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는 모든 실천수행의 근본

남녀의 평균수명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갑니다. 남성은 80세를 바라보고, 여성은 평균 80대 중반을 산다고 합니다. 오래 산다는 것이 반갑기는 하지만 무조건 환영할 일도 아닙니다. 젊고 싱싱한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늙고 병들어서, 그리고 직장에서 물러나 연금에 의지하며 적은 돈에도 벌벌 떨면서 약봉지를 끼고 오래 사는 것이 장수 시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부모가 장수하는 시절인지라 자식들도 같이 늙어갑니다. 늙은 부모를 늙은 자식이 보살펴드려야 하는 것이 100세 시대인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햇볕을 쬐며 시름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늙은 부부를 보고서 아난다에게 이런 게송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청정한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또한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다.
가진 재산을 전부 탕진한 지금
저들이 실의에 잠긴 모습을 보라!
날개 부러진 왜가리가
물고기 없는 마른 연못에 머물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힘없이 누워 있는 저들을 보라!
힘이 다해 땅에 떨어진 화살처럼
지나가 버린 것을 그저 탄식하고 있을 뿐이로구나.

물고기 없는 마른 연못을 하릴없이 내려다보는 왜가리의 모습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보게 됩니다.

늙는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마음은 20대 청년 못잖지만 정작 몸은 마음을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집밖에서나 집안에서나 단순히 나이 들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어떻게 오래 사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인지, 죽을 때까지 보람차게 사는 것인지에 따라 그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서 백발이 다 되어도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의미와 보람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가자가 평생 자신의 수행과제로 삼아야 할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사경, 참선, 염불 등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시’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경전에서는 보시할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보시가 모든 실천수행의 근본이며, 가장 쉽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라던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특히 재가불자들에게 여러 차례 강조한 법문 중에 “불법승 삼보에 대해 믿음을 일으키고, 계를 잘 지키고, 열심히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라고 하는 육념(六念)의 법문이 있습니다. 여기서 ‘천상’이란 말은 내 머리 위 저 높은 곳을 가리킨다고도 하겠지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고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경지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생에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다음 생에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보시와 지계 등의 선업을 지어야 한다는 이 말은 경전에서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보시의 종류

보시란 아시다시피 ‘주는 행위’인데, 이런 보시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재물의 보시(재시)와 법의 보시(법시), 그리고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무외시)입니다.

이 세 가지 보시 가운데 보통의 재가자들이 할 수 있는 보시는 재물을 남에게 베푸는 재시입니다. 하지만 이런 재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제 주머니에서 무엇인가가 나가는 것이 반갑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법문이 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잡보장경〉에서 들려주는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라는 무재칠시(無財七施)로, 눈의 보시, 온화한 얼굴과 기쁜 얼굴빛의 보시, 말씨의 보시, 몸의 보시, 마음의 보시, 자리의 보시, 방이나 집의 보시입니다. 눈의 보시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따뜻하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하며, 몸의 보시는 존경할 만한 분을 보면 일어나서 맞이하고 예를 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시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정법념처경〉에는 아주 다양한 보시 종류가 등장하는데, “지혜의 보시, 계율의 보시, 법의 보시, 위안의 보시, 바른 길을 가르치는 보시, 길을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치는 보시, 길을 가는 이에게 물을 주는 보시, 목숨의 보시, 기구의 보시,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 진실한 말의 보시, 의심을 끊어주는 보시, 다섯 계율의 보시, 집을 떠난 이에게 주는 계율의 보시, 온전하게 다 갖춰진 계율의 보시, 약품의 보시, 눈의 보시 등이다.”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시의 종류를 나열한 뒤에는 “이런 갖가지 보시는 현재와 미래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치 부모와 같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하고 닦으면 그 가난함이 끊어지고 나쁜 길로 윤회하는 것이 끊어지며, 천상과 인간에서 즐겁고, 그 즐거움을 다 누린 뒤에는 마침내 열반을 얻을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즐겁고 행복해지고 넉넉하게 살고 싶으면 보시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경에서는 보시가 갖춰야 할 열두 가지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대로 된 장소를 갖추는 일이요, 둘째는 시절을 갖추는 일이며, 셋째는 공덕을 갖춰야 하며, 넷째는 좋아할 만한 물건을 갖춰야 하며, 다섯째는 복밭을 갖춰야 하고, 여섯째는 굶주리고 목마른 이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신심으로 보시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구하지 않는데 주는 공덕을 갖추는 것이고, 아홉째는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며, 열째는 존경하는 이에게 훌륭하고 풍족한 향나무를 보시하는 것이며, 열한번째는 세상의 천대를 받지 않는 이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열두째는 보시하고도 갚음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내용에는 아주 흥미로운 말이 덧붙여집니다. 즉, “이런 열두 가지 깨끗한 보시를 행하면 그는 전륜왕이 되어 재물이 풍족하고 혹은 천상에 나거나 천상의 신들과 비슷한 사람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보시 강조한 이유

그렇다면 왜 이렇게 보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 보시를 하면 행복해집니다. 즉 선업을 지었으니 그에 따른 즐거운 과보가 당연히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가령 남에게 음식을 보시했다면 그것은 그에게 수명을 보시한 것과 같고, 건강을 보시한 것과 같고, 아름다운 몸매를 보시한 것과 같아서, 틀림없이 보시한 주인공에게도 똑같이 수명과 건강과 보기 좋은 몸매라고 하는 공덕이 찾아온다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둘째, 보시를 하면 좋은 향기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언제나 좋은 향을 풍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풍기는 좋은 향기는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조금 더 특별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보시의 향기가 바람이 불어와도 그 세력을 거스르면서까지 풍기는 강력한 향기입니다.

셋째, 보시는 인색함과 싸워서 이기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욕심 부리며 살아왔습니다. 무엇이든 움켜쥐려고만 했습니다. 움켜쥐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우리에게는 탐욕이 더욱 커져갔고, 인색함이 자라났습니다. 인색함은 사람의 마음을 각박하게 만들어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조차 넉넉한 여유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출요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승리자는 보시하는 사람이다. 승리란 인색함과 탐욕스러움을 이긴 것이다. 공덕의 근본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남을 미워하고 성현들을 질투하며, 보시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대신해서 그 재물을 아까워한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저 사람에게 보시하면 이후에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심을 굳게 세운 사람은 보시를 아주 잘하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과보를 바라지도 않는다. 또한 구걸하는 사람이 문의 출입구를 막을 정도로 많아도 제한을 두지 않고 조금도 거절하지 않는다.”

넷째, 보시는 세 가지 덧없는 곳에 세 가지 든든함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증일아함경〉에 따르면, 세 가지 덧없는 곳이란 몸과 목숨과 재물입니다. 덧없는 몸을 공손하게 기울여서 상대방을 존경하고 절을 올리는 것이 덧없는 몸에서 든든함을 찾는 것입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살생하지 않고 폭력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등 5계를 잘 지키면 덧없는 목숨에서 든든함을 찾는 것입니다. 언제나 남에게 베풀기를 생각해서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낌없이 주면 이것이 덧없는 재물에서 든든함을 찾는 것입니다.

다섯째, 보시는 덧없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의지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증일아함경〉에서는 “보시는 다음 세상의 양식이 되니/반드시 궁극적인 해탈의 경지로 가게 되리라./착한 신장이 언제나 그를 보살피고/그리고 또 언제나 기뻐하리라.”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평생을 재물을 모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재물을 움켜쥐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움켜쥔다고 해서 영원히 내 것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쓰기 위해서 버는 것입니다. 내가 써서 없애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 재물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재물은 우리의 다음 생까지 따라가지 않습니다. 평생을 재물 모으려고 아등바등 살았건만 이건 너무 야속합니다. 하지만 억울해할 일은 아닙니다. 재물은 나를 따라오지 않더라도 그 재물로 한 좋은 행위(선업)는 따라옵니다. 그것이 바로 보시입니다. 이번 생도 행복해지고 다음 생도 행복해지려면 쉬지 않고 무엇이든 베풀어야겠습니다.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 믿을 것은 그것 밖에 없는 듯합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