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어루만지는 불교설화 259호

지난 5월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범행의 이유를 ‘여자들이 무시해서’라고 답했다. 경찰은 서둘러 이번 살인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했지만, ‘여성혐오’ 범죄로 봐야 한다. 혐오의 대상은 남녀를 불문한다. 자기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다수(집단) 또는 특정한 상대방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원인도 다양한데, 주로 사회적 영향이 크다. 세대를 불문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된 경우와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박탈감이 주된 원인을 제공한다. 심할 경우, 범죄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혐오(嫌惡)’는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의미다. 비슷한 단어로 ‘염오(厭惡)’가 있는데, 사전 뜻풀이로 둘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불교적으로 풀이하면 ‘혐오’의 뜻은 달라지지 않지만 ‘염오’의 뜻은 ‘습관적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거나 이해했던 것이 잘못임을 이해한 상태’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생은 육신에 집착한다. ‘외모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처님께서는 육신에 집착하는 수행자들에게 부정관(不淨觀) 수행을 권하셨다. 사람의 육신은 피부만 들춰내면 뼈·근육·피·고름·골수 따위로 이뤄져 있지만, 중생들은 육신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부정관은 이런 중생들을 위해 ‘육신은 맑고 깨끗하지 않다’는 걸 관하게 해 육신과 물질에 대한 집착이 잘못됐음을 깨닫게 하는 수행이다. 즉, ‘나’인줄 알고 본능적으로 집착했던 육신을 ‘염오’하도록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주는 수행법이 부정관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번뇌를 다스리는 수행법으로 오정심관(五停心觀)을 가르쳤다. 이 중 부정관은 앞서 언급했듯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기 위해 육신을 관해서 육신이 맑고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수행법이다. 그런데 부정관을 닦던 수행자들이 자신의 몸을 극도로 혐오한 나머지 집단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육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염오’를 해야 했는데, ‘혐오’를 하면서 생겨난 사건이다.

쿠츠의 칼

부처님께서 밧지국(跋耆國) 발구마 강가에 머무실 때 수행자들에게 부정관을 가르치셨다.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행법을 깊이 체득해 나갔다. 풍만한 육체와 검은 머릿결을 가진 여자도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히면 수일 후에는 그 살이 시퍼렇게 부풀어 곧 문드러지고, 피는 썩어 땅에 흐른다. 또 뱀이 살에 감기고, 짐승이 그 고기를 뜯고, 이리하여 손도 발도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고 만다. 수십 일 후에는 비를 맞고 바람에 흩어져 쓸쓸하고 허무한 백골이 되어 여기저기 뒹굴게 된다.

당시 수행자들은 이렇게 부정관 수행으로 사람의 육체가 썩어가는 것을 보면서 육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 중 한 수행자는 부정관을 하다가 극단적으로 육신을 미워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사냥꾼 출신인 수행자 쿠츠에게 찾아가 부탁했다.

“나를 죽여주시오. 그 답례로 내 옷 세 벌을 드리리다.”

원래 동물을 사냥하던 쿠츠는 어렵지 않게 이 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칼을 휘둘러 수행자를 죽였다. 그가 피 묻은 칼을 발구마 강물로 씻고 있으니 물 위에 마신(魔神)이 나타나 그가 한 행위를 칭찬했다.

“너는 큰 공덕을 해냈다. 너의 강한 마음과 솜씨는 아직 해탈하지 못한 한 사람의 수행자를 해탈시켰다. 열반에 들어가려다가 들어가지 못한 수행자를 힘 안 들이고 열반에 들게 했다. 네가 한 일은 실로 훌륭하다.”

쿠츠는 이 말을 듣고 ‘이는 하늘의 소리다. 하늘이 내가 한 일을 칭찬하는 말이다. 나는 해탈하지 못하는 사람을 해탈케 해준 것이다. 이만한 선업이 또 있겠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는 마신의 감언에 넘어가 칼을 들고 수행자들에게 돌아가 소리쳤다.

“해탈하고자 하는 자는 내게 오라. 열반에 들고자 하는 자는 내 칼을 믿고 내게로 오라.”

부정관을 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고 있던 수행자들이 하나둘 죽음을 원했다. 그 수가 무려 60명에 달했다.

며칠 후 부처님께서 설교를 하는 법석에 대중이 모였다. 그런데 참석한 수행자의 수가 너무 줄어있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물었다. 아난존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쿠츠가 한 소행을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크게 슬퍼하시며, 부정관 대신 수식관(數息觀)을 하라고 수행자에게 전하셨다. 수식관은 숫자를 헤아리며 숨을 가다듬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수행법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남의 손을 빌어 목숨을 끊는 것을 엄히 금하셨음은 물론이다.

스스로의 공덕에 감사

초기불교에서는 탐욕과 애욕을 없애는 수행법으로 부정관을 가르쳤다. 초기불교의 대표적 수행법 중 하나인 부정관은 욕심과 음욕을 물리칠 목적으로 육신을 집중 관찰하게 한 수행법이다. 목적은 육신에 대한 집착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끊게 하려는 ‘염오’였다. 결코 현실의 도피나 자살로 이어지는 육신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선 안 된다. 위 설화는 혐오를 방치하면 사회적 범죄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혐오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첫째,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싫어하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림은 혐오 치유의 첫 단추다. 둘째, 몸의 관찰이다. 싫어하는 감정이 생길 때 몸의 어느 부위가 신호를 보내는지 잘 감지해야 한다. 감정이 생길 때 감정이 머무는 특정 부위를 관찰하다보면 점점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있는 그대로’ 거울보기다. 사람이나 사건 등 혐오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미움과 싫음과 혐오 등 보편적 감정을 그대로 허용한다.

마지막으로 연민의 마음으로 ‘지금 여기’에 머물며 감사하기다. 달리 말하면 ‘자기연민’이라 할 수 있다. 자기연민은 동정과는 다르다. 애정 가득한 ‘자기돌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주변에 대한 고마움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이 대상이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행한 스스로의 공덕도 감사의 대상에 포함된다. 여기서 감사는 긍정적 삶의 자세다. 자신과 주변을 다독이는 애정 어린 호흡과 자신을 포함한 유정무정 모두에 대한 감사다.

국내는 아직 ‘혐오범죄’에 대한 사회적·법적 정의조차 제대로 내려져있지 않지만 미국은 주마다 기준이 마련돼 있다. 공통적으로 보면 인종·종교·성적 지향·국적(민족)·신체장애 등이 동기가 돼 저질러진 범죄를 지칭한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는 우리나라의 혐오범죄와는 차이가 있다. ‘혐오’란 감정의 치유에 개인과 사회 모두 관심을 기울일 때다.

황선미

동국대학교 국민윤리과 졸업. 계간지 ‘시와 문화’ 통해 등단. 불교계 언론사와 조계종 불교상담개발원에 근무한 바 있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과 석박사통합과정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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