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있는 여행지(258호)

느림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신안군 증도.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의 한 대목이다.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의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같은 시간 동안 점점 더 많은 생각과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빨라진 삶의 속도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것을 많이 얻은 반면 가지고 있던 것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 많아진 생각과 일들로 인해 사색의 기회와 점검의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살필 시간이 없는 것이다. 삶 속에서 ‘나’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느림의 즐거움이란 인류가 인류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잠시라도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오늘, 지금까지의 삶의 속도를 버리고 전혀 다른 삶의 속도에 다가가 본다. 아침 햇살이 섬들을 깨우는 것으로, 태양이 바닷물을 거두어가는 것으로, 모이고 모인 바닷물이 풀들을 키우는 것으로, 바닷물이 갯벌을 채우는 것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곳이 있다. 2007년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전남 신안군의 증도를 찾아 사라져가는 느림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신안군 증도.

다가오는 시간, 갯벌

검은 갯벌 위로 여명이 번져온다. 곧이어 간밤에 바다가 다녀간 갯벌 위로 햇살이 다가온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는 그 바다가 늘 머물고 있다. 검은 진흙을 뒤집어 쓴 짱뚱어, 농게, 칠게가 햇살에 불려나와 갯벌 위를 걷고, 바다의 끝에서 날아온 갈매기는 바다의 기별을 전한다. 바다 건너에선 또 다른 섬들이 아침 햇살에 하나 둘 깨어난다. 증도의 갯벌에서 맞은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멀리 흘러가기만 했던 시간이 발밑으로, 눈앞으로, 귓가로 다가왔다. 이곳의 시간은 내가 아닌 그들이 정했고 그들에 의해 흘렀다. 햇살이, 갯벌이, 짱뚱어가, 갈매기가, 깨어나는 섬들이…. 북무안 IC를 나와 지도와 사옥도, 증도를 연결하는 연육교를 지나 증도에 들어서면 그렇게 다른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증도는 신안군의 800여 섬 중의 하나이다. ‘슬로시티’는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잘 보호하면서 자유로운 옛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이다.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치타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이다. 전통과 자연생태를 슬기롭게 보전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기반으로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추구해 나가는 도시라는 뜻이다. 현재 세계 100여 개 도시와 증도를 비롯한 한국 도시 11개가 지정되어 있다.

태평염전 전경.

쌓이는 시간, 태평염전

드넓은 들판에 파란 하늘이 내려와 있다. 파란 하늘을 담고 있는 것은 육지로 불러들인 바닷물이다. 그 파란 하늘 밑에는 하얀 소금이 잠자고 있다. 염전이다.

증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태평염전이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옛날 방식 그대로 천일염을 생산하는 태평염전은 국내 최대(462만㎡)의 단일 염전이다. 2007년 등록문화재 제360호로 지정됐다. 태평염전 입구 쪽에 있는 소금전망대에 오르면 태평염전을 한눈에 불 수 있다. 바닷물을 모아둔 저수지에서 염전의 증발지로 바닷물을 들이면 바닷물은 천천히 낮은 증발지를 거치며 흘러간다. 칸칸이 증발지를 거치는 동안 태양과 바람이 조금씩 바닷물을 거두어 간다. 20여 일 후, 결정지에서 소금꽃이 피기 시작한다. 소금꽃을 모아 소금창고로 옮기고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지나면 완전한 소금이 된다. 염전의 시간은 염부의 것이 아니었다. 모여서 흘러가는 바닷물과 바닷물을 거두어가는 태양과 바람으로 시간은 흘렀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시간은 만들어졌고, 또 다른 시간을 위해 차곡차곡 쌓여갔다.

태평염전 전경.

피어나는 시간, 태평염생식물원

연둣빛 들판 위로 바닷바람이 지나간다. 태평염생식물원이다. 유네스코 생물다양성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태평염생식물원은 태평염전에 딸린 염전습지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염전습지의 생물상이 고스란히 보존된 생태습지이다. 지구의 생태계는 하루에 100여 개의 생물 종이 감소하고 있지만, 태평염생식물원은 자연발생적이고 다양한 동식물 생태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자연의 보고이다. 자연갯벌에 자생하고 있는 70여 종의 갖가지 염생식물군락지를 관찰할 수 있다. 오염된 환경에서는 자랄 수 없다는 띠를 비롯해 함초ㆍ나문재ㆍ칠면초ㆍ해홍나물 등은 바닷물을 먹고 피고, 바닷물을 먹으며 자란다. 흘러가는 시간처럼 물 역시 흘러가는 것 중의 하나이다. 바닷물은 기다림의 물이다. 흐르고 흘러서,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물이다. 염전 곁에서 피어난 풀들은 그 기다림의 물을 먹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모이고 모인 시간 끝에 그들은 피어있는 것이다. 식물원 내에 마련된 200여 미터의 ‘생태천국길’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서있는 시간을 바라본다. 모이고 모인 시간 사이를 걸어본다.

태평염생식물원.

채워지는 시간, 짱뚱어다리

태양이 머리 위를 지날 때 쯤, 갯벌 위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증도의 명물 짱뚱어다리의 발목 위로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짱뚱어가 뛰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짱뚱어다리는 갯벌 위에 떠 있는 470m의 목교로 갯벌 생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청정 갯벌에서만 살 수 있는 짱뚱어가 이곳에 많이 살고 있어 이곳에 짱뚱어다리를 세웠다. 물이 빠지면 질퍽한 갯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물이 들면 마치 바다 위를 거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리를 거닐 수 있다. 갯벌 위로 바닷물이 채워진다. 이곳에서 바닷물은 시간이다. 짱뚱어다리 위에 서면 채워지는 시간을 볼 수 있다. 짱뚱어ㆍ농게ㆍ칠게ㆍ갯지렁이ㆍ조개들이 바다의 시간을 맞는다. 갯벌은 천천히 천천히 바다가 되어갔다. 느리게 느리게 무엇이 되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것처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문명의 속도로 인해 본연의 속도를 잃어가고 있는 지금, 좀 더 천천히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문명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만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짱뚱어다리.
증도 갯벌.

박재완

서울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현대불교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2008년과 2010년 한국불교기자상(사진영상 보도부문)을 수상했다. 2012년 <에세이스트>에 수필로 등단했고, 2016년 5월 산문집 <산사로 가는 길-연암서가>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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