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독립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

문 : 삼남매가 모두 취업을 해서 큰 딸과 막내아들은 객지에서, 둘째는 저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3개월 전에 엄마가 힘들게 해서 같이 못 살겠다며 둘째가 40분 거리에 집을 따로 얻어 나갔습니다. 힘들게 했다면 미안한 마음이지만 자꾸 퇴근시간에 집에 올 거라 믿으며 허공에 대고 둘째를 부르네요. 마음이 많이 힘듭니다. 어떤 기도를 하면서 저를 추스르면 좋을까요? 월도 스님의 좋은 말씀 기다립니다.

답 : 우리 부처님께서는 자녀사랑의 근본을 반야에 두셨어요. 자녀들을 반야로 키워야,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는 바라밀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습니다. 상에 집착함이 없이, 상에 머물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내면 금강과 같은 반야를 이루고, 금강반야를 이루면 그게 바라밀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정말 잘 살려면 집착부터 비우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죠? 집착을 버리고 싶어도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 안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착을 놓지 못하고 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이건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부처님은 “정성을 다하되 집착은 비워라.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베푸는 것으로 끝내라.”라고 가르치셨어요. 내가 널 위해서 이렇게 한다, 널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한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는 잘 살아야 하니까, 등등 이유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무위법(無爲法)으로 자식을 키우라고 하셨어요. 집착함이 없는 법이 무위법입니다.

‘해주었다.’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해주었으니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 이런 기대를 버리셔야 해요. ‘나’의 집착을 비우라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생각, 내 방식의 고집을 비우라는 것일 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비우고 자식에 대한 정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시면 큰일 납니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죠? 다 큰 성인이 된 자식이 독립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식을 향해 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리세요.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내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아쉽고 서러운 마음도 서서히 내려놓으세요.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가 자식한테 집착하고 있고,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된 자식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부모의 마음부터 혼자서기를 하셔야합니다.

자식바라기의 삶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드시겠죠. 둘째가 엄마 혼자 여유롭게 쉬라고 휴가를 줬다고 생각해보세요. 불자님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을 누려보세요.

자식에 대한 집착을 털어내면 엄마와 사는 것이 불편해질 이유가 없겠죠? 내 마음을 다스려서 내가 편해진다면 자녀와의 관계는 저절로 호전될 겁니다.

문 : 스님, 저는 늘 마음이 아픕니다. 셋째 딸이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생후 6개월부터 놀랐는지 아이가 뇌손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7살이 된 지금까지 계속 재활치료를 위해서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데요. 딸이 너무 고생을 해서 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답 : 부모한테 자식걱정만큼 마음 아픈 게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불자님이 힘을 내어 따님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셔야죠.

<법구경>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다. 지난날의 그림자만 추억하고 그리워하면 꺾어진 갈대와 같이 말라서 초췌해지리라.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라. 진실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이 말씀을 왜 드렸냐면요. 힘을 내시라고요. 현재의 한 생각만 굳게 지켜서 진실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것. 이게 불자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같아요.

딸이 고생을 해서 마음이 아프시다 했죠? 따님은 어린 아들이 아파서 마음이 더 아플 겁니다. 딸의 고생을 아파하는 마음으로 따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세요. 내 아픔이 크다고 혼자만 속상해하실 게 아니라, 따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뭔지, 도와줄 방법을 생각해주시는 게 불자님의 아픔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잘 하고 계시겠지만, 불자님의 사랑이 따님과 손자에게까지 미치도록 해주세요.

<보왕삼매론>에 보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고,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스승이 되고 양약이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무상을 말하죠. 인생이 무상하다, 허탈하다 이게 아닙니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머무르는 건 없다는 말입니다.

유태인의 지혜서 <미드라쉬>에 다윗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공인에게 반지를 만들어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고,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기라고 합니다. 세공인은 아름다운 반지는 만들었지만 어떤 글귀를 넣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솔로몬 왕자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때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글귀가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입니다.

불교의 제행무상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아픔이, 지금의 고통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불자님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따님과 손자의 고통까지도 감싸안아주는 것이 최고의 수행임을 잊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