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259호

법관 꿈꾸던 마산 소녀
해금으로 불법(佛法) 연주하며
세상에 행복ㆍ희망 전해

해금을 품에 안은 성의신 씨.

가을밤 산사에 울려 퍼지는 악기의 선율은 세상사 시름을 놓아버리게 만든다. 연주자의 감성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때, 연주자와 관객은 하나가 된다. 무협영화에서는 악기 연주로 사람의 생사를 좌우한다. 그만큼 소리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보여준다. 악기 하나로 세상 사람들을 행복감에 젖게 만들고, 때로는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해 눈물을 흘리게도 하는 일, 연주자의 몫이다. 한때 비인기 국악기였던 해금으로 우리네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이, 성의신(57) 씨. 그는 타인의 행복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사는 국악인이다.

“의신아, 넌 왼손 힘이 좋은데, 오른손 힘이 약해. 음악성이 있으니 고등학교에 가서는 해금을 배워 보는 건 어때?”

성의신 학생에게 중학교 3년 내내 가야금을 가르쳤던 조순자(현 중요무형문화재 제 30호 가곡예능보유자) 선생이 졸업을 앞두고 던진 조언이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해금 연주자 성의신을 만든 최고의 한 마디가 됐다.

선생님 조언 듣고 해금 전공

성의신은 초등학교 시절에 잠깐 동안 피아노를 배웠지만, 평생 음악을 전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마산여중에 진학하면서 국악기와 인연을 맺는다. 학교 선생님이 특별활동 시간에 발레를 배워보라고 했지만, 발레복을 입고 가을 발표회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서울에서 온 조순자 선생이 고전무용을 배울 학생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지원했다. 성의신 학생은 한국 무용과 승무, 그리고 가야금을 배웠다. 조 선생은 레슨비를 받지 않고 의신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성의신은 가야금 산조 2개와 병창을 배웠는데, 사찰 법당에서 연주를 할 만큼 기량이 뛰어났다.

“해금을 배워보라.”는 조언을 들은 성의신 학생은 서울 유학을 생각했다. 해금이 어떻게 생긴 악기인지도 몰랐지만, 서울에 가고픈 마음이 컸다. 학교 선생님들과 어머니는 만류했다.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었기에 어머니의 만류는 당연한 일이었을 터. 당시 소녀 성의신의 장래희망도 법관이 되는 거였다.

결국 성의신은 어머니를 설득해 서울에 있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악기로 시험을 보지 않고 연합고사 점수로 입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학생 중 한 여학생이 해금연주를 시연했는데, 소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조순자 선생의 말이 떠올라 해금을 전공악기로 정했다. 반 학생 50명 중 해금을 써낸 이는 의신이 유일했다. 대부분은 인기 국악기였던 가야금을 선택했다고 한다.

여고생 성의신은 1년 간 자취하며 공부했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외동딸이 안쓰러워 학교 인근의 장충동에 집을 사서 함께 살았다. 성의신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모녀는 서로를 의지했다. 성의신은 국악고에서 해금을 배우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갈고 닦은 가야금 실력을 발휘, 대학생 언니들에게 가야금 지도 과외를 하며 용돈을 벌어 쓸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소녀였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여름방학 때 그는 어머니를 따라 구인사에 갔다가 천태종 2대 종정 대충대종사로부터 “운이 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가만히 있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에 합격해 해금 연주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성의신의 실력을 키워준 두 번째 스승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지도를 해준 강사준 교수였다.

자신 음악색깔 담은 음반 발매

성의신 씨는 대학 졸업 1년 뒤인 1985년 KBS 국악관현악단 창단 멤버로 입단하면서 본격적인 해금 연주자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는 1993년 KBS 국악관현악단 단원 중 불자들과 함께 ‘마하연 국악실내악단’을 창단한다. 불교음악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몇 년 후 그는 한계에 부딪혔다. 연주할 수 있는 창작된 불교음악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곡 공부를 하지 않아 곡을 쓸 수 없었기에 작곡가에게 의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결혼과 출산 후 큰 전환점을 맞는다. 그러면서 자신을 되돌아봤다. 현실 생활에 안주하던 그에게 큰 변화가 필요했다. 고심 끝에 창작 해금 연주곡 분야의 개척자 중 한 명인 김영재 선생을 찾아가 배우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후배들과 제자들이 자신을 앞서 가고 있었다. 자신이 뒤처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충격이 컸다. 순풍에 돛을 단 듯 평탄한 삶을 살던 그녀에게 위기가 온 것이다. 40살쯤이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다져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사이, 그에게서 해금을 배운 제자와 후배들은 해금연주의 현대화 작업을 열중하며 주목받고 있었다.

 

“내가 나를 되돌아보니 ‘음악은 경쟁이 아니다. 학교에서야 등수가 정해지지만 사회에서는 1등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리고는 ‘내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남을 따라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할 수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죠. 그래서 불교가 바탕이 된 삶을 살기에 명상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2004년 발매한 1집 앨범 ‘Moon in the cloud’입니다.”

 

그만의 음악세계를 담은 앨범 발매는 음악적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슬럼프를 이겨내고 음악인생 2막을 연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2006년 해금소리 2집 ‘The hill of the memory’, 2007년 3집 ‘열두 송이 연꽃 노래’, 2010년 4집 ‘미래회상’, 2013년 ‘우리 소리에 마음을 놓다’, 2014년 5집 ‘추억’을 내며, 국내 최정상급의 해금 연주자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첫 음반이 전통 국악에서 벗어난 가요풍의 음악이어서 지인들에게 주지 못했다. 이 앨범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해금 연주자 성의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

6장의 앨범 중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음반은 3집 찬불가 앨범과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담아 낸 4집 ‘미래회상’ 이다. 특히 ‘미래회상’ 앨범은 그가 평소 해금으로 연주해 보고 싶었던 ‘영산회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 음반 덕분에 그는 2010년 KBS 국악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로 성의신 씨는 승승장구하며 각종 무대에서 해금의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대에 섰고,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이런 그의 화려한 경력 뒤에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후원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사찰에서 100일 기도 후 성의신 씨를 잉태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외동딸을 애지중지 키우며 적극 후원, 한국을 대표하는 해금 연주자로 키워냈다. 특히 구인사에서 여름ㆍ겨울 안거를 빠지지 않고 수행하며, 365일 딸이 잘되기만을 기도했고, 딸이 부처님 그늘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연도 맺어줬다. 그런 어머니가 구순의 고령에다 건강이 나빠지자 성의신 씨는 집을 관문사 아래 아파트로 옮겼다. 어머니가 언제든 사찰에 다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가녀린 체구지만 어머니를 닮아 체력과 정신력은 강한 편이다. 직장과 각종 강의를 다니느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지만, 늘 에너지가 넘치는 이유다. 요즘 그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격주로 해금과 인생이야기, 연주로 꾸미는 국악 토크콘서트에 푹 빠져 있다. 빠듯한 일정이지만 오히려 힘을 얻고 온다고 한다.

해금은 몸에 힘을 완전히 빼고 연주를 해야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공연 전 몸과 마음에 힘을 빼는 과정은 필수다. 그는 명상과 함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도록 사람들과 대화하며 기분을 좋게 만든다.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해야 즐거운 음악이 나올 수 있기에.

해금의 시대를 만드는 데 기여한 성의신 음악가. 후세에 성의신이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할지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음악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그가 앞으로 하고픈 것은 불교음악이다. 끊임없는 창작활동으로 불교음악 작품을 만들어 낼 계획이다.

불교음악의 현대화, 음악 속에 든 불교정신을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목표다. 불교문화가 꽃피면 불교정신도 살아난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깨닫고 있다. 그가 불교음악 창작활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법관의 의사봉을 쥐고 싶었던 소녀의 손에서 부처님 가르침〔佛法〕의 법음이 피어오르고 있다.

 

성의신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를 졸업했으며, 한양대 음악대학 국악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제4차 여성불자 108인에 선정됐으며, 제8회 대원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경북대ㆍ부산대ㆍ용인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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