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은 공망의 길
문명 다양성 수용해
동질성 모색해야

때늦은 이야기지만 새뮤얼 헌팅턴이 쓴 〈문명의 충돌〉은 문명사적 관점에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조망해 본 책이다. 종교와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문명 간의 충돌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문명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 선종사에서 문명의 충돌은 간화선과 묵조선의 충돌이다. 간화선과 묵조선은 수행방법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선종사상 최대로 격돌했다. 비판은 비난으로 확대됐고, 비난은 매도하는 수준으로까지 전개되었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간화선의 대표자인 대혜(大慧, 1089~1163) 선사였다. 그는 화두를 들지 않고 그냥 묵묵히 앉아만 있는 것은 무명(無明)만 조장할 뿐이라고 하여 묵조선을 ‘무명의 귀신 소굴[黑山下鬼窟裏]’이라고 비난했다. 또 ‘묵조는 삿된 선, 짝퉁선이다. 가짜선이다[默照邪禪]’, ‘묵조는 안일무사에 빠져 있는 선이다[無事禪, 無事甲裏]’, 또는 ‘고목처럼, 불 꺼진 죽은 재처럼 아무런 지혜 작용이 없는 선[枯木死灰禪]이다’, ‘어리석은 선[痴禪]이다’, ‘눈알이 없는 선[盲禪]이다’ 등 아주 원색적인 용어를 총동원하여 공격, 비판했다.

이에 묵조선의 대표자인 진헐청료와 굉지 정각(1091~1157)은 ‘간화선은 부질없이 깨달음을 기다리고 있는 대오선(待悟禪)이다’, ‘공안(화두)과 깨달음에 얽매여 있다’, ‘사다리처럼 하나의 공안(화두)을 통과하면 또 다른 공안을 통과해 가는 제자선(梯子禪, 사다리선)이다’,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가는 학습선(學習禪)이다’라고 비판했다. 비난의 언어와 수위는 대혜 선사가 한 수 위였다.

간화선에서는 묘오(妙悟), 즉 별도로 깨달음의 세계가 있으므로 깨닫기 위해서는 ‘무(無)’, ‘간시궐’ 등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조선에서는 본증(本證), 즉 본래 깨달은 부처이므로 별도로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따라서 깨닫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고요하게 앉아서 좌선하고 있는 그 자체가 곧 깨달은 부처의 행(行)이라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 명상 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화선에서는 수행방법으로 새로 화두를 고안하여 그것을 참구했고 묵조선에서는 종래의 수행방법대로 좌선 수행했다. 간화선에서는 지혜가 우선이고 좌선이나 선정은 그 다음이라는 입장이었고(先慧後定), 묵조선에서는 좌선을 중시했고 지혜는 그 다음이라는 입장이었다(先定後慧).

이와 같이 간화선과 묵조선은 그 수행방법과 목적 등이 현격하게 달랐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뇌가 터지도록 비판, 비난했다. 물론 비난의 적극적인 도전은 대혜 선사였다. 그의 공격 대상은 오로지 좌선과 무심무사를 내세우고 있는 묵조선이었지만, 관혁은 굉지 정각보다는 그의 사형인 진헐 청료(眞歇淸了, 1089~1151)였다.

간화선과 묵조선의 충돌은 종교 문명사적으로 보면 문명의 충돌이다. 충돌 이후 간화선의 역사는 100년이 지난 남송 원대에는 흐지부지해졌으며, 명청시대에는 선과 정토가 결합한 ‘염불자수(念佛者誰)’ 화두가 중국 천하를 통일했다. 간화선의 무자화두는 한국 선원과 어록 속에만 남아 있게 되었다. 문명의 충돌로 고향을 떠난 것이다.

문명의 충돌인가, 공존인가? 결국 사상이나 철학, 주의(니즘)도 공존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충돌은 공망(共亡)의 길이다. 문명의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동질성을 모색하려는 수평 정신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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