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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로 배우는 불교 12.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와 관음예참(1)
  • 이승희/홍익대학교 강사
  • 승인 2016.10.2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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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전각 건립 40여 년 뒤 후불벽 그려

아미타삼존도. 극락보전의 후불벽 앞면, 1476년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인 무위사(無爲寺)에는 국보 13호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보전이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한다. 1430년에 지어진 조선초기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을 가진 단층 전각이다. 전각의 내부 수미단에는 조선후기의 전각과 달리 후불벽을 설치하여 공간을 앞면과 후면으로 분할하여 후불벽의 앞 수미단에는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고 그 뒤에 아미타삼존후불벽화를 그렸다. 1478년에 조성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삼존상은 조선초기의 새로운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보물 제1312호로 지정돼 있다. 황토바탕 위에 그려진 후불벽화 또한 엄정한 자세의 아미타삼존과 다양한 표정의 6명의 제자가 한 화면에 어우러져 조선초기의 우수한 작풍을 보여준다.

후불벽의 뒷면에도 역시 황토 바탕 위에 물결치는 바다에서 바람을 가르며 연잎을 타고 오는 백의를 입은 관음보살과 합장을 한 노인형의 인물이 백의관음을 바라보고 있다(우측 그림). 불전의 동측 상단에는 아미타여래와 팔대보살 및 제자들이 내영하고 있고, 반대쪽 서벽측 상단에는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있다. 그 밖에 동·서측의 벽화들은 보전처리 되어 유물전시관에 옮겨져 전각 내에서는 볼 수 없지만 창방 이상의 불벽에는 여래, 보살, 비천, 공양화 등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극락보전은 마치 실제의 극락세계를 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불전의 내부에 후불벽을 설치하는 구조는 봉정사 대웅전(15세기), 개심사 대웅보전(1484년 중창) 등 조선전기 사찰에 주로 보인다. 이 두 전각이 모두 석가여래를 모신 대웅전인데 비해 무위사의 전각은 아미타삼존을 모신 극락보전으로 내부의 벽화들에는 당시 사람들의 극락에 대한 염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특히 극락보전의 후불벽 앞면에는 아미타삼존도를, 후면에는 백의관음도를 배치한 독특한 구성은 당시 사람들이 행했던 극락왕생을 위한 신앙행의(信仰行義)와 관련이 있어 조선전기 관음신앙의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볼 수 있어 매우 의미가 깊다. 후불벽의 유기적인 관계를 해석하여 조선전기 백의관음보살 신앙 및 의식을 살펴보기 이전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게 된 시대적 배경과 후원자, 전각이 건립되었던 목적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무위사는 원래 신라시대 창건되어 고려시대 가지산문에 소속되었던 선종사찰이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사찰 통폐합의 2차 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資福寺)가 되었다. 이후 1430년에 전각을 건립하게 되는데, 각종 부재에 남아있는 묵서에 따르면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녕대군 이보(李補, 1396~1489)가 ‘지유(指踰)’로서 전각의 건립에 참여하였고, 이곳에서 ‘수륙재를 설하였다’고 쓰여 있다. 효녕대군이 맡았던 지유는 조선전기 대전이나 인수부에 소속되어 왕실의 상제의식(喪制儀式)의식에 관여했던 직책이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이다. 조선전기 왕실에서는 영가천도를 위한 모든 의식을 정리하여 수륙재와 합설하였고, 수륙재는 왕실의 추천재를 대표하는 불교의식으로 자리잡았다. 효녕대군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1432년 한강의 대규모 국행수륙재를 주최하는 등 각종 추천불사를 주관하였는데, 무위사에 수륙의식을 위한 불전을 건립한 것도 왕실추천불사를 주관했던 효녕대군의 불사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무위사에 수륙을 위한 불전을 건립했던 직접적인 배경에는 효녕대군과 조선전기의 유명한 천태승려였던 행호(行乎, ?~1446) 스님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행호 스님은 태종대부터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세종 1년인 1418년에 도대선사(都大禪師)이자 천태종사(天台宗事)가 되었던 마지막 천태종 승려였다. 효녕대군은 젊은 나이에 행호 스님에게 귀의하여 궁중에 불교를 보급하였는데, 행호 스님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행호 스님을 ‘진불(眞佛)’이라 여기고 공경하는 예를 다하였다고 전한다.

1424년 불교종단이 통폐합된 후 행호 스님은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전라도 일대의 사찰을 중수하게 되었다. 그중 주목되는 사찰중수가 1430년 강진 백련사의 중창이다. 강진의 백련사는 고려후기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가 백련결사를 열었던 곳으로 고려후기 천태종의 부흥지였다. 백련사는 무위사와 함께 1407년 자복사로 지정되었지만 일주일 만에 왜구의 침략으로 전소하게 됨에 따라 이를 안타깝게 여긴 행호 스님은 백련사 중창을 발원하고 효녕대군에게 후원을 요청하였다. 효녕대군은 행호 스님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 대공덕주로 참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강진의 토착세력들이 가세하여 백련사는 중창되었다. 무위사는 백련사와 거리가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원래 선종사찰이었던 무위사가 1407년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선정이 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행호 스님과의 인연으로 효녕대군이 무위사 전각(극락보전)의 건립에 참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전각이 건립되었던 처음부터 후불벽이 설치되었던 것은 아니다.

극락보전 안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벽화를 그린 시기는 건립한 후로부터 46년이 지난 1476년이다. 수륙재를 위한 공간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각 내부의 공간을 개조하여 극락보전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수륙재라는 특정 의식을 위한 공간보다 일상적으로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염두에 둔 개조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후불벽의 앞면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고 그 뒤에 백의관음보살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두 도상 간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다음 호에 조선 초기 관음신앙과 불교의식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백의관음도.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 1476년

이승희/홍익대학교 강사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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