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윤리관도
이타행 근거 되면
불교의 가르침과 같아

나에게 최근의 시간들은 말 그대로 ‘죽음의 계절’이었다. 연이어 나에게 매우 특별한 인연을 가진 두 사람이 별세했다. 한 분은 나에게 학생 시절에 한국어를 가르친 상트-페테르부르그 국립대학의 원로 교원 임수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오랫동안 망년지교를 맺어온 한국 작가 송영 선생님이다. 나에게 매우 소중했던 두 분의 타계를 애도하면서 죽음이라는 현상을 계속 사색해 본다.

인간의 심신이란 오온가합(五蘊假合)이라고 부처님이 가르치셨다. 그저 임시적으로 여러 요소(색·수·상·행·식 등)들이 잠시 뭉쳤다가 곧바로 흩어지게 되는 것일 뿐이다. 이 뭉침도 이 흩어짐도 결국 고(苦)다. 죽음은 두려운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유효기간’이 지난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는 오온의 흩어짐은 차라리 덜 고(苦)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당장 한 순간에 죽지 않는다. 자연사라면, 죽음은 일시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노화와 같이 하나의 과정이다.

불교 속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이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 없는 수용의 태도일 것이다. 죽음이 삶의 연장인 만큼 삶을 받아들이는 이상 죽음도 똑같이 받아들이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다. 삶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삶과 연결돼 있는 각종 욕망들이고,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은 죽음을 겁내는 공포심리인데, 욕망도 공포도 상대화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일 것이다. 공포를 없애는 방법들 중에서는 참선도 있지만 또 하나의 방법은 개체와 총체를 연결시키는 사고를 머리 속에서 키우는 것이다. 개체는 고(苦) 속에서 살고 또 고(苦) 속에서 가지만, 인류는 지속된다. 개체가 인류를 위해 뭔가를 하고 갔다면 굳이 어차피 가상(假像)에 불과한 한 개아의 오고 감에 그렇게까지 겁낼 게 있겠는가? 인류 등 지구의 뭇생명이 인간의 집단적 어리석음으로 언젠가 파멸을 맞아도 지구라는 행성이 남을 것이고, 지구가 없어져도 태양계가 남고 태양계가 없어져도 우주가 남는다. 그리고 그 우주 속에서는 어디에선가 언젠가 다시 생명의 불이 지펴질 것이다. 내가 속하는 여러 전체들을 이렇게 종합적으로 사유해보면 아상(我相)에의 집착이라는 공포의 근원이 결국 극복된다. 그렇게 해서 무외(無畏)의 경지가 오면 이야말로 이고(離苦)다.

또 하나의 이고(離苦)의 방식은, 자신의 개아와 다른 개아들에 대한 분별심을 버려, 모든 개아들을 자기처럼 여기는 것이다. 개체와 전체를 하나로 엮어서 동등히 여기면 이런 의식이 절로 싹틀 것이다. 그렇게 불 수만 있다면 삶도 죽음도 고(苦)에서 낙(樂)이 될 것이다. 나에게 그런 태도의 전형은 바로 임수 선생님이었다.

임수 선생님은 그 어느 종교의 ‘신도’도 아니었다. 임종의 순간까지 그의 책상에 레닌의 두상이 놓여 있었다. 한데 사회주의의 윤리관이 이런 이타행의 근거가 될 수 있다면, 그 뿌리는 비록 달라도 그 과(果)는 불교의 가르침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싶다. 중요한 것은, ‘불교’나 ‘사회주의’와 같은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생명, 타자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임수 선생님은 타자를 자신보다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본인의 몸에 완벽하게 내면화돼 있는 사회주의적 윤리관에 입각해서, 몸이 아무리 안따르고 기억력이 아무리 떨어져도 학생들을 위해 매일 강단에 서야 할 체질적 필요성을 느꼈다면, 그는 ‘보살’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해도 이는 보살행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던 미소를 생각하면 이를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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