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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식, 과거속으로 9. 해남 대흥사 내 표충사 서산대사 춘추제향
  • 글ㆍ사진=김성재/역사학자
  • 승인 2016.10.2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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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때 공 세운 휴정〈서산대사〉, 국가서 제사
제향 의미 살려 국민 공감대 넓혀야

2014년 4월 25일 열린 서산대사 제향 모습.

“부처의 해가 처음 비추자, 자애로운 구름은 경전이 되었다.
정녕코 온세상에 또 영원토록 전할 것을 부탁한다.
서원을 묻는다면 무엇은 바라고 또 무엇은 접으리오.
의로움의 바다는 망망하게 펼쳤는데, 나루터에 나아가는 자는 적구나.
복된 나라는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니, 고승은 이 부름에 응답한다.
높은 곳에 올라 한번 크게 소리치니, 마군들이 흩어져버린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밝고, 파도는 조용하고 물결은 평안해지도다.
우담바라는 동해바다에 솟아오르고 ...
8만4천 법문으로 자손들이 함께 즐기리라.”
〈정조대왕 친필 어제명〉

서산대사 제향을 설행한 6년 뒤, 정조대왕은 해남 대흥사에 친필 어제(御製) 명문〈좌측 하단 인용문〉을 보냈다. 이 글을 읽으면 정조대왕은 마치 불국토의 대왕처럼 느껴진다. 주자학으로 세운 나라에서 어떻게 이러한 일이 생겨날 수 있을까? 정조는 전대 국왕들의 불교 배척을 반성했고, 불교는 정조 치세 내내 유교와 함께 조선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이 되었다.

정조대왕 명으로 춘추제향 설행

정조 2년(1788) 계홍 스님과 서산대사 7세 법손 천묵 스님은 서산대사의 제사를 나라에서 올리도록 청원하고자 한양 천리 길을 발이 문드러지도록 드나들며 호소했다. 정조는 구중궁궐에서 서산대사의 위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정조는 ‘충성’이란 유학을 공부한 선비만이 할 수 있는 덕목이라 생각했다. 호조판서 서유린이 서산대사 열반 후 새겼던 월사 이정구와 계곡 장유의 비석을 대둔사(대흥사)와 금강산 유점사에서 찾은 내용을 보고하였다. 그해 늦가을 드디어 정조대왕은 대흥사에 ‘표충사’ 친필 현판을 내리고, 영원토록 대흥사에 봄·가을 두 차례 향과 제물을 보내 서산대사 휴정을 기리는 제향을 설행케 했다. 대흥사에 즉시 사당을 짓게 하고, 그 여덟 달 뒤인 정조13년 4월 표충사 낙성과 함께 예조정랑을 보내 첫 제향을 올리게 했다. 온 불교계가 400년에 걸쳐 비원하던 일이 성사되었다.

서산대제 제향

서산대제가 거행되는 날 아침, 제향을 올리는 보현전 마당 특설무대 위에는 제례상이 진설되어 있다. 표충사 마당이 좁아 많은 사람이 제향에 참석하기 위해 보현전 마당으로 제례소를 옮겨왔다. 무대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뇌묵대사의 진영이 걸려있고, 신위가 놓여 있다. 그 앞에는 3좌의 제상 위에 다른 제사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모양의 제기들이 가득 펼쳐져 있다.

잔 올리는 앞 쪽으로 대나무 가지를 첨성대 모형처럼 얽어 짜 올린 듯한 제기가 여섯 개씩 두 줄로 놓이고, 그 다음에는 높은 굽이 달린 까만 칠기가 두 줄로 겹쳐 있다. 이것이 바로 변()·두(豆)라 불리는 국가제향의 제기다. 신위 앞쪽에는 사각형의 청동제기가 둘 놓여 있다. 보()라 불리는 기물 역시 국가제향 제기다. 종묘제례와 사직대제에 사용하고, 공자의 제향인 문선왕석전에도 사용한다.

밥은 없고, 대신 보 위에 쌀과 좁쌀이 담겨있다. 채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쌓여있고, 두부와 여러 가지 견과류들이 있고, 미역과 김도 올라와 있는데, 전과 적, 생선찜 같이 조리한 음식은 보이지 않는다.

10시가 되면 제례의 집사관들이 먼저 입장하여 신위를 향해 재배 올리고 제향을 시작한다. 집사관들은 유교식 국가제향이어서 종묘대제 전례위원들이 맡고 있다. 같은 시각, 일주문을 출발한 봉향행렬이 보현전 제례소를 향해 출발한다. 행렬의 중심에는 향정자와 채연이 있다. 국왕이 내린 향과 제물을 싣고 오는 것이다. 뒤를 이어 예조정랑과 장흥도호부사 경양찰방, 흥양현감, 진도군수, 낙양군수, 해남현감이 들어온다. 200년전 이 국가 제향에 초헌관과 집사관을 맡은 관원들이다.

초헌관이 제단으로 올라가 삼상향을 올려 전폐례를 행한다. 전폐례는 하늘에 계신 혼령들이 입을 옷을 바구니에 담아 올리는 예다. 이 옷감은 망료례 때 태워 하늘에 보낸다. 초헌·아헌·종헌례는 이 행례의 핵심의례다. 초헌관이 삼작을 모두 올리고서, 사명대사와 뇌묵대사에게 차례로 올리는데, 헌관이 잔을 집사관에게 따라주면 집사관이 받아서 서산대사께 올린다. 아헌과 종헌 때도 같은 방식이다. 초헌관이 서산대사께 첫 잔을 올리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서산대사의 이름은 25자로 매우 길다. 임진란 당시 선조대왕이 서산 청허대선사에게 내린 선교도총섭이라는 직함에 존호를 붙인 시호 열아홉자에 정조대왕이 사제하면서 추서해 올린 6자가 합쳐진 것이다. 현대적 관습으로는 긴 이름이 낯설지만, 전통시대에는 존대함에 비례해서 시호 글자는 늘어난다. 축문에는 제향을 올리는 이유가 담겼다. 임진란 때 서산대사가 큰 공을 이룬 후, 곧 사명대사와 뇌묵대사에게 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이어가게 하고, 또 불교의 종풍을 이어가게 했다는 것을 말했다.

이 축문에는 불교를 위해 매우 중요한 구절이 있다. 서산 청허대선사의 제례를 ‘국가에서 제향한다’는 내용이고, ‘불교의 종풍을 이어가 게 했다’는 것이다. 50년전 영조 임금 때 사명대사를 사제하면서 서산대사를 그 아래 배향한 일이 있었다. 정조는 불교의 존비를 무시한 이 처사를 반성하였고, 이로써 불교종단이 존재 그 자체대로 인정된 것이다. 이 제향으로써 불교는 국초 이래 400년간 계속되어온 배척의 대상에서 벗어나, 국가 사상계의 한 축임을 인정받았다.

이 축문은 조선불교 전환의 시점을 증명하는 문서다. 이 제례는 전국적으로 불교계에 큰 반향이 있었던 것 같다. 6년 뒤 정조가 보낸 위 친필 어제 명문은 이를 확인하는 문서다. 그이가 없었어도 임진란이 승전으로 귀결될 수 있었을까? 선조는 유신들에게 “조선의 군병은 그 피곤함이 말할 수 없고, 숫자 또한 만 명도 채 되지 않아 매우 한심하다”고 토로한다. 의병들에게는 빈 관직을 주어야 하는데, 승병들은 군량을 싸가지고 와서 전투한다고도 했다.

제례는 망료례와 제기를 거둬들이는 철변두로 끝이 난다.

정조, 24기 찬기·반기 내려

서산대사 제례 상차림은 정조가 서산대사를 얼마나 귀중하게 추념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국조오례의’에는 국가제사를 대·중·소사로 나누고, 그 기준은 변두수로 삼았다. 대사 두 가지는 종묘대제와 사직대제다. 종묘대제는 왕조를 세우고 지켜주는 혼령들을 모시고, 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을 지켜주는 신을 모신다. 여기에는 12변12두의 제기를 쓴다. 다음은 10변10두의 중사로, 선농-농사의 신, 선잠-양잠의 신, 한양의 성균관에서 모시는 공자 제향이다. 하지만 주현(지방)의 향교에서 행하는 문선왕석전은 8변8두의 소사다. 일반 가정에서는 대신들이라도 변두를 쓰지 못한다. 병접 같은 속기를 사용한다.

정조는 서산대사 제향에 12변10두의 찬기와 2보의 반기(밥그릇)을 내렸다. 모두 24기다. 변·두로만 하면 문선왕(공자)의 제향을 뛰어넘고, 변·두·보·궤·등·형·조라는 모든 기물을 따지면 29기의 성균관의 문선왕 제향보다는 작고, 22기의 주·현 문선왕 제향보다는 크다. 서원의 제향 변두수는 4변4두 이하다. 정조는 공자와 비견되는 위치에 서산대사를 올려놓으려 한 것이다. 정조 12년의 조치로 서산대사 제향은 한양성곽을 벗어나서 가장 큰 제향이 되었다.

진설 방식 역시 매우 특이하다. 모두 24그릇을 6그릇 4줄로 네모 반듯하게 쌓았다. ‘국조오례의’에 변·두를 사용하는 국가제례가 모두 남북방향의 세로축 진설이다, 서산대제는 종축의 대칭이 되긴 하지만, 그보다는 ‘국조오례의’의 속제 양식을 따른 동서방향의 가로축 진설에 가깝다. 이러한 예는 오직 서산대제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여기에서는 예조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서산대사 제향이 너무나 커서 공자 제향을 오히려 억누를 수 있는 상황을 피하고자 가로 진설이라는 변통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어떻든 정조는 이 진설도를 윤허했다.

제찬 역시 매우 특별한 구성이다. 떡 3종류와 두부를 제외하고, 모두 날채소, 해초, 견과류와 낟알곡식이다. 다른 종묘제례나 문선왕 제향에 들어가는 육식과 생선을 모두 빼고, 채소 중에서도 불교의 기피음식인 부추도 빼게 했다. 불교계의 관행을 존중한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인 영·정조시대에 오면 변례가 상당수 나타나는데, 조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기존의 틀로는 예제를 맞추기 힘들거나, 예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변화는 극미한 정도다.

그런데 서산대제의 과감한 진설은 시대의 변례의 범위를 넘어서는 특례로, 조선의 의례·사상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진설도가 불가피했다. 국왕이 불교사상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국면에서 예조는 오례의의 규칙을 지키면서도 ‘국조오례의’를 뛰어넘는 제향 진설도를 출현시켰다. 임진왜란에 수없이 흘린 의승군의 피가 국가의례로 정착되기까지 20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서산대사는 젊은 날 두륜산 대흥사에서 도를 깨우쳤고, 이곳에 주석한 일이 있었다. 서산대사는 대흥사가 북으로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떠받들고, 남으로는 땅꽂이가 된 달마산이 있으며, 바다와 산이 서로 호위하여 만세 동안 헐어 깨뜨릴 수 없는 땅이라 했다. 서쪽으로 삼십리면 진도와 우수영이 나오고, 남으로 삼십리면 보길도와 제주도로 나가는 뱃길이다. 이 부근 지역에는 800명의 의승병이 충무공 휘하에 편입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스님은 임란이 끝난 지 6년 만에 열반하면서 이곳 대흥사에 의발과 선조가 내린 교지를 보내게 하고, 순박한 해남사람들을 깨우치게 했다. 국난의 최후보루라 생각한 것이다. 누란의 위기를 승리로 이끈 큰스님의 원려는 정조대왕에 와서 새롭게 각광받게 되었다. 정조는 나라 남쪽 귀퉁이 두륜산 대흥사에 예조정랑을 보내며, 종5품의 진도군수·낙안군수, 고을 원인 해남현감과 흥양현감을 불렀다. 이들 수령들을 제향에 집례를 맡겨 서산대사를 떠받들게 하고, 더 높은 종3품의 장흥도호부사를 불러 찬자를 맡게 했다. 초헌관은 예조정랑을 보냈지만 아헌관·종헌관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스님들이 맡게 했다.

기이한 것은 멀리 지금 광주광역시의 경양찰방을 불러 대축을 맡게 한 일이다. 그는 종6품의 낮은 직급이지만 유사시 이 지역의 군수품·중앙연락관의 책임을 맡을 사람이다. 정조가 바다와 산이 호위하는 만승지지의 사찰에 이 관원들을 해마다 두 차례 집결시키게 한 데는 국가방위를 위한 방편이었던 것 같다. 적의 대군이 출현하면 임란의 대첩지인 해남우수영을 중심으로 한 진도-해남-강진-장흥-고흥반도(흥양, 낙안)로 이어지는 서남해의 해상방위선이 의승병들의 존재로 굳건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대흥사의 서산대사 제향은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

진정 서산대사와 정조대왕은 7세대 200년이라는 먼 시차를 두고 한반도 땅끝에서 만나 불교의 복권과 조선의 안녕을 이뤄낸 영웅들이다. 정조는 앞서 어제명을 묘향산 수충사에도 내려 서산대사 제향을 설행케 했는데, 그곳 역시 청나라와 접경지역으로 국가방위의 최전선이다. 정조는 이처럼 서산대사 제향을 나라 지키는 초석으로 삼았던 것 같다.

1970년대 이후 서산대제 복행

서산대제는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1970년대말 대흥사에서는 나라의 도움없이 스님들만으로 표충사에서 서산대사 제향을 복행하였다. 회주 보선 스님은 1997년에 ‘대둔사지’를 번역 발간하여 서산대사의 활동과 정조대왕의 사제 사실을 일반에 알렸고, (사)서산대사호국선양회를 만들었고, 제향일에 ‘나라사랑글쓰기대회’를 하면서 제향의 외연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몽산 스님 때는 표충사 성역화를 완성하였고, 2012년에는 범각 스님의 노력으로 드디어 국고 지원에 의한 국가제향이 성사되었다.

2012년 첫 서산대제는 표충사 안에 신위와 진설상을 베풀고, 옛날 제례를 가장 유사하게 모사하는 형태로 올렸다. 고풍스럽고 단아한 제향이었다. 대중들은 표충사 밖에서 대형 LED를 통해 이 광경을 관람하였다. 참배객·관람객들이 관람의 불편을 호소하여 다음해부터는 보현전에 특설무대를 만들어 제향을 설행했다. 다음해에는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주최로 서산대제 학술세미나를 열었고, 여기에서 발표된 제례 진설상 고증에 따라 정조13년에 행한 진설상을 복원했다. 2016년에는 예제관 맞이 행사를 보입하였다. 과거 행차 모습을 재현하여 관람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차원을 넘어 예제관 행렬을 서산대사 제향과 내적 연관성을 맞춰간 것이다.

사찰에서 행례하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특설한 프로그램도 있다. 어느 해는 의승병의 항거정신을 시각화하기 위해 선무도 시연을 하기도 했다. 특별한 것은 해마다 지역 해군 군악대가 서산대제에 참례하고 있는데,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이것은 지난날 의승수군의 눈물을 오늘 해군이 진혼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월우 스님은 서산대제의 대중화에 힘을 쏟고 있다. 2016년에는 예제관 맞이 행렬을 만들고, 대중들이 들어오는 길목인 일주문에서 범패스님들의 바라춤 작법을 벌인 것이 그런 예다. 어느 경우나 서산대제가 처음 설행될 때의 정신과 형식을 이어받는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동시에 불법도량을 청정히 하면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의례들을 모색한다는 일 또한 늘 숙제로 안고 있다 하겠다.

2016년 제향에서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참례한 것은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정조대왕이 제관으로 예조정랑을 보낸 사실과 가장 부합하는 내용이다. 당시 예조정랑 정기환은 전례관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현재 우리 정부 편제에서는 문화재청장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간 축적되어 발전한 서산대제의 내용이 외부에 알려졌고, 주최자인 대흥사에서 적극 섭외한 데에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서산대제의 참된 의미를 이어가고자 하는 공직자들의 변모한 자세가 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이의 치사는 ‘해군들이 참여하여 행사를 빛내주었고, 서산대사의 고귀한 정신을 어린 학생들 속에서 되살리도록 애쓰자’는 내용이었다. 매우 당연한 이 말이 매우 힘있게 들렸던 것은 그 직책이 이 제례와 내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 뛰어넘는 공감 재현해야

제향을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도 있다. 스님들은 속가의 부모 제사에도 몸을 굽혀 절하지 않는 것이 풍속이다. 하지만 계홍 스님과 천묵 스님은 먼 스승인 서산대사께 이 절을 올리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무릅써, 드디어 나랏님 허락을 얻었으나, 정작 제향에 절을 올리지 못했다. 이듬해 표충사 낙성을 앞두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추향 제문을 쓴 연담유일 스님이 대신 아헌을 올렸을 것이다. 유일 스님은 그날 세 분 대사님의 신위에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사미가 그 옛날 선배들이 허용받아 온 절차를 따라 대종사에게 깊은 절을 올릴 때, 대중들에게 더 큰 울림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렇게 올리는 절이 불교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게 될까? 지금 제례에서 아헌·종헌을 맡은 분들은 2부 법요식에서 정중히 모시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본다.

21세기에 18세기의 감동을 되살려 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날의 비장한 감성은 오늘날 행복한 나들이 축제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많은 제약을 딛고 의미있는 제향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앞으로 서산대제가 나아갈 방향 역시 서산대사와 정조대왕이 200년이라는 시대를 뛰어넘어 만들어낸 공감을 주관자인 대흥사와 불자들·국민들 속에서 재현해 내는데 있을 것이다. 기록과 유물이 많이 산일했지만, 대흥사에는 아직도 수많은 보물들이 남아있다.

서산대제 제단. 왼쪽부터 뇌묵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강례제에서 제례소를 향하는 제관들.
대흥사 경내로 들어오고 있는 예제관 행렬.
서산대사 제향에서 스님들이 바라춤을 추고 있다.
서산대사 제향 진설.
서산대사 제향 의식 중 헌례.
서산대사 제향 의식.
서산대사 제향이 끝난 뒤 해군장병들이 예포를 쏘고 있다.
정조대왕이 직접 글을 써서 대흥사에 보낸 화상당명.

글ㆍ사진=김성재/역사학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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