄떡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있어

나비와 벌들이 찾아가는 것을 볼지라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담한 나무
 

한여름이면 발치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 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덕을 지닌 나무……
 

나무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저것 복잡한 분별없이

단순하고 담백하고 무심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나무처럼」 전문

영주시 문수면 무섬마을 통나무다리.  ⓒ임연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 버리”는 나무를 보며 시인은 나무의 ‘당당함’을 엿본다. 그리고 새들이 날아와 앉거나 폭풍우에 가지가 잘려도, 나비와 벌들이 다른 꽃나무를 찾아가도 시샘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는 나무의 ‘담담함’을, 또한 더운 여름,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나무의 넉넉함도 보게 된다. 그는 나무처럼 “단순하고 담백하고 무심히” 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를 통해 ‘희망’을 담아내기도 한다. 정한모는 시 「오월의 나무」를 통해 5월에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와 소년의 모습을 등치시키고 있다. “나무는 가지마다 새싹이 돋아난다./ 소년은 팔다리에 힘이 솟는다.// 새싹은 눈이 부신 소년의 향기/ 소년은 보얀 새싹의 얼굴이고”라고 하여 나무와 소년에게서 희망을 엿본다. 나아가 그 희망은 “하나씩 바람에 흔들리면서/ 자랑스런 언덕이 되고/ 수줍은 골짜기가 되고/ 꿈이 되고 기쁨이 되고/ 어른스런 목소리로 터져나”오는 과정을 통해 나오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람에 흔들리면서”이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힘겨운 인내와 고통의 과정을 통해 어린 나무가 튼실한 나무가 되고 소년이 의젓한 어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문학 속 ‘나무’는 때로는 오랜 세월 마을을 감싸주고 지켜주는 수호의 대상으로, 사심이나 욕심 없이 묵묵히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무소유’의 대상으로, 그리고 봄, 여름, 가을에서 겨울로,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성장과정을 통해 ‘희망’의 매개로 형상화된다. 이렇듯 ‘나무’를 제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나무 하면 떠오르는 우뚝 솟아있는 ‘재목’도, 척박한 땅에서도 풍우나 혹한에서도 꿋꿋이 견디는 ‘잡목’도 모두 소중하고 산에 꼭 필요한 대상이라는 인식이 지속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김현정

1999년 <작가마당>으로 비평활동 시작. 저서 <한국현대문학의 고향담론과 탈식민성>, <백철 문학 연구>, <대전 충남문학의 향기를 찾아서>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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