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재조명 259호

개성 영통사 경선원 대각국사 의천 진영.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그는 우리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혔던 인물이었다. 그런 기억을 되살려 낸 이는 일본의 오야 토쿠죠라는 학자였다. 그는 일본에 전승되어 오던 의천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고, 한국과 중국에서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1937년 <고려속장조조고(高麗續藏雕造攷)>라는 책을 출간했다. <고려속장경(고려 교장)>을 비롯하여 의천이 집성하고 편찬한 <석원사림(釋苑詞林)>, <원종문류(圓宗文類)> 등에 관한 자료들을 망라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의천이 조성했던 대규모의 출간사업을 ‘공전(空前)의 위관(偉觀)’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전무후무한 위대한 업적…….

이 책의 서문에는 소화(昭和) 10년(1935)’이란 날짜가 달려 있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조선(朝鮮) 시정(施政) 25년, 만주 건국 4년’ 이 이어진다. ‘조선을 다스린 지 25년’이란 말은 침략을 경험했던 민족의 후손들이 읽기에는 착잡하고 민망한 글이다. 동아시아 식민지를 주름잡던 제국주의 학자의 감회와 감격이 곳곳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의천에 대한 중국 측의 기록을 보자면, 화하(華夏)니 중화(中華)니, 또 다른 제국의 자존심을 만나게 된다. 조그만 나라의 멍청한 왕자, 의천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제국의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다. 그 사이 우리는 의천이건 국사가 했던 일이건 몽땅 까맣게 잊고 살았다. 김부식은 “의천이 열반한 지 30년 사이에 이어갈 사람조차 없다.”라고 회고했다.

대장경 일을 하면서 직간접으로 외국 학자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외국 학자들, 특히 일본 학자들에게, 한국불교에는 두 분의 ‘넘사벽’ -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존재한다. 원효와 의천이다. 원효의 저술과 의천의 출간사업이다. 원효와 의천의 일, 먼저 그 규모가 넘사벽이고, 그 일에 담긴 가치가 또한 넘사벽이다. 이런 평가 또한 외국 학자들이 시작했다. 변방의 조그만 나라, 어떻게 저런 인물, 저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도 우리도 더 이상은 캐물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두 분의 업적이 돌출해 보이기 때문이다.

개성 영통사 경선원.

모년 모일 구법(求法)의 사문 아무개는 다과와 제철 음식을 차려 해동의 교주(敎主), 원효보살께 공양합니다. 삼가 이치(理致)는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도(道)는 사람을 통해 넓게 퍼집니다. 풍속은 경박스럽고 시절은 야박해지니 사람은 떠나고 도는 망가졌습니다. 스승은 각기 자신의 종습(宗習)만을 북돋우려 하고, 제자들은 또한 보고 들은 것만을 집착합니다.(중략) 오직 우리 해동의 보살이 성상(性相)을 함께 밝히고 고금(古今)을 자세히 살펴 백가(百家) 이쟁(異諍)의 극단을 화합시키고, 한 시대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세우셨습니다.(중략) 아무개는 천행으로 어려서부터 불전(佛典)을 좋아하여, 선철(先哲)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성사(聖師)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천이 분황사에 들러 원효의 초상화를 보고 감격해서 공양을 올리며 지었다는 글이다. ‘교주(敎主), 보살(菩薩), 성사(聖師)’ 의천이 원효에게 바치는 호칭들이다. 원효와 의천의 만남,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것일까,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한(漢)나라 조정에 이르러 백마사(白馬寺)에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현장(玄奘)과 의정(義淨)이 돌아왔고, 혹은 인도의 손님들이 동쪽으로 오기도 하고 중국 스님들이 서쪽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별을 보고 눈을 밟으며 줄지어 오고 가면서, 참된 경전들을 거듭 번역하여 가르침을 크게 펼치니 그 공은 크고 그 이익은 넓었습니다. 바른 법이 쇠약해지고 근기와 인연도 점점 둔해지니 간간이 바른 스승들이 나타나 소(疏)를 지어 선양했고, 삼장(三藏)들이 탄생하여 초(鈔)를 지어 이를 도왔습니다. 남기신 글들이 번성하고 온 세상이 받들어 행하니 참으로 한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략)

돌아보면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천축의 교화를 받들어, 비록 경론(經論)을 갖추기는 했으나, 소초(疏鈔)는 빠져 있었습니다. 고금(古今)과 요나라, 송나라에 (유통하던) 모든 백가(百家)의 과교(科敎)를 일장(一藏)으로 집성하여 유통시키고자 합니다.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敎藏)의 수집을 발원하는 소(疏)’, 이 글은 의천이 열아홉 살에 쓴 글이다. 세자였던 형님을 대신하여 아버지 문종에게 올렸던 상소문의 일부이다. 글은 솔직하고 논리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 안에 담대한 꿈과 당당한 자신감이 담겼다. 11살에 출가하여 13살에 승통에 올랐다는 의천이었다. 열아홉 어린 왕자가 혼자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글이다. 그러나 47년 의천의 일생, 기록으로 남아 전하는 그의 삶을 따라 가다 보면 이 글이야 말로 의천의 진면목, 그의 삶과 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고려는 물론 요나라와 송나라, 동아시아 불교문화, 한문 문화권의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 열아홉의 왕자 승통은 그런 일을 저렇게 선언했고, 대장경의 역사, 불교 책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이 글에 담긴 단어 하나, 구절 하나, 빈 말은 하나도 없다. 왕자는 그 일을 골수에 새겼고, 기어코 해냈다.

부족한 전등(傳燈)의 힘, 부끄러워 노심초사
내가 근심이 병이 되어 요즘 점점 심해진다.
경서를 읽거나 독송할 때 가슴에 통증을 느껴 학업이 황폐해졌다.

입적하기 한 해 전, 국청사에서 천태(天台)의 <묘법연화경현의>를 강연하고 남긴 시의 한 구절이다. 그의 말년은 슬프다. 마흔 일곱, 요즘의 눈으로 보자면 터무니없이 짧았던 의천의 일생, 엄청난 양의 책을 수집하고 교정하고 판에 새겨 출간하던 일, 화엄종의 승통으로 천태종을 열어 고려의 불교를 혁신하던 일, 숱한 불사와 번역과 강연, 그리고 저술…… 그의 삶이 단 몇 년 만이라도 늦춰질 수 있었다면, 그래서 그의 힘으로 그의 일을 마무리할 기회를 가졌다면, 고려의 불교, 아니 우리 불교의 역사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개성 영통사에 있는 대각국사비. 비문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지었다.

만세(萬世)에 유통하여 수많은 동기를 지닌 중생들을 이끌어 반본환원(返本還源)하도록 하는 것이 저의 본원(本願)입니다.

의천은 자신의 시대를 말세라고 불렀다. 오랜 전쟁을 겪으며 불전과 가르침은 전승이 끊어지고 길을 잃었다. 의천은 사라지고 흩어진 책, 불전에서 희망을 찾았다. 책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출간하는 일, 그 일이 가르침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일을 ‘미래의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불렀다. 사라지고 흩어진 책과 가르침을 수습하여 다시 중생들에게 돌려주는 일, 그 일을 반본환원이라고 불렀고, 평생의 본원(本願)으로 삼았다.

만일 중생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나의 소원도 없어진다. 중생들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나의 소원도 없어지지 않는다.

원효가 지은 <열반종요(涅槃宗要)>의 구절이다. 원효와 의천이 함께 품었던 본원이 이런 것이었다. 미래의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 이런 일이 본래 고단하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익이 아니다. 먼 미래의 일, 누군지도 모르는 어떤 중생들을 위하는 일, 어떤 보답도 대가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감당하는 이들을 대비의 보살이라고 높여 부른다.

좋은 인연 심어 놓은 그윽한 자리
전단향 오래 되어 향기도 무성해라
고요하고 쓸쓸히 천 년을 지낸 뒤에
멀리 보는 마음 알아보게 되었네

의천이 가깝게 지내던 윤관에게 준 시의 구절이다. 윤관이 시골 어디쯤에서 수많은 양의 침향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른바 매향(埋香)의 전통이다. 미륵 부처님이 오시는 날, 함께 공양할 향을 미리 묻어 두는 전통이다. 향을 묻는 일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향을 묻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향도(香徒)라고 불렀다. 의천은 ‘천 명의 대중이 몸은 달라도 한 마음으로’ 라고 표현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고단한 일이다. 그러나 향을 캐내어 향을 즐기는 미래의 중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된다. 천 년 전의 향도(香徒)들이 향을 묻었다면, 원효와 의천, 그리고 그의 향도들은 책을 묻었다. 미래를 향한 본원, 미래의 중생을 이롭게 해 줄 선물, 원효와 의천은 그런 일을 본원으로 삼았다.

의천 이후의 천년 또한 고요하고 쓸쓸했다. 모두가 잊었던 일, 그 일은 누구도 아닌 미래의 중생, 바로 우리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제국도 중화도 이런 일에 간섭할 수 없다. 국가나 민족, 어떤 종류의 이기심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원효와 의천의 위엄이 이러했다. 의천이 묻은 책은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를 바꾸었다. 어린 왕자의 ‘멀리 보는 마음’, 천 년이 흘러 이제 우리는 그의 마음을 알아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불교가 누리는 위엄 또한 대각국사의 ‘멀리 보는 마음’의 덕택인 것은 틀림이 없다.

오윤희

비백교학연구소 소장과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사단법인 운허기념사업회 언해불전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디지털북>,<매트릭스,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선(禪)>,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 <일꾼 의천>, <세종은 왜 불교책을 읽었을까> 등이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